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는 이제 거의 다 져 버린 꽃 이야기를 남기려 한다. 길거리 화단에 심겨 있던 '튤립' 얘기다. 일이 몰아친 정신없는 몇 주를 보낸 나를 멈추게 하던 그 꽃. 이 글은 고마움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튤립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생각해 보지도 않는 일이다. 화려한 것을 꺼리는 나는 흔히 사랑받는 장미보단 들판에 조용히 돋아난 봄의 들꽃에 눈이 간다. 그러니 평소 같으면 사람 손에 의해 화단에 줄지어 심긴 꽃을 보며 비용적 가치를 따졌을 게 분명했다. '얼마 없으면 시들고 말 것을 매 계절 바꿔 심으며 돈을 쓰는 모양이라니.' 온갖 화려한 색깔과 모양으로 나 좀 보라는 꽃 앞에서도 감상은 뒷전이 된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내가 변한 걸까, 내가 놓인 상황 때문이었을까. 도저히 풀 수 없는 매듭을 잡고 낑낑거리듯 지내던 일상에서 마주한 그 꽃은, 참 고왔다. 곱디고왔다.
밀린 일을 싸서 집으로 걸어가던 어느 하루, 나를 불러 세운 건 튤립이었다. '언제면 이 일을 다하나'라는 마음의 부담을 잠시 놓게 한 것도 그 꽃이었다. 피식 웃음이 났다. 노는 땅 없이 건물로 빽빽이 채워진 무채색 도시에 저리도 쨍한 색깔을 뽐내다니. 그 아주 빨갛고 노오란 꽃이 도시의 불빛이라도 된 듯 환하게 빛났다.
빤히 들여다보니 튤립은 화려하기만 한 꽃은 아니었다. 쉬이 그 속을 보이지 않았다. 꽃 봉오리를 다 터트려도 안으로 오므린 꽃잎이 수술을 감췄다. 일부러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지 않는 이상, 꽃이 다 지기 전까지 그 속을 알아챌 수 없다. 도도하면서도 단단하다. 튤립의 꽃말 중 하나가 '영원한 애정'이 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일까.
지난 몇 주간 숨가빴던 일상에 위로이자 위안이었다. 출퇴근길에 그 꽃에 눈을 맞추며 '그래도 삶은 아름답다'며 낙관할 수 있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진전 없는 업무에 숨이 턱 막혔지만 잠시라도 삶에 긍정하는 시간, 그런 계기가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다. 참 고마웠다.
꼭 튤립이 아니어도 꽃은 그런 존재인 것 같다. 살아있기에 언젠가 지고 만다는 이유로 그 필요를 낮볼 순 없다. 그 생명 자체가 주는 헤아릴 수 없는 메시지가 존재의 가치가 된다. 사람들이 나무와 꽃을 기르고 이를 서로 선물하고 사진으로 찍어 남기는 이유를 이제는 알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