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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국현 Nov 27. 2022

 인생길에서 넘어졌을 때, 니체가 필요할 때 (하)

“네 운명을 사랑하라. 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 나는 추한 것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련다. 나는 비난하지 않으련다. 나는 비난하는 자도 비난하지 않으련다. 눈길을 돌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부정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언젠가 긍정하는 자가 될 것이다.” <즐거운 학문>


“네 운명을 사랑하라.” 당연한 말 같지만 현재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생은 반품이나 교환이 되지 않는다. ‘무엇이 주어졌는가’보다 ‘주어진 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지. 인생은 반품 및 교환이 불가능하지만 수리는 가능하다. 불안은 인생의 수리를 가능하게 해 주지만 불만은 수리할 기회마저 놓치게 만들 뿐이지. 미국에 이런 속담이 있다고 한다. “운명이 레몬을 주거든 너는 그것으로 레모네이드 만들어라.” 우리는 레몬을 바꿀 수는 없지만 대신 그걸로 레모네이드로 만들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어. 


운명은 주사위에 비유할 수 있다. 주사위 숫자가 1이 나올지 6이 나올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 오로지 확률만 존재할 뿐이야. 누군가는 6이 숫자가 많아서 좋다고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1이 첫째이기 때문에 1이 좋다고 할 수 있다. 주사위 던지기는 우연이지만 그 우연을 의미 있는 필연으로 만드는 것은 나의 해석에 달려 있어. 카이사르 말대로 우리 인생의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우리는 그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우연의 인생을 살 것인가? 필연의 인생을 살 것인가?


나의 운명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선 선결해야 할 과제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 수용’이야. 자기 수용이란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지.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타인과의 비교와 인정 욕구를 버려야 해. 타인에 대한 인정 욕구는 본능이야. 그 이유는 ‘주체성’ 편에 이미 설명했으니 여기에서는 생략할게.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볼 수 없어. 그래서 타인이라는 거울을 비추어 나를 보게 되지. 타인이라는 거울은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보다 타인의 생각으로 인해 왜곡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타인의 시선, 생각 등을 걸러내야 진정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단다. 나의 모든 번뇌는 왜곡된 거울에 비친 왜곡된 해석이야. 타인에 의한 착시 현상일 뿐이지.


비교할 대상이 사라지면 나의 고뇌도 사라진다. 무인도에 혼자 산다면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고뇌들이 부질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비교할 타인이 없기 때문이야. 영화 <캐스트어웨이>의 주인공 척 놀랜드는 조난을 당해 무인도에 고립된다. 주인공은 그저 생존에만 열중할 뿐이지 남보다 키가 작다고, 얼굴이 못생겼다고, 돈이 없다는 고민 때문에 고통받지는 않는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은 너의 인생을 살라는 말이야. 타인의 인정을 바라고 타인의 평가에만 귀 기울인다면 결국은 타인의 인생을 사는 셈이지. 타인의 거울을 깨부수고 진정한 나의 인생을 살아야 해.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어제와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라. 나와의 비교는 성찰과 성숙을 낳지만 타인과의 비교는 불행만 낳을 뿐이야.

 

타인의 거울을 깨뜨리고 주체적으로 나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려고 해도 고통과 시련이 계속된다면 그런 나의 운명을 사랑하기가 어렵다. 여기서 잠시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태계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 Viktor Frankl의 삶을 이야기해 볼게.


빅터 프랭클은 2차 세계대전 말기에 부모님과 아내, 동생들과 함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됐다가 1945년 종전이 되면서 수용소에서 해방되었다. 여동생을 제외한 모든 가족들은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는 그 당시의 수용소 생활을 아주 담담하고 사실적으로 수용소 생활에서의 겪었던 고통과 그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들을 책으로 엮었는데 그 책의 제목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이다.

 

빅터 프랭클은 1944년 10월 19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간다. 수용소에 열차가 도착하면 사람들을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과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곧바로 가스실로 끌려가 죽음을 맞게 된다. 그리고 그나마 노동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는 나머지 사람들은 짐승처럼 온몸이 벗겨진 채 머리카락과 털이 깎이고 이름이 아닌 수감 번호로 불리며 나치 감시자들의 폭력에 시달리게 된다. 그리고 발 하나 뻗기도 힘든 비좁은 가축우리 같은 수용소에서 추위와 굶주림과 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음식은 하루 한 번 배급되는 빵과 묽은 수프가 전부였다.


정신 의학 용어로 ‘집행유예 망상’이라는 용어가 있는데 이는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자신은 사형 직전에 집행유예를 받아 풀려날 거라고 믿는 것처럼 암담한 상황에서도 계속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리는 정신 상태를 말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수감자들은 처음에는 이런 집행유예 망상으로 인해 수용소 생활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을 거고 금세 끝날 거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는다. 하지만 그들은 곧 자신들이 폭력과 죽음이 난무하고 끝을 알 수 없는 처참한 상황에 놓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더 지나면 사람들은 어떤 참담한 모습을 보아도 동정이나 공포심을 느끼지 않는 무감각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프랭클 박사도 불과 두 시간 전에 자신과 얘기를 나누던 동료 수감자의 끔찍한 시체를 보고도 태연히 수프를 먹을 수 있게 되고 맨발로 눈길을 걸어야 하는 동료가 고통스럽게 우는데도 아껴둔 빵을 게걸스럽게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동료 수감자들보다 건강하게 보여서 가스실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매일 깨진 유리로 면도를 했다고 한다.

 

프랭클 박사는 인간은 어떤 열악한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수감자들은 인간이 도저히 살 수 없을 듯한 가축우리 같은 수용소에서도 코를 골며 자게 되고 극심한 영양실조에 시달리면서도 하루 종일 노역을 해야 하는 생활에 적응하게 된다. 그리고 저녁에는 카포(수감자를 관리하는 유대인 수감자)들의 눈을 피해 시낭송과 노래를 하는 등의 예술 활동을 하기도 하고 기도를 하는 종교 모임을 만들기도 한다. 


프랭클 박사는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해야 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들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요인이 뭔지 관찰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첫째로 그는 인간은 고통을 가져다주는 외부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그 고통에 맞서는 자신의 태도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수용소 안에는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굴고 같은 유태인이면서도 나치의 앞잡이가 되어 다른 수감자를 가스실로 보내는 사악한 사람들도 있는 반면에 자신이 배급받은 빵을 나눠주면서까지 자신보다 고통에 처한 동료를 돕는 고귀한 사람들도 있었다. 똑같은 인간 이하의 환경을 겪으면서도 인간답기를 포기하지 않기로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살아있는 인간 실험실이었던 강제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에 달려 있다.” 그리고 프랭클 박사는 모든 시련 속에는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이 숨어 있다고 말한다. "이 시련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이 시련을 통해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프랭클 박사는 삶이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를 통해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운명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했어. 니체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고 말했다. “인간은 아우슈비츠라는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기도 하고, 의연하게 가스실에 들어가며 주기도문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와 같이 어떤 모습으로 삶의 시련에 어떻게 응답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고 그 선택을 통해 자신만의 운명을 만들어 가야 하는 삶의 과제를 짊어지고 있지.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줄지를 기대하지 말고 우리가 삶의 과제들을 어떻게 선택하며 풀어 나갈지 고민해야 한다는 메시지는 빅터 프랭클 박사가 인류 최대의 비극을 몸소 겪으며 발견한 주옥같은 가르침이라 할 수 있어. 이 책에는 인간의 삶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삶의 희망과 의미가 있음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아우슈비츠에서의 죽음의 문턱에서 통찰을 얻은 빅터 프랭클 박사는 해방 후 실존적 심리치료 기법인 로고테라피를 창시했어. 로고테라피는 삶의 가치를 깨닫고 목표를 설정하도록 하는 것에 목적을 둔 심리치료 기법이야. 로고테라피는 삶의 목적을 중시하며, 자기의 인생에 긍정적이고 가치 있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핵심으로 여기지. 의미 치료는 ‘인간이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의지’에 초점을 두는 이론이야. 의미 치료는 내 삶의 의미를 찾음으로써 고통을 이겨내고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는 법을 알 수 있도록 안내한다. 일상 속에서 스스로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는 치료법이라고 할 수 있지. ‘왜 살아야 하는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적극적으로 찾아 나설 때 ‘의미’는 비로소 발견될 수 있어.


사람들은 대체로 확률이 낮게 발생하는 것에 대해 높은 가치를 매기는 경향이 있어. 나의 삶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삶이 평균적이거나 그보다 낮은 확률의 삶이기 때문일 것이야. 뛰어난 외모에 부잣집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그것이 매우 적은 확률로 발생되는 경우이기 때문이지. <김상욱의 과학공부>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우주는 텅 비어있다. 지구가 모래 알갱이만 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태양은 오렌지 크기가 되고, 지구는 태양에서 6미터 거리에 위치한다. 오렌지 크기의 태양이 부산역 광장 분수대에 놓여 있다고 한다면 태양계의 마지막 행성인 해왕성은 부산역 플랫폼에 위치한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첫 번째 별인 알파 센타우리에 도착하려면 일본 홋카이도 북쪽 끝까지 가야 한다. 결국 부산역을 중심으로 반경 1,600킬로미터 이내에 오렌지 한 개랑 모래 알갱이 몇 개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따라서 주변에 무언가 물질이라 부를 만한 것을 발견한다면 그 자체로 기뻐해야 한다.  생명체는 지구에서만 발견되는 아주 특별한 물질이다. 내 주위에 생명체가 있다면 이것은 놀라워해야 할 일이다. 더구나 그 수많은 생명체 가운데 나와 같은 종을 만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다른 인간을 사랑해야만 하는 우주론적 이유이다.” 


위의 설명처럼 이 순간 이런 모습으로 이 지구 위에서 살아가는 것은 확률로 따지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매우 매우 적은 확률이야. 매우 매우 적은 확률을 우리는 ‘기적’이라 부르지. 지구는 기적이 몰려 있는 곳이다. 늘 기적이 넘쳐흘러 인간은 그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한다. 기적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들은 삶의 경이로움보다 은행 계좌의 숫자에 더 집착한다. 은행 계좌의 숫자 때문에 서로 싸우는 것은 인간이 개미를 볼 때 개미들이 누구 더듬이가 가장 아름다운가를 두고 싸우고 것과 다르지 않다.

 

프랑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 Homo Viator 즉 여행하는 인간이라고 정의했어. 여행을 기다리는 사람은 하루하루가 설렌다. 여행을 준비하고 기다리면서 이번 여행에는 매우 즐겁게 보내겠다고 다짐한다. 임무를 꼭 완수하겠다는 에단 헌트(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주인공)처럼 매우 결연하다. 138억 년을 기다린 여행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을 기다렸으니 여행이 시작한 순간부터 여행이 끝날 때까지의 모든 순간이 매우 소중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창문 사이로 비치는 햇살, 떨어지는 나뭇잎, 이슬을 머금은 채 피어난 꽃봉오리, 향기로운 커피 향, 미뢰를 자극하는 각종 음식의 맛들 그리고 기적 같은 확률을 뚫고 내 옆에 존재하는 사랑하는 가족. 모든 인간들이 매 순간 이런 경이로움에 감사하며 살고 있을까? 우리는 지금 138억 년 동안 우주의 먼지들이 수많은 우연 끝에 만들어진 세상을 여행을 하고 있다. 그깟 더듬이 때문에 서로 싸우고 미워할 시간도 부족하다.


셰익스피어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해. “배우로서 중요한 것은 어떤 역을 맡느냐가 아니고 얼마나 훌륭한 명연기로 관객을 감동시키느냐에 있다.” 인생의 배역은 베일에 가려진 제비 뽑기와도 같아서 내가 어떤 역할을 맡을지 알 수 없어. 하지만 배역이 정해지면 맡은 배역에 충실하게 완수해야 해. 왜냐하면 주어진 배역은 교환도 안되고 (영원회귀 법칙에 따라) 영원히 반복되기 때문이야. 우리는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 있는 배우이다. 무슨 배역을 맡느냐가 아니고 얼마나 훌륭한 명연기로 청중을 감동시키느냐가 더 중요하지.


인생이란 넷플릭스에는 주인공이 따로 없어. 넷플릭스를 켜보면 바로 알 수 있지. 그저 수많은 이야기가 리스트 되어 있을 뿐 딱히 누가 주인공이라 명시되어 있지 않아. 조선시대의 광대는 수많은 역사 영화에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조연에 불과했지만 <왕의 남자>에서는 주연으로 등장한다. 남루한 광대의 삶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는 어렵지만 역경을 극복하는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혼신을 다하는 명연기를 한다면 남루한 소재를 가지고도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어. 이것이 바로 ‘인생극장’이야. 나에게 주어진 배역이 화려하지 않다고 불만을 가질게 아니라 혼신의 연기를 다하면서 나만의 창작품으로 만든다면, 나의 인생이 우주라는 넷플릭스에 인기 콘텐츠로 살며시 업데이트될 것이다.

 

니체의 또 다른 대표적인 사상은 ‘위버멘시’이다. 위버멘시에 대해서는 아빠가 좀 더 공부해서 다음 편지에 이야기해 줄게. 딸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너무 좋구나. "공부가 좋다니? 말도 안 돼!! 아빠는 사기꾼!!!" 너의 눈이 마치 이렇게 얘기하는 것 같다. 하지만 ‘배움’이란 좋은 거란다. 배움을 통해 느낀 '앎'의 깨달음은 나비가 번데기를 뚫고 날아가는 성취감과 같다. 아빠는 좀 더 일찍 공부하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는구나. 너도 책 많이 읽고 열심히 공부하기를 바란다. (여기서 공부는 영어, 수학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는 나의 딸, 아침에 눈을 뜨면 ‘아모르파티’라는 만트라를 외우거라. 그리고 너에게 주어진 하루를 멋진 인생 씬 scene으로 만들어 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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