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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닌 Mar 20. 2022

근데, 그 얘기 진짜 들은 거 맞아?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
너와 함께 읽는 그림책


아이가 책꽂이를 뒤적이더니 책 한 권을 들고 와 읽어달라더군요. 좋아하는 책만 수십 번을 반복해 읽는 첫째가 '새 책'을 가지고 오는 건 드문 일이라 바로 책장을 넘겼지요. 생각해 보니 올해 다섯 살인 아이가 세 살 때쯤 읽어준 적이 있는 책이었습니다. 일하는 곳이 신문사인지라 출판사가 새 책을 내면 보내오기도 하는데, 그 우편물 꾸러미 안에서 만난 그림책('근데 그 얘기 들었어?', 글·그림 밤코, 바둑이하우스, 2018년)이었죠. 책 소개 기사를 쓰면서 슬쩍 읽어봤더니 반복적인 얘기 안에 숨은 메시지가 인상 깊었어요. 그래서 아이에게 보여줄 겸 챙겼었지요. 한동안 책꽂이에 쉬고 있던 책을 오늘 아이와 다시 읽었습니다.  


이야기는 조금 기이하게 생긴 누군가가 두더지에게 인사를 하면서 시작됩니다. "안녕하세요! 두더지씨. 오늘 이사 왔어요!". 그 말에 두더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죠. 인사를 건넨 새로운 이웃이 두더지 눈에는 무척 희한하게 보였든요. '우리 동물 마을에, 동물도 아닌 것 같은 기이한 넌, 도대체 누구냐.' 굳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두더지는 곧바로 이 소식을 전합니다. 무당벌레한테 말이죠. "마을에 누군가 이사 왔는데 네모난 몸 둥근 얼굴에 뾰족한 뿔이 났어!" 그 얘기를 들은 무당벌레는 곧바로 어디론가 바삐 날아갑니다. 목적지는 바로, 동물들이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이었어요. 무당벌레는 곧장 다람쥐에게 이야기합니다. "마을에 누군가 이사 왔는데 네모난 몸 둥근 얼굴에 가시가 뾰족 뾰족 돋았대!" 


어? 어딘가 이상하죠. 처음 소문을 낸 두더지의 말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잖아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다람쥐는 곰에게, 곰은 돼지에게, 돼지는 코끼리에게, 코끼리는 개구리에게, 개구리는 두루미에게 '이상한 이웃'의 존재를 자신이 듣고 머릿속에 떠올린대로 이야기하죠. 근데 말이 여기저기 옮겨갈 때마다 '이상한 이웃'의 생김새는 더 괴이해집니다. 마지막엔 결국 공포스러운 괴물이 되고, 동물들은 그 무서운 이웃이 자신들을 몽땅 잡아먹을 거라고 걱정합니다. 그 괴물 이웃의 뱃속에 들어가 꺼이꺼이 우는 상상까지 하게 되죠. 


그런데, 그때 소문 속 이웃이 간절히 소리칩니다. 동물들이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요. 새로운 이웃은 자신들보다 덩치가 아주 작은 '개미'였어요. 등에 각설탕 상자와 기다란 막대 사탕을 짊어진 모습이 두더지 눈에 희한하게 비쳤던 거였지만, 알고 보니 그저 이삿짐을 나르던 개미였지요. 이상하지도, 무섭지도 않은 개미 말이에요. 동물들은 갑자기 미안해집니다. 멋쩍기도 하죠. 그리고 다시 속닥속닥 얘기를 하고, 두더지에게 진짜 이웃의 존재를 전하게 되죠. 마침내 이삿짐에 가려졌던 새 이웃, 개미의 모습을 제대로 알게 됩니다.   


전 이 그림책에서 '어른들의 세계'의 한 장면이 보이는 듯했습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회사든, 지인 사이에서든 자신에 대한 뜬소문과 맞닥뜨리게 되는데, 딱 그런 상황 같았거든요.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이나 행동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전해지고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심히 부풀려지는 그런 상황 말이죠. 그런 말이 돌고 돌아 뾰족한 화살이 돼 제 마음에 꽂혔던 일을 겪어 봤거든요. 말에 발이 달리는 순간, 그 말은 이미 제 것이 아닌 게 되니까요.  


그래서 말의 책임을 다시 한번 떠올렸어요. 제가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는 상황도 충분히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어느 조직에서든 사람들이 한 데 있다 보면 이런저런 말들이 나오고 그게 곧 기정사실이 되는 일이 많잖아요. 어떤 소문에 '아 진짜?'하면서 아무런 의심 없이 믿기도 하고요. 막상 내 일이 되면 마음을 꺼내 보일 수 없어 답답한 노릇인데, 당사자가 아닌 이상 우리는 너무나 무던하게 떠도는 이야기를 받아들이느라 바쁜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아이에게도 이 말을 해주고 싶었어요. 


"○○야, 살다 보면 수많은 말을 듣게 되는데 모두 담아두지는 마. 누군가 그냥 하는 말은 그냥 그렇게 넘기는 것도 필요해. 상처를 받을 필요도 전혀 없지.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다 맞는 것도, 잘 알고 하는 것도 아니니까. 반대로 네가 진짜로 보고 듣고 경험하지 않은 얘기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없어야겠지. 그렇지 않으면 말은 너무나 위험하고 무서워지거든." 쓰다 보니 저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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