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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Dec 11. 2022

 언어, 다시 짓는 언어의 집 (상)

다시 짓는 언어의 집

오늘은 아빠의 지난날을 반추해보려 한다. 오늘은 편지가 아니고 회고의 형식으로 적어 본다.


약관의 시절, 난 내 운명을 사랑하지 않았다. 뭐 하나 내세울 게 없었던 나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미워하는 사람을 모른 척하듯이 나도 나의 삶을 못 본 척했었고 그렇게 나의 과거는 나의 역사가 되지 못했다. 한동안 팔자 탓을 했다. 형편이 넉넉지 못한 가정 탓을 했고 맨날 싸우기만 하는 부모를 원망했다. 학창 시절 2등에서 48등으로 떨어진 나의 성적도 주변의 열악한 환경들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허무주의자로 지냈다. 인생을 수리하며 살기는커녕 매일 지구의 종말을 고대했다.


지구의 종말이 오지 않은 덕분에 어느덧 중년이 되었고 인생의 절반을 넘었다 생각하니 자연스레 가끔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게 된다. 세상을 저주하던 그 시절에는 내가 중년이 될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지구의 종말이 오지 않는다면 난 스스로 내게 주어진 운명의 돌을 내려놓으려 했다. "난 미련한 시지프스가 아니야!"라고 외치면서. 하지만 지금은 결혼도 했고 예쁜 딸도 키우며 풍족하지는 않지만 단란한 가정을 꾸려 살고 있다. 냉소적인 종말론자가 운명의 돌을 계속 열심히 나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책을 많이 읽은 편은 아니지만 가끔 감동적인 책을 읽고 나면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을 느낄 때가 있었다. 바람이 나를 뚫고 지나가듯 어떤 기운이 내 몸속으로 쑤욱 들어와 가슴에 모닥불을 피우고 내 머릿속에 각인을 남겼다. 이런 느낌이 감동인가? 감동이 나의 마음과 뇌에 상처를 입혔고, 그 상처가 아문 뒤에 나온 새 살은 세상을 다르게 보게 하였다. 어제와 다른 내가 된 듯 느꼈다. 한 번의 독서는 내 정신의 주춧돌이 되었고 두 번의 독서는 기둥이 되었다. 그렇게 나의 언어의 집이 지어지면서 세상이 흑백만 있는 게 아님을 알게 되었다.

 

언어의 벽돌이 쌓아지면서 입에서 나오는 말도 이전과 달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의 키는 이전의 높이를 찢으며 자라났다. 말과 생각이 조금씩 바뀌면서 나의 행동들도 바뀌었고 그러면서 내 삶도 조금씩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니 그나마 조금이라도 읽었던 책들이 나를 더 이상의 나락으로 떨어뜨리지 않도록 해주었다. (소소했지만) 독서의 확장이 나의 생각의 확장으로 이어졌고 그 생각의 확장이 나의 인생을 조금씩 바꾸었다. 강물이 증발되어 비가 되고 대지를 적시듯 읽음이 생각을 바꾸고 생각이 말과 행동을 변화시킴으로써 사막 같은 내 인생에 조금씩 단비가 내려지고 있었던 것이었다. 읽음은 조금씩 흐르고 모여 내 정신의 강이 되었다.

 

약관의 시절의 나의 말들은 대체로 저급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는데 난 그동안 잡초 씨만 뿌린 셈이었다. 잡초 씨만 뿌려 놓고 열심히 노력해도 탐스런 과실이 열리지 않는다고, 그래서 이 세상은 부조리하니 종말이 와도 된다고 스스로 곡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제 내 삶에 변화를 준(비록 미약하지만) 언어의 확장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어느 한 종말론자가 어떻게 글 탑 쌓는 사람이 되었는지의 부끄러운 과거를 들추어 내보려 한다. 내 인생의 그 비극적인 사건(?)이 나를 책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나를 처음 책을 집어 들게 만든 것은 뜻밖에도 실연의 경험이었다.

 

이십 대 초반 어느 날,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 어느 모임에 참석했다가 그녀의 자전거가, 아니 그녀가 통째로 내 마음에 들어왔다. 그녀가 내 마음에서 장기 투숙을 하게 되자 몇 날 며칠을 고민하였고 드디어 용기를 내어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 그녀가 예상외로(?) 거절하지 않아 몇 번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만남이 계속 이어지자 그녀도 나에게 관심이 있을 거라는 착각에 빠졌다. 그래서 다시 용기를 내어 사귀자고 고백했다가 (이번에는) 예상대로 거절당했다. 그날 집에 가면서 혼자서 엄청 울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알아서 길을 비켜주었다. 그리고 죄 없는 소주병에게 이 세상의 부조리와 지구가 종말 해야 하는 백 가지 이유를 설명하다 잠이 들었다. 현실에서 꿈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섰을 때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항상 그랬듯이 나의 소망은 무시되었고 잠에서 깼을 때 내일의 태양은 벌써 오늘의 중천을 지나 지구는 여전히 실존하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약간의 심적 안정을 되찾은 후 내가 차인 원인을 분석하고 싶었다. ‘돈이 없어서 그런가?’ ‘학력이 변변치 않아서 그런가?’ ‘생긴 게 그저 그래서 그런가?’ ‘아마도 복합적인 문제겠지?’ 별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갑자기 스피노자처럼 내일 지구가 멸망을 하더라도 연애도 못하는 나의 현실에 대한 분석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장고 끝에 찾은 곳이 ‘서점’이었다.

 

서점에 “네가 차인 원인과 해결방법”이라는 책이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해답의 실마리를 서점이 제공해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때 교X문고에서 두 시간 정도 고르고 고른 책이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였다. 목적과 결과가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내가 여자에게 퇴짜 맞은 원인을 해결해 주는 책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나의 첫 책이 되었다. 세계사에 영향을 미치는 알 수 없는 기운이 내 연애사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그 책에서는 드레프스 사건, 팔레스타인 문제, 베트남 전쟁 등등 그 당시 평소에 접해보지 못한 현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와 작가의 해석이 담겨 있는 책이었다. 역사적 사건이 그저 우연히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관계들이 얽히고 오래 작용하다 어느 날 ‘역사적 사건’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내가 그녀에게 퇴짜 맞은 그 사건도 내가 태어나고 그녀가 태어난 시점부터 (아니 그보다 오래전부터) 누적되어 온 내가 알지 못하는 관계의 작용과 반작용에 거쳐 나에게 비극적 사건으로 발현된 것이었던가?

 

나의 첫 책은 재미있었지만 그때 바로 독서가 나의 습관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저 계절이 바뀔 때 한 번쯤 서점에 들러서 한 권 정도 읽는 수준이었다. 연애 실패라는 인생의 커다란 시련이 나의 독서 생활에 동기가 되어 주었다. 이렇게나마 20대 초반에 나의 소소한 독서 생활은 미약하게나마 시작되었다. 내 정신의 주춧돌은 실연의 상처와 함께 놓이게 되었다.

  

그러다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이립의 시절 그저 직립만 하고 어느 날, 십 년 전 나에게 매정하게 퇴짜를 놓았던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이건 운명의 장난인가 아니면 악의적인 계획인가. 장난이든 계획이든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자 만감이 교차하였다. 재회의 기쁨도 있었지만 그간 달라진 게 별로 없는 내 모습이 많이 부끄러웠고 실망스러웠다. 십 년이면 강산이 한 번 변한다고 하는데 난 변한 건 그저 나이밖에 없었다. 그동안 나는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뜬금없는 성찰을 하게 되었다. 마치 그동안 사막만 걸은 느낌이었다. 나에게 비극적 사건을 안긴 세상에게 복수하고자 꼭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던 것 같았는데. 나는 여전히 돈도 없었고, 미천한 학력을 상쇄할 만큼 사회적 성과를 얻지도 못했고 물론 나의 그저 그런 얼굴은 탄력마저 상실하고 있었다.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나를 퇴짜 놓은 그녀에게 멋진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 시크한 멘트를 날리고 싶었는데 그때의 나의 모습은 지질한 시트콤에 더 가까웠다. (개인적이지만) 역사적 사건을 사회적 성취로 연결하지 못한 원인을 알고자 아직 계절이 바뀌지 않았음에도 다시 서점을 찾았다.


그때 또 두 시간 동안 고르고 고른 책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였다. 나의 유전자를 그녀와 공유하고 싶은 욕망에 이끌려 이 책을 고르게 되었을까? 아무튼 이 책도 나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기계이다”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의 뇌에 물파스를 바른 듯한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읽을 때 느꼈던 세계사의 영향을 주는 그 알 수 없는 기운의 근원이 바로 이 유전자란 말인가? 그 작은 원인의 시작이 이 유전자들 일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에게 세상을 좀 더 구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해 주었다. 이 책을 덮었을 때 나의 깊은 어딘가에서 나의 유전자의 메아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번 기회를 절대 놓치면 안 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녀와 결혼하란 말이야~~~”

 

난 유전자의 명령을 충실히 받들어 그녀와의 재회가 다시 비극으로 끝나기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고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끝내 그녀와 결혼하게 되었다. (이미 알고 있었겠지만 그녀가 지금의 너의 엄마다) 서로의 유전자가 공유된 예쁜 딸도 갖게 되었다. (엄마를 닳았으면 더 예뻤을 텐데) 그리고 더 이상 지구의 종말을 고대하지 않았다.


내 딸이 태어나고 며칠 후 딸의 눈과 처음 마주쳤을 때 그 순간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내가 아님을 깨달았다. 다마스쿠스로 가던 바울이 하늘의 빛을 마주하고 계시를 받고 변화된 것처럼. 내 딸의 눈을 마주친 그 순간 난 그저 이 순간을 위해 예비되어 있었던 존재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지난날의 모든 순간들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존재해야 했던 필연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후회로 가득했던 과거들은 지금을 위해 모두 없어서는 안 될 필요조건들이었다. 나의 그녀, 혹은 내 딸의 모친을 왜 그리 돌고 돌아 만나게 되었고 결혼하게 되었는지를 내 딸의 눈이 나에게 모두 설명해 주고 있었다. 과거의 어느 한순간이라도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아니 되었더라면 이 순간은 결코 오지 않았으리라. 만약 메피스토펠리스가 나타나 내가 원하는 시점으로 돌아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해 준다고 하더라도 정중히 사양할 것이다. 내 딸의 눈이 그동안 원망스러웠던 나의 과거를 사랑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의 과거는 이렇게 나의 딸의 눈을 통해 설명이 되었고, 내 운명을 용서하고 화해하고 이제는 다시 미워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돈은 없어도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고 싶었다. 재산은 물려주지 못해도 삶의 지혜는 물려주고 싶었다. 내 딸이 어느 날 갑자기 “아빠, 인생이란 무엇일까요?”라고 물었을 때, 외국인을 만난 영포자 같은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아빠는 인생이란 B와 D사이에 있는 C라고 생각해” (사실은 사르트르의 말이다) 이렇게 교양 있고 지적인 아빠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지식과 지혜를 얻기 위해 책을 더 많이 읽기 위해 노력했다. ‘딸에게 보내는 교양 편지’를 쓰는 이유도 이런 나의 마음을 기록하는 것이다. 내 딸이 인생이라는 항해에서 길을 잃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미리 좌표를 남겨주고 싶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나의 육신은 사라져도 내 딸과 대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글이란 걸 써보니 내 언어의 집이 매우 부실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다시 언어의 집을 짓는다. 예전에는 오두막을 지었다면 이제는 다시 허물고 튼튼하고 멋진 집으로 다시 지으려 한다. 그래서 독서를 좀 더 체계적으로 하려고 한다. 읽은 것을 메모하고 좋은 문장은 반복해서 필사했다. 좋은 책은 내 머리에 각인이 되도록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예전에는 시간이 날 때 읽었다면 지금은 시간을 내서라도 읽는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그렇게 울었듯이,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삶의 폭풍 속에서 그렇게 읽고 써나갔다. 


부끄럽지만 아빠의 지난 세월을 반추해 보았어. 넓은 언어의 집은 보다 넓은 세계를 보여주고, 높은 언어의 집은 보다 멀리 있는 미래를 보여주며, 튼튼한 언어의 집은 세상의 해상도를 높여준단다. 높은 곳은 멀리 볼 수도 있지만 그만큼 에너지가 생기기도 하지. (물리학 시간에 배우는 위치에너지이다) 네가 쌓은 언어의 높이는 그만큼의 네 정신의 에너지가 된단다. 언어의 집은 네가 힘들 때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될 수도 있어. 세상으로부터 상처받았을 때 네가 적립해 둔 언어들이 면역세포가 되어 너의 상처를 치료해 줄 것이야.


다음 편지에서 언어와 인생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 볼게. 아빠는 오늘도 열심히 언어의 집을 짓는다. 멋지고 튼튼하게 완성하여 너에게 물려주고 싶구나. 내 딸이 이 집에서 편안히 멋진 세상 풍경을 감상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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