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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lla Aug 01. 2022

헤어지는 일 _ 하


 그날따라, 새벽이 참 퍼렇더라. 내 침대 발 밑에서 엄마가 숨죽여 흐느끼고 있었다. 나는 괜한 짜증으로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누르며 내 생에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을 맞닥뜨릴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엄마는 아래로 남동생 하나, 위로 언니가 넷이나 있다. 그 시절에 누구나 그랬듯 복작복작한 형제들 사이에서 나이차가 많이 나는 큰언니와 둘째 언니의 심부름을 도맡을 수밖에 없던 막냇동생은 유독 바로 위에 자매와 조금 더 돈독한 관계로 지냈던 것 같다. 자연스럽게 나와 이모의 자녀들은 심리적으로 다른 사촌 형제보다 가까운 사이처럼 느꼈다. 인생이 늘 그렇듯 필요한 사람은 물리적으로 멀리 떠나버리기 마련인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이모는 내 사촌 형제들이 십대일 때 아메리칸드림을 찾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이민을 준비하던 이모의 가족들은 잠시간 홍천에 머무르며 살았고, 우린 이따금씩 이모집에 놀러 가서 잠자는 개구리도 깨워서 잡아먹고 메뚜기도 튀겨먹었다. 먹을 게 없던 시절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어떻게 먹었나 싶은 기괴한 간식이 그때는 별미였다. 이모네와 가까이 지내던 이웃 등이 살던 그곳은, 이제는 누구나 예약하면 놀러 갈 수 있는 휴양지로 바뀌었다. 바로 집 앞에 홍천강이 흐르는 공기 좋은 곳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곳의 강은 꽤나 깊었지만 아빠는 나를 튜브에 앉혀 강을 건너, 강가 돌 벽에 붙은 다슬기를 따서 보여주곤 했고, 지금은 알러지 때문에 만지지도 못하는 고양이를 꼭 껴안고는 분홍색 수두약을 잔뜩 바른 얼굴로 방긋 웃는 사진도 남아있다.

 이모네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 후에도 이 관계는 이어졌다. 나와 딱 열 살이 차이나는 사촌 언니는 소싯적 과격한 편이었는데, 가출을 하면 비행기를 타고 우리 집에 올 정도였다. 어린 나와 언니는 친자매처럼 투닥투닥 싸우기도 했고, 같이 치킨 같은 걸 시켜먹으며 화해하기도 했다.


 언니와 두어살 정도 차이가 났던, 부친과 닮아 유난히 미남이었던 오빠와는 나이가 꽤 먹었을 때가 되어서야 친분이 생기기 시작했다. 오빠는 우리가 경기로 이사 갔을 때 집에 놀러왔다. 오빠는 사촌동생인 나에게도 용돈을 줄 정도로 한국의 문화에 대해 잘 몰랐다.

 그가 이십대 후반이 되었을 즈음 무슨 결심이었는지 혼자 한국으로 재이주를 했다. 한국에서 군대도 가고, 일도 구하려 한다 했다. 한국 문화에 대해서는 젬병이지만, 한국말도 영어도 수준급으로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란 오빠는 본인의 상황에서 가장 적합했던 호텔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일을 구하고 출퇴근이 용이하도록 근처에 거처를 구할 때까지 한달여간 우리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나는 사춘기 이후 엄마도 아빠도 내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지만, 오빠에게는 흔쾌히 방을 내주었다. 그가 가족과 떨어져 한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한 것이었다. 나는 오빠에게 우리가 친형제는 아니지만,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생활을 하면 식구가 되는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오빠는 내 친구들을 데리고 놀이동산에 데려가기도 했고, 학교로 나를 데리러 오기도 했다. 형제가 없는 나는, 멀끔하니 키도 크고 잘생긴 친오빠가 생긴 것 같아 뿌듯했다. 오빠가 있어 자랑스러웠다.

 얼마 후, 회사 근처에 거처를 구한 오빠의 집을 엄마, 이모와 함께 찾았다. 벽 한쪽에 옷가지를 걸면 다른 편에 한 사람이 겨우 누울 침대를 놓을 수 있던 작은 방이었다. 이모는 한국에 혼자 들어와 홀로서기를 하는 오빠의 거취가 탐탁지 않은 듯 보였지만, 애써 응원하는 듯 보였다. 오빠가 일하는 호텔 근처에서 다같이 밥도 먹고, 한국에 와서 만났다는 여자친구와도 인사를 나눴다. 혼기가 찰 때쯤이었으니 잘 만나다 결혼도 하면 좋겠다고 우리는 생각했던 것 같다.


 몸이 멀어지니 자주 연락은 못했지만, 오빠는 종종 근황을 전해왔다. 그리고 웬만큼 경력을 채워두고 병역의 의무를 하기 위해 군에 들어갔다던 오빠가 돌연 중간에 나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얼마 후 다시 입대를 한다고 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다시 돌려보내 졌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게 세번째였더랬다. 그가 미국에서 벌인 몇 가지 사고가 문제가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여자친구였던 사람의 결혼 소식이 들렸다. 상대는 오빠가 아니었다. 그리고 우리는 오빠와의 연락이 끊겼다.



 어딘가에 잘 있겠거니 했다. 그리고 가끔 문자를 남겼다. 가족들이 걱정하니 연락은 주라고 했다. 전화도 문자에도 답이 없으면 곤란하다고 했다. 주제넘은 짓이었을까?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다들 자신의 삶을 살았다. 이따금씩 걱정은 되었지만 괜찮으려니 했다.

 대학교 2학년 2학기가 막 시작하려던 쯤이었다. 나는 주말에 애버랜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강남에서 셔틀을 타려면 새벽같이 일어났어야 했다. 그리고 기상시간을 한시간 정도 앞뒀을 때, 시퍼런 달빛이 방 안으로 새어 들어오고 엄마의 흐느끼는 소리가 어스름하게 들렸다.


 엄마는 경찰의 전화를 받았다고 했다. 오빠의 이름을 언급하며 아는 사람이냐 물었다고 했다. 그리고 시신을 수습하러 홍천의 모 병원으로 와야한다고 했단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말라고 엄마에게 소리치고 출근했다. 버스로 강남까지, 강남에서 용인까지 가는 동안 아무리 생각해도 아침에 엄마가 한 말은 그저 나쁜 꿈일 뿐이라고 믿고 싶었다.

 갑자기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엄마가 아침에 대체 무슨 소릴한거지. 나는 그제서야 엄마가 새벽같이 받은 전화가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당연히 일을 마칠 수 없었다.

 그가 고작 서른세살이던 가을이었다.



 미국의 가족들을 기다려야 해서 장례는 일주일 가량 진행되었다. 한국에 지인도 없어 텅 빈 장례식 장엔 외가 친척들 뿐이었다. 아무도 제정신인 사람은 없었다. 우리에게 가장 고통스러워 잊어버리고 싶어진 일주일이었다. 자신의 가장 행복한 기억이 새겨진 홍천에 그를 떠내려 보내주고 돌아오는 길, 우린 모두 마른 눈물을 흘렸다.

 수년이 지날 때까지 나는 힘겨운 일이 있을 때면 우리집 장롱에 보관되어 있던 오빠의 영정사진을 꺼내 품에 안고 자고는 했다. 그리고 혼자 홍천엘 가 소주를 뿌려주고 돌아왔다.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에게 오빠의 죽음은 부채로 남아있다. 그를 잃게 한 죄책감은, 오빠를 여러번 돌려보낸 군대도, 그를 내버려두고 제 삶을 찾아갔다던 그의 전 여자친구도, 그리고 그를 혼자 둔 우리 모두에게도 지분이 있으므로.



 이제 그의 영정을 보아도 울기만 하지는 않는다. 참 잘생겼었는데 하며 아까워하기는 한다. 그리고 오빠의 멈춘 시간보다도 훨씬 더 나이를 먹은 나는, 이제 그는 저 멀리 바다를 여행하고 있겠구나 하며 미소짓기도 한다. 십여년이 지나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최근, 가장 가까운 친구의 아버님이 소천하셨다. 모태 크리스천인 우린, 그의 육신은 세상을 떠나갈지라도 그의 영혼은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행복한 하늘나라로 가셨으리라 굳게 믿으므로, 슬프지만 슬퍼하지만은 않기로 했다. 단지 그는, 병든 육신을 이곳에 두고 가벼이 날아갔으리라. 하지만 운 좋게 아직 부모님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고, 영상으로나마 얼굴도 볼 수 있는 나는, 아비를 잃은 그녀의 슬픔에 대해서 한마디도 하기가 어렵다. 말하지 않았는가,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 말을 아끼는 편이 좋다고.

 그래서 다만, 자리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몹시 아프다고 했다.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이별을 한다.

 그 모든 이별 중에 가장 마음 아픈 일은, 서로 손 맞잡고 눈도 맞추고 야식도 나눌 수 없는 헤어짐일 것이다.   

 마흔을 바라보는데도 이를 위로할 수 없고, 위로하는 방법도 몰라 버둥거리지만 조심스럽게, 오늘 이 글을 통해 십여년 전의 나를 위로해본다. 그리고 곁을 함께 지켜주지 못해 미안한, 사랑하는 아버지를 그리워할 내 친구에게도 서툰 위로를 전하며 용서를 구해본다.










                      유독 힘들고 어려워 길지 않음에도 부득이하게 두편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몇 자 적어내는 것이 뭐 그리 큰 위로가 되겠느냐만은,

         그리고 이 글 역시 주제넘은 건 아닐까 염려가 됩니다만,

어려운 이별을 한 모든 분들이 한바탕 눈물을 쏟고 무거운 마음을 조금은 털어낼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떠나신 분들의 평안을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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