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국현 Jun 19. 2023

가족, 공감의 작은 원

“영원한 네 편이 되어 줄게.” 네가 꼬물거리던 갓난아기 시절에 널 볼 때마다 내 마음속으로 되뇌었던 말이었다. 살아보니 돈이 없는 것보다 내 편이 없는 외로움이 더 견디기 어려웠다. 경제적 허기는 노력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으나 심리적 허기는 나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집밥의 효능은 허기와 영양만 채워주는 것이 아니야. 식탁에 같이 밥을 먹는 것은, 이 자리에 앉은 우리는 영원한 한 편이라는 의식이다. 그 의식에서 존재의 의미를 깨우친다. 그 깨우침으로 삶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지.

 

1954년 카우아이 섬에서 미국 소아과 의사,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심리학 종단 연구가 시작되었다. 하와이 제도 중에 카우아이 섬은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하와이 최초의 섬이야. 기묘한 협곡과 아찔한 폭포가 장관을 이루고 짙푸른 녹음과 눈부신 해변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곳이지. 영화 쥬라기 월드가 촬영된 곳이기도 해. 섬 전체가 수목으로 가꾸어져 있어 정원의 섬이라고 불리기도 하지.

 

지금은 카우아이 섬이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지만 1950년대만 해도 이 섬은 지옥 같은 곳이었어. 19세기경부터 백인들이 이주하여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했다. 사탕수수 노동자로 전락한 원주민들은 바로 빈곤층으로 추락했지. 대부분의 섬 주민들은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고 대다수가 범죄자나 알코올 중독자들이었어. 아이들은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 청소년 범죄도 심각하였다. 카우아이 섬에 태어난다는 것은 저주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어.    


카우아이 섬에 도착한 대규모 연구진들은 1955년 카우아이 섬에서 태어난 833명의 신생아들을 대상으로 대규모 종단 연구를 착수한다. 카우아이 섬 원주민들이 연구 대상으로 선정된 이유는 모든 불행이 모여 있는 열악한 환경과 (섬이라는 특성 때문에) 인구 유동이 거의 없는 폐쇄성 때문이었어. 이 연구의 목적은 한 인간의 출생부터 겪는 수많은 문제나 가정 내 환경, 사회적 환경이 어른이 되기까지 어떠한 영향이 얼마나 미치는가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더 열악한 환경에 놓였던 201명을 별도로 추려내어 연구했어. 그런데 십수 년이 지나 결과를 확인해 보니 고위험군 201명 중에 72명은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일부 아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성격이 밝고 명랑했다. 학교 성적도 상위권이었고 SAT(Scholastic Aptitude Test 미국 대학입학 자격시험) 점수가 미국 상위 10% 안에 들어가는 학생도 있었어. 마치 다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처럼 훌륭한 인격체로 성장한 것이었지. 이들에게 인생의 역경은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어. 극소수의 예외가 아니라 고위험군의 1/3에 해당되는 높은 비율이었다. 연구진은 이런 예상외의 결과에 커다란 의문을 품었으나 그 당시 심리학은 그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었지.

  

오랜 연구 끝에 72명의 아이들이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었던 핵심은 인간관계였음을 밝혀졌어. 이 아이들에게 발견된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 아이의 인생에 아이의 입장을 무조건 이해해주고 받아주는 어른이 적어도 한 명은 있었다는 점이었어. 그 한 명이 엄마가 되었든 아빠가 되었든 아니면 선생님이 되었든 그 아이를 곁에서 지켜봐 주고 무조건적인 이해와 사랑을 베풂으로써 아이가 힘들 때 언제든 기댈 수 있는 포근한 언덕이 되어준 것이었지.

 

진 웹스터 Jean Webster의 소설 키다리 아저씨의 주인공 제루샤 주디 애봇은 16년 동안 고아원에서 자랐지만 키다리 아저씨의 사랑과 후원으로 훌륭한 청년으로 자라게 된다. “너는 작가가 되지 않아도, 배우가 되지 않아도, 그저 너이기에 사랑스럽고 완전한 존재란다. 다른 무엇이 되려고 애쓰지 않아도 좋아. 너는 그저 너, 너다운 너이기만 하면 된단다.” 키다리 아저씨의 이 조건 없는 존재의 인정은 주디의 인생에 있어 핵심 에너지가 되었다.

  

고대 그리스 시인 소포클레스가 이런 말을 했어. “낱말 하나가 삶의 모든 무게와 고통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 말은 사랑이다.” 카우아이 섬 연구는 이 말을 증명하였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는 인생의 산을 넘을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햇살만이 자존감이라는 나무를 키울 수 있었던 것이지. 단 한 명이라도 전폭적인 신뢰와 공감을 심어준다면 사막에서도 한 그루의 나무는 자랄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어.

   

자존감 편에서 이야기했듯이 자존감이 낮으면 돈, 권력, 외모 등의 사회적 갑옷에 집착하게 된다. 존재 자체에 자신이 없으니 사회적 가면이나 갑옷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지. 하지만 가면이나 갑옷은 내가 아니야. 가진 것이 많은 자도 권력이 높은 사람도 돼지처럼 인정욕구를 흡입하는 것을 보면 갑옷이 나의 허기를 달래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배고픔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신자유주의의 기치 아래 약육강식, 적자생존이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린 현대 사회와 1950년대 카우아이 섬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진화생물학의 용어를 빗대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 지금의 사회는 짐승이 사는 정글과 다를 바 없어. 자본주의 검색창에는 공감이라는 단어가 검색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공감의 결핍 위에 존재할 수 있으니까.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가는 노동자의 시간을 착취함으로써 부를 증진시킨다고 한다. 물질적 생산수단의 독점으로 잉여가치를 얻는다. 자본가가 노동자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다면 자본주의는 존립할 수 없어. 자본주의는 소유의 행복을 강조한다. 하지만 소유를 하기 위해서는 치열한 경쟁에서 승자가 되어야 해. 남보다 빨리 뛰기 위해서는 공감의 싹을 밟아야 한다. 누군가를 짓밟아야 하는 것이지. 그럼으로써 (일정 부분의) 폭력이 정당화되기도 한다.

 

중세시대에 귀족들은 여우 사냥을 즐겼어. 여우를 너무 많이 잡아서 여우가 없어지자 농노의 아들에게 여우 가족 옷을 입히고 그 아이들을 사냥하였다고 해. 내 몸에서 공감이 증발하면 타인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그저 욕망을 해소하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더 이상 공감이 증발하면 이런 상황은 다시 발생될 수 있어. 공감이 자라지 못하는 사회는 생명이 살 수 없는 사막 같은 곳이 된다. 자본주의 분열을 지향한다. 노동을 분열하여 분업이 발전했고 시민은 분열되어 각자도생 하는 노동자가 되었다. 분열에 저항하고 역행하여 공감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질 수 있으니까.

 

숨 막히는 이 세상에 너를 숨 쉬게 할 수 있는 만트라를 전해주겠다. “너는 언제나 옳다.” 너의 마음은 이 만트라를 산소로 삼아 숨을 쉴 것이다. 살다가 가장 힘이 부치는 순간이 오면 너는 알게 될 것이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가장 중요할 것 같지만 나를 살게 해주는 것은 가족의 공감이라는 것을. 네가 땅을 쳐다보는 날이 많으면 아빠도 같이 땅을 보면서 물어보겠다. “지금 네 마음은 안녕하니?” 문제가 생기면 아빠에게 솔직히 얘기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같이 하늘을 바라보자. 대답은 중요하지 않아. 네가 넘어졌을 때 곁에 있어주고 안부를 물어보고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만을 알기를, 아니 믿기를 바란다. 너의 고통에 주목하고 있는 존재가 있다는 믿음이 너를 다시 일어나게 해 줄 것이다. 


공감이란 무엇일까? 우리의 물리적 경계는 피부가 정해주겠지만 마음에는 경계가 없음을, 세상의 핵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어서 손잡고 인생의 궤도는 같이 도는 전자임을 아는 것이 아닐까? 전자의 궤도 형태가 우리의 존재 양식을 결정한다. 같은 궤도를 돌면서 우리의 존재는 그렇게 연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분노를 말할 수 있으면 폭발하지 않는다고 해. ‘아! 그랬구나.’ 이 한 마디를 듣지 못해서 화산처럼 터지고 만다. 엄마 아빠는 너의 감정을 판정하지 않을 것이야. 감정은 판단의 대상이 아니니까. (엄마, 아빠는 네 인생의 판사가 아니다) 감정은 너의 존재를 알려주는 신호이다. 긍정적인 감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너의 감정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리하여 너의 감정은 늘 옳다. (여기서 옳다의 의미는 네가 한 행동에는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누구를 죽이도록 미워해도 그 마음은 옳다. 엄마 아빠가 그 마음도 옳다는 것을 인정해 주면 너의 분노는 헤어드라이기에 증발되는 머릿속 물기처럼 바로 증발될 것이다. 뽀송뽀송한 마음으로 분노의 늪에서 나올 수 있다. (그렇다고 너의 행동까지 용서된다는 뜻은 아니다) 결과가 아닌 과정을 공감해 줄 것이야. 결과에 대한 지지가 아니라 너의 존재에 대한 지지이자 응원이다.


육신의 양식뿐만 아니라 마음의 양식도 필요하다. 마음은 무엇을 먹을까? “넌 참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주위의 사랑과 인정을 받을 때, “나는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야.”라고 삶의 의미를 찾을 때, 이런 한 마디가 나의 마음을 먹여 살린다. 마음의 양식을 먹으면 뇌에서 스트레스 호르몬의 분비를 억제시킨다. 이때 옥시토신이 분비되면서 엄마 뱃속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


하지만 역설적이게 사랑하는 사람끼리 공감이 안 되는 경우도 많아. 관계가 가까울수록 더 많은 오해와 실망으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지. 내가 선택할 수 없는 인간관계가 나를 힘들게 한다. 대표적인 예가 직장 생활이야. 친구는 내가 선택할 수 있지만 직장 상사, 동료들은 내가 선택할 수 없어. 그래서 직장 생활은 늘 힘들다. 너도 나중에 직장을 다니게 되면 알겠지만 일보다는 사람 때문에 힘들다. 직장은 그만 두면 되지만 그만 두지도 못하는 관계가 있어. 그것은 바로 가족이야.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성격, 취향, 인생관 등은 다를 수밖에 없어. 그래서 갈등이 생기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 갈등이 생기는 주된 이유는 서로의 기대치가 높기 때문이야. 그리고 가족 관계에선 별로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경우도 많아. 상대를 존중하지도 않고 내 민낯을 다 보여주면서도 가족이니까 다 이해해 주길 바란다. 가족 사이에도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해. 미운데 미워하지 못하면 더 미워진다. 상대에게 상처받아서 밉다면 솔직히 얘기하는 것도 방법이야. 가족이라고 무조건 이해를 바라는 것도 일종의 폭력이다. 가족이니까 구속하지 말고 가족일수록 자유를 주어야 한다.

 

가족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는 가족은 노력할 필요가 없는 관계라는 것이야. ‘가족끼리는 감정을 다 표현해도 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많이 기대해도 된다.’ ‘가족끼리 뭐 어때?’ 등의 말들이 있지. 하지만 가족이야말로 가장 많은 노력이 필요한 관계이다. 여과 없는 감정의 표현은 상처를 입힐 수도 있어. 해서는 안될 말과 행동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해. 기대치는 적정한 수준으로 조절해야 한다. 같이 잠자고 밥 먹고 화장실을 사용하는 등 밀접하게 생활하기 때문에 사소한 것들도 문제가 될 수 있어. 건강한 가족관계를 만드는 방법으로는 서로의 경계선을 인정해야 한다. 가족 간에도 서로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선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지. 그리고 그 경계를 인정했으면 그 영역 안에서 무엇을 짓든지 간섭하지 않아야 한다.


가족 관계 안에서 원하는 것은 오직 이 한 가지이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되어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상대방을 사랑하기’. ‘나를 바꾸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기’. 사회는 그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을 내게 강요한다. 가족 안에서만큼은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자. 인간은 신뢰와 사랑을 먹고 자라나는 존재이다. 가족 구성원들이 동시에 실천해야 한다. 건강한 가족관계는 불안과 불신이 없는 상태를 말하지.

 

어떤 활동의 근거지를 '기지'라고 해. 내 삶의 안전 기지는 ‘언제나 든든한 내 편이 되어 주는 존재’의 확인이다. 애착 이론에서 안전 기지는 힘들 때 생각나고 달려가 기대는 존재이다. 나를 안심시켜 주고 다시 세상으로 발 디딜 수 있도록 정서적으로 재충전해 줄 수 있는 존재이지. 그런 존재가 우리 가족 안에 꼭 있다는 것을 아빠가 절대 보장한다.


성숙의 잣대는 신체의 키가 아니라 공감의 키로 결정된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고통스럽다는 것을 공감할 때 좋은 사회는 시작될 수 있어. 공감은 타고나는 성품이라기보다는 연습의 결과이기도 하지. 우리의 연습에 따라 우리 교실에서 학폭은 없어질 수 있다. 직장에서 왕따는 사라질 것이다. 일체개고를 깨우친다면 우리는 일체에게 함부로 할 수 없어. 혁명은 거창한 것이 아니야. 공감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국영수 이외에 공감이라는 과목을 신설할 필요가 있다.)


원자는 연결되어야 존재의 의미를 갖듯이 우리는 누군가와 연결되어야 한다. 행복하다는 것은 함께하는 타인이 나에게 의미가 있다는 뜻이지. 우울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나를 넘어 우리로 연결되는 것이야. 공감이 그 의미를 만들지.

  

사랑하는 딸, 변수가 많은 인생에서 엄마 아빠는 네 인생의 상수가 되어줄 것이다. 그 상수는 '무한한 공감과 변함없는 사랑'이다. 가끔 세상이 정글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이 세상은 정글보다 못한 전쟁터이므로. 네가 살다가 적군으로부터 포위되었을 때 무전을 치길 바란다. 그러면 엄마, 아빠는 가공할 만한 공감의 포격으로 너를 지원할 것이다. 네가 네 마음의 고통의 좌표를 정확히 알려주면 좀 더 정확히 포격할 수 있다. 역경의 기관총이 고통의 총알을 너에게 난사하더라도 쓰러지지 말고 돌격하길 바란다. 고통의 총알을 맞고 쓰러지면 바로 구급 요청을 해라. 엄마 아빠가 바로 구조하여 너의 상처 위에 공감이라는 치료제를 투여할 것이다. 효과는 모르핀보다 훨씬 강하다.


다음 편지에서는 공감의 원을 좀 더 크게 그려보겠다. 오늘도 우리 서로의 존재를 응원해 주자. 영원히 사랑하고 언제나 네 편이라는 것을. 



이전 25화 우정, 사랑의 확장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