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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필가 고병균 Dec 02. 2023

[8-5] 제1차 울산성 전투

수필 임진왜란

일본군은 총공세와 함께 수륙 양공책을 펼치려고 했었다. 그러나 명량대첩에서 이순신에게 대파함으로 좌절되었다. 일본군은 해안가에 왜성을 쌓고 농성에 돌입했다. 사실 일본군 지휘관들은 본국으로 철수하고 싶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철수 불가와 재북상을 독촉하여 엉거주춤한 상황이었다.

조·명 연합군은 이들을 격파하여 전쟁을 끝장내겠다고 결의했다.     

조·명 연합군의 공격 목표는 울산의 도산성이다. 

첫째 목표는 도산성을 점령하는 일이다. 도산성은 일본군의 침략 본거지 부산과 매우 가깝다. 따라서 도산성을 점령하면 부산에 있는 본거지에 심각한 위협을 가하게 되고, 조선 침략을 사실상 좌절시킬 수 있다. 

둘째 목표는 도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장군 가토 기요마사를 죽이는 일이었다. 그는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는 등 조선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준 악몽같이 기억된 인물이다. 그를 잡아서 반드시 설욕해야 한다.      

조명 연합군은 울산성 공략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2월 20일에는 여여문을 도산성에 잠입시켜 일본군의 배치를 기록하였다. 공성에 투입되는 병력만 해도, 명군 최소 30,000명에서 최대 44,000명과 도원수 권율을 최고 지휘관으로 하는 조선군 10,000여 명 등 모두 50,000명에서 60,000명을 투입했다. 연합군은 본영을 경주에 설치하고, 일본군의 원병을 차단할 길목도 선정하였다. 정예 병력과 군량, 화포 등이 속속 모여들었다. 또 호남 지방으로 별동대를 보내어 순천 왜성들을 공격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말 그대로 일본군을 낚기 위한 작전이었다.     

1598년 1월 19일(음 1597년 12월 23일), 연합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명의 마귀, 이여매, 파새가 지휘하는 명군은 울산성 서북쪽으로 진군하여 일본군을 성내로 퇴각시켰고 경리 양호의 군대는 울산성의 목책을 점령하였다. 그 결과 도산성 바깥의 병영성과 언양성이 함락되었고, 서생포 왜성과는 연락이 두절되었다. 도산성은 조·명 연합군의 그물 같은 포위망에 갇혔다. 

일본군의 조총 공격에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양호는 퇴각명령을 내렸다

조·명 연합군은 포위망 유지와는 별개로 공세를 강화했다. 가까운 일본군이 언제든지 구원할 수 있는 상황에서 포위만 하고 있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음력 28일 연합군은 도산성 외성을 함락시키며 가토군을 몰아붙였다. 가토군은 좁은 내성으로 몰리며 결사 항전을 시작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가토 기요마사는 결국 할복을 준비하는 사태를 맞이한다.

조·명 연합군의 목표가 도산성의 가토 기요마사라는 것이 명백해지면서 나오시게, 모리 카츠노부, 아사노 나가마사와 요시나가 부자, 다치바나 무네시게, 하치스카 이에마사 등 일본군 장수들이 성에서 나왔다. 거리도 멀고 가토와 사이가 나쁜 순천의 고니시 유키나가까지 출병하였고, 총사령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도 자신의 가신 야마구치 무네나가를 급파했다. 6만 ~ 8만에 달하는 일본 대군이 도산성으로 몰려들었다. 

조·명 연합군은 공성군을 줄이고 일본 구원군과 맞서게 했다. 그러나 결과는 일본군에게 박살이 나고 말았다. 

퇴각하는 연합군과 추격하는 일본 구원군 사이에 교전이 발생하는데, 조선과 명의 기록에서는 ‘추격을 예상하고 퇴로에 복병을 설치, 추격군을 섬멸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반대로 일본에서는 ‘무질서하게 패주 하는 조·명 연합군을 무참히 개박살냈다.’는 기록이 나온다. 10여 일에 걸친 울산성 전투는 일본군의 승리로 끝났다.     

울산성 전투에서 이겼지만 일본군이 느낀 위협은 매우 심각했다. 표적이 된 가토 기요마사는 기껏 축조한 도산성을 포기하고 서생포로 후퇴해 종전 시까지 거기에서 웅거 한다. 가토만이 아니라 다른 일본군 장수들도 보다 더 안전한 성으로 옮기려고 난리를 쳤고 기존 성의 방호력을 약간이라도 강화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따라서 구로다 나가마사, 하치스카 이에마사 등은 본국에 공동으로 서한을 보내어 철수를 요청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화를 내며 오히려 전면 공세를 지시했다.      

제1 울산성 전투에서 조명 연합군은 분전했으나 끝내 점령하지 도산성을 못했다. 가토 기요마사를 잡아들이지도 못했다. 그것이 몹시도 아쉽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이 전투를 승전이라 해도 무리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 이유로 왜군 6천여 명을 섬멸한 점, 울산성 전투에서 패전의 치욕을 이기지 못한 가토 기요마사가 두 차례나 자살을 시도한 점,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 제1군이 주둔한 도산성을 버리고 서생포로 퇴각한 점 등을 근거로 제시한다. 어떤 학자는 울산성 전투는 명량 해전과 함께 일본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구로다 나가마사와 하치스카 이에마사가 본국 철수를 요청하는 공동 서한을 보냈다고 말한다.      

울산성 전투에서 패한 조·명 연합군은 새로운 전략을 논의했다. 동로군, 중로군, 서로군의 육군과 수로군으로 편성한 사로병진책을 수립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명 연합군은 일본군이 후퇴할 때까지 저들의 진영을 함락시키지 못한다. 흐지부지 끝나고 만다. 그 모든 것을 우리의 영웅 이순신이 감당한다. 노량 해전에서 저들을 박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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