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m, ...I am just slow..."
셋째 아이의 예정일이 다가오면서 곧 동생이 태어나게 될 거라고 둘째 진희에게 여러 번 말해주었다.
누나만 있었지 동생을 가져 본 적이 없었던 진희는 그게 무엇인지 정확이 이해하는 것 같지는 않았어도 너무너무 동생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예정일이 지난 지 두 주가 가까워오는데도 아기가 나올 기미가 없자 의사는 산모와 아가의 안전을 위해 유도 분만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사정을 알지 못하는 진희는 왜 빨리 동생이 집에 오지 않는지가 여간 불만이 아니었다.
화사한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5월, 드디어 셋째 송희가 태어났고 다섯 달 후 둘째 진희는 네 살이 되었다. 제법 오빠 노릇을 한다고 틈만 나면 송희에게 말을 하고 놀아 주려고 아가방을 들락거렸다. 마침 유치원을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척이나 신나 했던 진희는 일어나자마자 눈을 비비며 누워서 꼬물대고 있는 송희 침대로 다가와서 아침 인사를 건네며 하루를 시작했다.
"굿모오닝 쏭희~"
침대옆으로 다가간 진희는 송희옆에 있는 인형을 들어 몇 번 흔들어주고는 말할 줄도 모르는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 진희를 동그란 눈을 뜨고 옹알이를 하며 쳐다보는 송희를 바라봐주는 오빠의 시선은 달콤했다. 얼마쯤 놀아주고 난 진희는 대단히 중차대한 일이 생각난 듯, 어른 사람처럼 으스대며 송희에게 말했다.
"쏭희야, 미안한데 이제 그만 놀아야 돼. 오빠는 지금 피피하고 치카하고 세수하고 학교에 가야 해. 그니까 오빠 없어도 많이 울면 안 돼~ 엄마 쭈쭈 먹고, 잘 놀고 있써. 아랐써 쏭희야~?"
라고 우쭐대며 말을 했다. 그리곤 침대 옆에 놓여있던 stepstool에 까치발을 하고 올라서서 자기 몸통 반을 침대 안으로 구부려서는 사나이답게 송희에게 뽀뽀해 주는 것을 절대로 잊지 않는 다정한 오빠였다.
하루는 설거지를 마치고 송희침대로 와보니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과자를 너도 먹어보라며 마침 송희 입에 넣어주는 것을 보고 얼마나 놀랐었는지 모른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석 달도 채 못된 송희입언저리에 어정쩡하게 걸쳐 있었던 물고기 모양 크래커를 봤을 때 진희 눈치 못 채게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었다. 그런 나와는 다르게 자신의 최애 까까를 오빠처럼 맛있게 먹지 못하는 송희를 가엽게 생각하며 시크한 눈빛을 하고 내려다보던 천진난만한 진희의 그 예쁜 모습이 내 기억 속에 담겼다.
어느 날은 한참 전에 송희에게 갔는데 나오지 않는 진희가 무엇을 하고 있나 가만히 방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우리 침대에 얌전하게 눕혀놓았던 송희 옆에 나란히 누워서는 내가 읽고 있던 책을 그것도 거꾸로 들고서는 송희에게 열심히 읽어주고 있는 중이었다. 그림도 없이 빼곡히 인쇄된 글씨만 가득했던 제법 두꺼운 책을 펼쳐든 진희는 이렇게 읽어주고(!?) 있었다.
"쏭희야, 푸푸랑 피피는 배뜨룸에 가서 해야 해. 팬티에 피피 하면 오우 노우노우~ 진짜 진짜~ 안돼! 바지에 푸푸 하면.. 진짜, 찌인짜~ 빅, 빅~프라불럼(BIG BIG porblem~). 꼭 꼭 꼬~옥 배뜨룸에 가서 해야 돼. 아랐써 쏭희야?!"
자신이 배변 훈련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겁주듯 동생에게 말하는 진희의 사뭇 진진한 얼굴을 보며 나는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아야 했었다. 마치 오빠는 동생에게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는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이 얼마나 엉뚱하고 우스웠는지 모른다. 그때 그 순간을 영상으로 남겨둘 수 있었다면 오래도록 두고두고 보물처럼 들여다볼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아쉽다. 그런 순간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그렇게 내 마음과 기억 속에 코옥~찍혀버린 선명한 추억들이 쌓이고, 그것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너무도 많다.
유난히 머리통이 크고 몸집이 크게 태어났던 진희는 신생아실에 누워있는 다른 서양아가들에 비해 한눈에 봐도 우리 아이인 것을 금세 알아볼 만큼 넓적하고 둥그스런 얼굴이 너무도 사랑스러운 아이였다.(적어도 내 눈에는) 두세 시간마다 깨서 모유 수유를 해야 했던 신생아였는데도 6-7시간을 보채지 않아서 혹시 잘못된 게 아닐까 하고 자고 있는 진희의 코끝에 귀를 대고 숨 쉬는지를 확인한 적도 있었다. 그만큼 잘 먹고 잘 자고 순해서 무난하게 그때를 지나가게 해 준 아이였다.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누나가 하는 모든 행동을 따라 하고 싶어 하는 진희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우리 부부를 얼마나 웃게 해 주었는지. 머리모양도 그랬지만 전체적으로 두리뭉실 동그란 모양새를 하고 있는 진희여서였을까? 많은 것에 굼뜨고 느리기도 해서 뭐든 천천히 습득하는 아이였다. 타고난 성향이 그런 것이었을 텐데 그때는 그런 걸 알아주고 이해해 주는 게 더 많이 서툴렀던 한참이나 모자란 엄마였다.
모임이 있었던 어느 날 아침, 한 손에는 송희가 누워있는 카싯과 다른 한 손에는 기저지와 아이 장난감들, 그리고 진희의 먹거리 등을 넣은 가방을 들고 서있었던 나는 벌써 여러 번씩이나 신발끈을 풀었다 묶었다 하는 진희를 내려다보며 지쳐가고 있었다. 요 근래 누나로부터 신발끈을 묶는 것을 배워둔 진희는 외출할 때마다 흥분했다.
나는 들고 있던 카싯과 기저귀 가방이 너무 무겁기도 하고 모임에 늦을까 봐 조급해져서 진희를 재촉했다. 엄마가 해줄 테니 이제 그만 연습하자고 꼬이기도 했지만 우직한 진희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나의 말에는 아랑곳없이 자기 성에 안 찼는지 어설프게 묶어가던 신발끈을 또다시 풀고 있었다.
"큰 동그라미, 작은 동그라미, 그다음은 이러엏게~ 엇갈려서...요기에 두르고, 저쪽에다 묶은 다음..."
앙징맞은 조개크기만 한 진희의 통통한 작은 손이 서투르게 신발끈을 잡고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씨름을 한지 벌써 여러 번, 드디어 인내심 많은 좋은 엄마 포기하고 무서운 엄마 얼굴로 변신해 버렸다.
"진희야! 이러다가 엄마 정말 늦어!~ 이제 진짜 그만하고 얼른 가자! 다음에 연습하면 되잖어, 응 진희야???"
다그치듯 내뱉아버린 짜증이 가득 담긴 나의 말을 듣고 난 진희가 집중해서 운동화 신발끈 묶는 것을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는 고사리 같은 손을 풀지도 않고 양손으로 신발끈을 꼭 움켜쥔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흠집 하나 없는 둥그런 보름달 같은 보드라운 진희의 얼굴이 마치 잔잔한 수면 위로 해가 떠오르듯 온화하게 조급한 내 마음을 서서히 비추는 것만 같았다. 순간 나의 성난 마음은 숨을 곳이 필요할 정도였다. 불만으로 잔뜩 뒤덮여있던 내 얼굴을 바라보는 너무도 깨끗하고 맑은 아이의 두 눈이 그 새하얀 얼굴 안에서 따듯하게 빛을 발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나를 올려다보며 조금은 나무라듯 말했다.
"맘,... 아임.. 저스트... 슬로..(Mom, I ...am... just ...slow...). 댓츠 올~(That's all~)"
물론 그 얼굴에는 나에게 크게 짜증을 내려거나, 무례함이 담겨 있지는 않았지만, 뭐라고 할까... 설명할 수 없는 꾸지람처럼 들렸다. 마치 망치로 세게 얻어맞는 것처럼 온몸에 전율까지 흘렀다. 순간 시원한 바람 같은 것이 내 속을 휙~하며 훑고 지나는 것 같았다.
그 말을 하고 난 후에도 진희는 신발끈 묶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 5분, 아니 10분쯤 지났을까. 그저 멍하니 열중한 진희를 물끄러미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다. 얼마쯤 후에, 이제는 자기 마음에 흡족했었는지 아님 재촉하는 엄마 때문에 그런대로 마무리를 해준 건지, 한참씩이나 쪼그리고 있었던 작은 몸을 천천히 펴서 일으키던 진희는 고사리 같이 작은 두 손을 툭툭 털면서 다시 나를 보고 말했다.
"맘, 렛츠 고우 나우!(Mom, let's go now!) 아임 올~ 던! (I'm all done!)"
이라고 말하고는 개선장군 같은 몸짓을 하며 내 앞을 지나쳐 서둘러 아파트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나보다도 더 급하게 가고 있는 진희에게 엄마를 기다려 달라고 말하면서 현관문이 잘 잠겼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내려놓았던 송희 카싯과 기저귀 가방을 다시 힘껏 들어 올렸다.
먼저 가고 있는 진희를 놓칠세라 곧바로 그 뒤를 따라갔다.
"워언~, 투우~, 뜨리~이, .....앤....드, 포오오~우...."
가파른 아파트 계단을 숫자를 세면서 토실토실한 짧은 다리로 한 발 한 발 띠어놓던 느리지만 열심히 올라가고 있는 그 앙징맞은 진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곤 아기 베개만 한 똥글똥글하고 자그마한 진희의 등뒤에 대고 혼잣말을 했다.
'맞아..., 진희는 저 나름대로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그저 조금 느린 것뿐인 건데, 그거뿐인데... 난 그런 진희를 잘 기다려주지 못했구나....'
"미안해 진희야, 엄마가 못 기다려줘서, 네 맘 알아주지 못해서, 엄마가 진짜 진짜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