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 여름은 듣기만 해도 설레는 단어들로 꽉 차 있다. 사이다 기포가 톡톡 터지던 시원한 수박 화채, 묽게 탄 달콤한 미숫가루, 해수욕장, 여름 저녁 노을, 생애 처음으로 읽었던 설레는 연애 소설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쓰레기가 나오는 것이 귀찮다는 이유로 수박을 먹지 않으며, 미숫가루는 텁텁해서 싫다. 바닷물에 내 몸을 담그는 것은 찝찝하기 짝이 없으며, 연애 소설이란 어린 여성의 주체성과 현명함이 깨어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어둠의 흑마술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그렇게까지 생각할 필요야...)
이쯤되면 세월이 나를 그렇게 만든건지, 내가 원래 그런 인간이었는데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내 어둠을 깨어나지 못하게 잠깐 틀어막고 있던 건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내 기억속 여름은 낭만적이고도 설레는 계절이었다.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으로 넘어가던 어느 여름밤 가족이 함께 우방랜드에 갔다. 어떤 놀이기구를 탔는지, 무얼 먹었는지 30년이 지난 지금은 아무 기억이 없다. 다만 그 여름밤 바람에 날리던 엄마의 잔꽃무늬 원피스와 아버지의 행복해 보이던 미소가 어렴풋이 기억난다. 여름밤의 달큰한 바람과 함께. 엄마와 아버지에게도 그렇게 젊은 시절이 있었다.
현실의 나는 여름을 싫어한다. 조금만 방심하면 찾아오는 초파리떼와 끈끈한 습기, 더위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싫은 것은 바로 더위다. 언제부터인가 더위를 참지 못하는 체질이 되어버렸다. 짧은 바지라도 입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가 다니는 직장은 복장에 매우 보수적이다. 요즘은 많이 개화(?)되었다지만 반바지를 입는데는 늘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다 이 바지를 발견했다. 정장 스타일의 핀턱 버뮤다 팬츠다. 앉아 있을 때는 마치 정장 바지를 입은 듯 눈속임을 할 수 있고, 서면 무릎 바로 위까지 와서 "엇 뭐야? 품위없이 직장에 반바지를 입고 와? 뭐 그런데 아주 짧은 바지는 아니니 그 정도면 나쁘진 않네."하고 직장상사의 인식체계에 극적인 전환을 일으킬 수 있다.
검정색 버뮤다 팬츠에 만족한 나는 베이지색 버뮤다 팬츠를 하나 더 사서 결국 두 개의 바지는 내 여름 교복이 되었다. 상의는 매일매일 달라지지만 하의는 늘 버뮤다 팬츠다. 세탁도 쉬워서 저녁때 세탁기에 돌리면 다음날 아침이면 입고 갈 수 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여, 빨지도 않고 여름 내 같은 바지만 입고 다닌다고 오해는 마시길!
내구성도 강해 아무데나 털썩털썩 주저 앉아도 올이 풀리거나 하는 일도 없다. 게다가 어떤 상의와도 잘 어울린다. 처음에는 직장에서 편하게 입으려고 샀지만 나중에는 여행이나 나들이를 갈 때도 입게 되었다.
이 바지를 입고 가장 최근에 간 여행은 작년 여름 경주 여행이었다. 아이들과 엄마와 함께 갔다. 여행을 가는 내내 아버지가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는 3년 전 고관절 수술을 하고 거동이 불편해서 집 안에서만 지냈다. 정말 필요한 일이 있을 때는 지팡이에 의지해 바깥 구경을 하기도 했지만 나들이를 하거나 여행을 하지는 못했다. 같이 가자고 말씀 드렸지만 아버지는 극구 사양했고, 나역시 무더위에 거동이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고 여행을 가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막상 도착해보니 숙소에서 휠체어 대여가 되었고, 워낙 더워서 숙소에서 에어컨만 시원하게 켜놓고 놀아도 충분히 기분 전환이 되었다. 굳이 식당을 찾아다닐 필요 없이, 포장이나 배달로도 끼니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내년에는 아버지를 꼭 모시고 와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에가 입에 붙은 내게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올해 여름날 아버지와 나는 영원한 이별을 했다. 내 생일 하루 전날 아침이었다. 딸의 생일을 피하려고 서둘러 가신 것 같아 더 마음이 아팠다. 칼로 얼음을 깨서 만들어주던 수박 화채도, 네비게이션도 없던 시절 물어 물어 찾아간 해수욕장도 모두 아버지와 함께 한 기억이다. 아버지는 내게 여름을 선물했지만, 나는 아버지에게 그 무엇도 선물하지 못했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 아버지는 집으로 보내 달라고 내게 애원했다. 간절히 쳐다보는 아버지의 눈동자에 대고 나는 중환자실에서 치료 잘 받고 집으로 돌아가자며 아버지를 타박했다. 아버지는 영원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내 여름은 그렇게 끝이 났다.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당신으로 인해 내 기억 속 여름이 그토록 아름다웠다고, 사랑한다고 꼭 한 번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