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임진왜란
칠천량 해전의 소식을 전해 들은 이순신은 선조로부터 교서를 받기 전에 행동한다. 수군 재건을 위한 그의 행적이 어떠했는지 난중일기의 기록으로 알아본다. 날짜는 1597년의 음력이다.
7월 18일, 칠천량 전투의 소식을 듣다. 도원수 권율과 대책을 의논하고 초계를 출발하여 삼가에 도착했다. 이순신에게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는 조선 수군을 재건하는 일이다. 흩어진 수군 병사를 불러 모으고, 전함도 갖추어야 한다. 식량과 무기도 확보해야 한다.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이순신 자신뿐이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한탄하고 있다.
"한산도가 무너진 이후 전선과 무기가 흩어지고 사라져 거의 다 하였습니다. 신은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 김억추 등과 더불어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의 바닷길에서 요충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11월 10일 자 5번째 기사
조선 수군은 어렵사리 구색을 갖추었다. 그 규모는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이 고작이다. 이를 상대할 일본 수군 함대는 10재가 넘는 133척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에게 ‘육전으로 돌리려.’라고 선조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 명령은 이순신의 가슴에 불을 지르게 한다. 선조는 사사건건 방해만 한다.
조정의 대신들도 마찬가지다. ‘수군을 없애고 육군으로 합치자.’라고 주장한다. 윤두수는 ‘전선이 남았더라도 수졸이 없어서 전선을 운영하기 힘들 테니, 해역을 방어하게 하자.’고 주장했다. 류성룡도 ‘남은 전선을 강화도로 모아 방어하자.’라고 제안했다. 이는 모두 하삼도 수운 방어를 포기하자는 의견이다. 책상 앞에 앉아서 죽을 꾀만 내는 대신들과 달리 이순신은 반대 의견을 낸다. 그것이 『이충무공전서』에 있다.
임진년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아니하였으니 왜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전쟁의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필승의 신념이 구구절절 전해진다. 이순신의 이 발언은 정유재란의 흐름을 바뀌게 했다.
8월 20일, 이진포로 진을 옮겼다. 하지만 칠천량에서 겪은 패배로 장졸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설상가상으로 이순신 본인도 토사곽란으로 사흘 내내 몸져누웠다. 토사곽란이란 위로는 토하고 아래로는 설사하면서 배가 뒤틀리듯이 몹시 아픈 질병이다. 나 어렸을 때만 해도 이런 질병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중에 어란진으로 진을 이동했다. 그러는 중에 ‘적이 왔다’라고 헛소문을 퍼트린 자가 있었다. 이순신은 그를 처형했다. 이처럼 유언비어를 생산하고 퍼뜨린 자에게는 엄한 벌을 내려야 한다.
8월 28일, 어란진에 일본군 수색대 8척이 나타났다. 그러나 조선 수군은 겁을 잔뜩 먹고 대항하려 하지 않는다. 이순신은 호각을 불어 수색대를 물리쳤다.
9월 2일, 경상 우수사 배설이 도주했다. 배설은 의병장 김면의 명령을 거부한 자이고, 칠천량 전투에서 배 12척을 이끌고 탈영한 자다. 이에 거리끼지 않고, 이순신이 싸울 준비를 하고 있다.
일본군은 이순신에게 배가 13척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조정에서 이순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일본 수군은 이를 조롱하듯 배 13척을 보내서 시비를 걸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라고 낙관한 것으로 보인다.
9월 7일, 탐망 군관 임준영의 보고가 들어왔다.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어란진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경(二更)에 적선이 야습하자 뭇 배들이 겁을 먹고 있다. 대장선이 선두에 나서서 적선을 구축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하룻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누었는데, 초경은 7~9시경을 말하고, 이경은 9~11시 경을 말하며, 삼경은 11~다음날 1시까지를 말한다.
9월 14일, 임준영의 보고가 또 들어왔다. 일본군에서 탈출한 포로가 전한 바에 따르면 ‘일본군은 이순신 함대를 격멸시킨 다음 서해를 따라 한강을 타고 올라가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라는 것이다. 만약 이게 실현되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조선은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땀이 나고 소름이 끼친다.
9월 15일, 이순신은 전투 준비를 서둘렀다. 사대부들의 솜이불 백여 채를 걷어다가 물에 적셔 배에 걸고, 물이 가득 든 동아리를 많이 실었다. 이는 수군 병사를 보호하려는 조치다. 이처럼 작고 세밀한 조치가 수군의 사기를 높이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했다. 결과적으로 이순신 자신을 민족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이순신은 진영을 해남의 전라 우수영으로 옮긴 뒤 다음과 같이 다짐한다. 그 내용이 『정유일기』 9월 15일 자에 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했으며, 또한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그대들 뭇 장수들은 살려는 마음을 가지지 말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리라!
9월 16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이순신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