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핑빌리 열차와 단데농 국립공원
멜버른 근교 여행을 찾다가 단데농 산을 달리는 퍼핑빌리 증기기관차 투어를 발견했다. ‘토마스와 친구들’의 실제 모델인 퍼핑빌리는 1900년에 운행을 시작한 120살이 넘은 증기기관차이다. 개통 당시에는 지역 내 농업과 목공업을 위한 화물과 지역 주민들의 생필품을 운반목적용으로 개통되었는데, 현재는 관광 목적으로 운영 중이다. 마침 트래킹 하러 가보고 싶었던 단데농 국립공원 근처이기도 하여 단데농에 다녀왔다. 퍼핑빌리 투어도 페닌슐라 온천 여행처럼 국내 여행사를 통해서 데이트립으로 예약을 할 수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자유여행으로 다녀왔다. 여행사를 통하지 않은 이유는 일단, 퍼핑빌리 증기기관차의 출발역인 벨그레이브 역은 멜버른 시내에서 접근성이 나쁘지 않았고, 둘째로 나는 증기기관차를 직접 타고 싶지는 않았다. 증기기관차를 직접 타면 석탄가루를 온몸으로 맞아야 한다는 후기가 많았고, 직접 타는 것보다 출발하는 기차를 보고 싶은 욕구가 더 컸다. 마지막으로 단데농 국립공원 트래킹을 꼭 하고 싶었는데 여행사 투어에는 트래킹이 들어간 일정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짠 코스는 오전 10시 퍼핑빌리 증기기관차 구경 - 단데농 국립공원으로 이동하여 트래킹 - 단데농 산기슭에 위치한 사사프라스 마을에서 티타임이다. 여행사 투어와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내 니즈에 맞춘 스케줄이다.
퍼핑빌리 증기기관차는 하루에 4번 출발하는데, 가장 이른 시간은 10시 출발이다. 10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보고 싶어서 10보다 조금 더 일찍 벨그레이브 역에 도착했다. 벨그레이브 라인을 타면 되는데, 보통 플린더스 스트릿(Flinders Street Station)에서 많이 탄다. 나는 집 근처에 플래그스태프(Flagstaff) 역에서 벨그레이브 라인 기차가 있어 바로 탔다. 멜버른 시내에서 기차로 약 1시간 정도 걸리고, 요금은 왕복 10불 정도 들었다. 벨그레이브가 종점이라 기차 탑승 후 맘 놓고 자도 된다. 기차 요금은 마이키카드를 이용했는데 얼마가 필요할지 몰라서 역사에서 역무원에게 오늘 벨그레이브에 다녀올 계획이라고 했더니, 10불이면 된다며 10불을 충전해 주었다. 집에 오는 길에 혹시나 금액이 부족할까 걱정했는데, 정말 딱 맞게 썼다. 마지막 카드 잔액이 0원으로 찍혔다.
퍼핑빌리 출발역은 벨그레이브 역 바로 옆이다. 기차역에서 나오면 안내표지가 잘 되어 있어 표지판을 졸졸 쫓아가다 보면 퍼핑빌리 역을 만날 수 있다. 9시 40분쯤 도착했는데 이미 오늘 기차를 타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푸른 언덕에 쳐진 노란 울타리 옆으로 짙은 자주색 증기기관차는 곧 출발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풍경이었다. 나는 탑승을 하고 싶지는 않아 표를 미리 예매하지는 않았는데, 기차를 타보고 싶다면 꼭 온라인으로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기차 탑승은 거의 만석이었고, 현장에서는 티켓 구매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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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와 친구들의 모태라더니, 직접 보니 정말 동화 속에 들어온 것 같았다. 직접 연기를 뿜는 기차를 보고 있자니 해리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행 급행열차도 생각났다. 동화 같은 외관도 외관이지만, 소리가 정말 인상적이었다. 출발 전 몇 번의 경적음을 내더나 정말 칙칙폭폭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퍼핑빌리 증기기관차는 개통 이후 중단된 적이 있다. 1953년 산사태로 인해 기차선로가 붕괴되었는데, 자동차 보급과 함께 증기기관차 수요가 적어지고, 열차 노후 문제로 인해 한 때(1954년) 역이 폐쇄되었다. 주민들을 중심으로 퍼핑빌리를 보존하기 위한 ‘퍼핑빌리 보존협회’가 설립되었다. 보존협회의 활동과 자원봉사자들의 봉사로 산사태 당시 붕괴된 철로(벨그레이브-멘지스 크릭 사이)가 수리되어, 1962년 열차운행이 다시 재개되었다. 이후 지속적으로 노후되거나 손상된 역들을 보수하여 현재의 열차운행 코스가 완성되었다. 퍼핑빌리 열차 운영은 시민들의 자원봉사에 크게 의존한다. 퍼핑빌리 투어는 전 세계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지만, 기차 운영비가 많이 들어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이 없으면 사실상 운영이 어렵다고 한다. 자원봉사자들은 역 관리, 티켓 판매, 열차 유지보수, 신호원, 소방관, 기관 청소원, 선로 순찰원, 정원사 등 다양한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한다.
기차를 보내고 난 후 텅 빈 벨그레이브 역의 풍경을 몇 장 담아왔다. 기차도 기차지만, 잘 관리된 역사와 아기자기한 정원도 퍼핑빌리 풍경에 한몫을 한다. 한 무더기로 쌓여있던 석탄무덤이 인상적이었다. 동화 같았던 퍼핑빌리 기관차를 보내고, 트래킹을 위해 단데농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뚜벅이 여행자여서 역사를 나와 단데농 국립공원 근처에 내리는 693번 버스를 타러 갔다. 운이 좋게 버스가 금방 왔다. 시골인지라 버스노선도 많이 없고, 버스배차 간격도 굉장히 길기 때문에 버스를 한 번 놓치면 상당히 오래 기다려야 한다. 벨그레이브 역에서 목적지인 퍼니 크릭 애브뉴역(Ferny Creek Ave)까지는 버스로 약 7분이면 간다.
단데농 산맥 국립공원(Dandenong Ranges National Park)은 멜버른에서 인기 있는 트래킹 코스다. 단데농 산맥은 원시림으로 산책로를 걷다 보면 하늘 높이 우뚝 솟은 나무들과 사람보다 큰 고사리, 유칼립투스 군단을 만날 수 있다. 트래킹 하는 내내 은은하게 유칼립투스 향이 스쳐갈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더니 국립공원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트래킹 시작 전 천막이 있는 벤치에 앉아 산에서 먹으려고 싸 온 간식을 까먹으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지만..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우산을 쓰고 트래킹을 시작했다. 비 오는 평일 낮인데도 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은근히 있었다. 조깅하는 사람도 있었고, 가족단위로 산책을 나온 팀도 있었다. 관광보다는 시민들이 많이 애용하는 공원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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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데농 국립공원 트래킹 코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코스는 1,000 스텝 트래킹 코스로, 공식명칭은 코코다 스택 메모리얼 워크(Kokoda Track Memorial Walk)다. 사실 1,000 스텝 트래킹 길을 걸으러 왔는데, 입구 푯말을 보니 망설여졌다. 입구에 들어서니 라이어버드 트랙(Lyrebird track)과 코코다 메모리얼 트랙(1000 스텝 트랙)이 있었다. 길이는 둘 다 1.4km로 같고 가파르지만, 라이어버드는 길이 단단한 반편, 1,000 스텝 길은 좁고 미끄럽다고 되어 있었다. 부슬비도 내리고 초행길에 안전이 우선이라고 생각되 고민 끝에 라이어버드 길로 들어섰다.
비가 와 혹시나 미끄러질까 봐 조심조심 올라갔다. 사람만큼 키가 큰 고사리와 하늘 높이 우뚝 솟은 울창한 나무들이 빼곡했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단데농 산맥을 쥬라기 공원 온 것 같다고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40분쯤 오르막을 오르다 보니 종착지에 다다랐다(정말 오르막만 있다). 종착지는 1,000 스텝 길과 만나게 되어 있다. 비가 오는데도 1,000 스텝 길로 올라오는 사람들이 몇 명 보였다. 순간 하행은 1,000 스텝 트랙으로 갈까 했는데, 1,000 스텝 트랙은 one-way 트랙으로 올라가는 것만 되고 내려가는 건 안되고 하행길은 더 위험할 것 같아 바로 포기했다. 아주 여유 있게 올라갔다 내려오면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것 같다. 평일이기도 했고, 비가 와서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아 고요한 트래킹을 즐길 수 있었다. 새소리도 많이 들리고, 비가 와서 풀내음도 더 진하게 느껴졌다.
산행 후, 버스를 타고 사사프라스(Sassafras) 마을로 가려했는데, 버스가 오려면 20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차로 10분이면 가는 길을 20분 기다려 20분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우버를 불렀다. 우버를 부를 때목적지 핀을 잘못 찍어 단데농 산 드라이브를 한 후 사사프라스 마을에 도착했다. 사사프라스 마을에 관광객에서 유명한 미스 메이플스 티룸이 있는데, 네비에 이 티룸을 찍고 가면 마을에 바로 도착한다. 우버까지 불러 간 마을이었는데 적잖이 실망했다.. 국내 여행사 투어에서 단데농 산맥에 위치한 작고 예쁜 마을이라고 꼭 들려한대서 들려봤는데.. ㅎㅎ 나는 그냥 그랬다. 정말 꼭 들려야 하는지 의문이다. 그냥 정말 산기슭에 위치한 단독주택과 카페가 몇 개 있는 작은 마을이다. 아마 산속에 마땅히 커피 한잔 마실 곳이 없어 식사나 간식타임을 위해 들리는 동네가 아닐까 싶다. 이 한적하고 조용한 마을 속에서 미스 메이플스 티룸만 수많은 관광객으로 북적이고 있었다. 차보다는 커피러버고, 관광객으로 가득 찬 가게에 왠지 가기 싫어서 옆옆에 있는 커피집에 갔다. 조용하고 좋았다. 마을에서 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근처에서 가까운 역으로 가서 다시 멜버른 시티로 가는 벨그레이브 라인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니 저녁이 다 됐다. 은근히 고된 여정이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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