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울푸드
오랜만에 속초에 다녀왔다. 최근에는 논문 쓰느라 체력도 마음의 여유도 바닥이었고, 매일 학교-집-(가끔 수영장)만 오가는 일상이었다. 금요일까지 원고를 보내달라는 교수님의 말씀대로 제출을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속초로 떠났다. 찜통 같은 무더위 속에 학교는 방학이라고 에어컨을 제대로 틀어주지 않아 몇 주 동안 더위와 사투를 벌였는데, 속초에 도착해 냉장고 바람을 맞으니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번 달 들어 처음으로 에어컨 없이 꿀잠을 잤다. 속초에 머문 1박 2일 동안 불어온 동풍 덕분에 꿀맛 같은 휴식을 취했다.
속초에 도착하자마자 간 곳은 역시 소방울이었다. 나에겐 속초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식당이다. 사장님이 손질해 주시는 홍게와 가자미조림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르겠다. 사실 지난봄에 yh고향에 내려가는 길에 사장님 따님과 사위분이 하시는 화성의 어향소방울에서 문어볶음과 가자미조림을 먹었다. 재료도 속초에서 전부 생물로 받아쓰신다고 한다. 속초 소방울의 맛이었는데, 이상하게 사장님 손맛이 더 그리워졌다...ㅋㅋ 그렇게 여름이 다 되어서야 소방울에 왔다.
이날은 홍게로 시작해서 문어볶음밥으로 마무리했다. 홍게를 주문했는데, 사장님이 운이 아주 좋다고 하셨다. 내일부터는 당분간 홍게를 못 먹는다고 하셨다. 근데 그래서인가 가을, 겨울에 먹던 홍게보다는 좀 살이 덜 오동통한 느낌이었다(물론 그래도 맛있었다). 소방울의 장점은 한입에 쏙 먹기 좋게 사장님이 게를 다 손질해 주신다는 점이다. 게딱지에 비벼주신 밥까지 싹싹 긁어 먹고, 소방울의 시그니처인 가자미조림을 시켰다.
이 집은 나에게 생선조림의 맛을 알려준 곳이다. 나는 조림보다는 구이판데, 소방울의 가자미조림을 먹고 나서 생선조림의 세계에 눈을 떴다. 이날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맛이었다. 그런데 왜인지.. 배가 덜 찬 기분이 들어 문어볶음을 시켰다. 제육과 문어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다가, 역시 생물 전문점이니 문어로 선택했다. 맵찔이라 덜 맵게 조리를 부탁드렸는데도 조금 매웠다(그래도 맛있다).
천천히 식탁을 비워가는데, 사장님이 밥을 볶겠냐고 훅 들어오셨다. 아주 잠시 3초 정도 망설이다가 밥을 볶았는데, 안 볶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사장님이 남은 문어볶음에 밥 한 공기를 턱 올리시더니 집에서 농사지어 짜셨다는 들기름을 정말 아낌없이 듬뿍 넣고 비벼주셨다. 이게 정말 신기했던 게 들기름 때문인지 매운 내가 싹 잡히고 달달하고 고소한 맛이 엄청났다. 정말 완벽한 마무리였다. 이날 금주를 한 게 아쉬웠을 뿐..ㅎㅎ 문어볶음을 먹다 보니 제육에 대한 상상과 기대가 엄청나게 커졌다. 다음 방문엔 무조건 제육이다..!
속초의 냉장고 바람을 에어컨 삼아 오랜만에 알람 없이 꿀잠을 잤다. 체크인 직전에 일어나 부랴부랴 짐을 챙겨 나왔다. 그리고 달려간 곳은 천오식당. 올봄에 우연히 알게 된 곳인데, 꽤 오랫동안 휴업을 하셔서 재오픈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곳이다. 정갈하게 담긴 수육 위에 꽃봉오리처럼 올려진 간재미 무침 사진이 날 너무 애타게 했다. 그리고 드디어 방문한 날. 먹어보고 싶은 메뉴가 많았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수육 한 접시와 냉면 곱빼기를 시켰다. 메뉴를 주문하고 나니 손님들이 꽤 몰리기 시작했는데, 다들 냉면을 시켰다. 메뉴명도 없이 보통 하나, 곱빼기 둘 이런 식으로 주문하는 거 보니 이 집의 시그니처는 냉면인가 보다.
수육이 먼저 나왔는데, 직접 마주하니 사진에서 보이지 않던 디테일이 더해져 감동이 더했다. 간재미 무침 아래에는 얇게 채 썬 오이와 배가 깔려 있었다. 수육을 오이, 배, 간재미 무침을 싸 먹으면 꿀맛이다. 살짝 고기 냄새가 났는데, 나는 고기 냄새와 생선 냄새에 꽤 관대한 편이라 거슬리지 않았다. 수육을 먹다 보니 이 집의 갈비탕과 육개장이 엄청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겨울 속초가 기대된다.
수육을 맛있게 먹다 보니 냉면이 나왔다. 냉면은 주문진 회 막국수 느낌인데, 면은 기계식 냉면 면발과 비슷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냉면은 내 스타일은 아니다. 면발도 좀 찰지고, 소스랑 면이 한 끗 차이로 따로 노는 맛이었다. 그런데 이 냉면을 수육과 같이 먹으면 또 잘 어울린다는 거..!ㅋㅋ 나에게 이 집의 킥은 수육이다. 하나 아쉬운 점은 고기가 다 수입산이다. 가격을 조금 올리더라도 한우를 쓰신다면 어떨지 상상해 본다. 한우로 이 수육을 만드신다면 정말 환상의 맛이 날 것 같다..ㅋㅋ
마지막 피날레는 나의 또 다른 소울식당 먹거리마을로 장식했다. 이곳은 선장님이 운영하시는 가자미 세꼬시 전문점이다. 기본 찬은 늘 나오는 두부와 감자조림. 이날은 호박나물이 같이 나왔다. 이 집 감자조림이 조금 달달한데 굉장히 내 스타일이다.
먹거리 마을에 오면 세꼬시는 무조건 먹어야 한다. 세꼬시는 잘못 썰면 뼈가 억세고 질긴데, 세꼬시를 정말 맛있게 썰어주신다. 그리고 이 집의 비밀은 바로 이 세꼬시 양념장이다. 특제 양념장에 와사비, 마늘, 청양고추, 참기름, 초고추장을 섞으면 세꼬시 양념장이 완성된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가자미 튀김. 기름이 바싹 튀겨내서 그런지 뼈까지 그냥 씹어먹어도 되는데, 정말 고소하다.
마지막 식사로 뭘 먹을지 고민하다가 물망치 매운탕을 시켰다. 선장님이 그날그날 잡아 오신 생선목록을 식당 안 계산대 쪽 작은 화이트보드에 적어두시는데, 이날 물망치 매운탕이 적혀 있었다. 지난번 방문 때는 임연수 구이가 적혀 있길래 시켰었는데 정말 세상 고소하고 기름진 임연수 구이를 맛봤다. 이곳은 진짜 생선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어쨌든 이날 먹은 물망치 매운탕으로 돌아와서, 물망치는 처음 먹어보는 생선인데 아귀와 물곰 그사이 같은 맛이었다. 속살은 엄청 부드러운데 껍질은 아귀처럼 쫀득쫀득한 식감이다. 물곰 특유의 (콧물 같은..ㅋㅋ) 식감이 많지는 않았다. 맛있었는데, 뼈가 너무 많아서 먹는데 상당한 에너지가 들어갔다. 이렇게 큰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면 다음에는 포기해야 할 것 같다.. 다음 선장님의 어항을 또 기대해 본다.
이튿날 오후, 저녁식사 전 고성 바다에서 시간을 보냈다. 해는 쨍쨍하게 내리쬐는데 동풍이 불어 바람이 정말 시원했다. 공기도 뽀송뽀송하니, 마치 지중해의 여름 같은 날씨였다. 고성의 바다에서 즐거웠던 시간을 공유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