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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동범 Jan 27. 2024

소문

조동범 신작시_01



 소문



  조동범



  선의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하여 함정에 빠진 산짐승과 저물녘의 돌이킬 수 없는 어떤 고백에 대해 생각한다. 산과 들과 강물과, 사슬 풀린 사냥개의 송곳니가 붉게 물들며 빛나는 어느 날의 순간이구나. 고백은 고해성사가 아니고 진실은 어느 곳에도 없으니, 그런 밤이면 불길 속을 걷던 누군가는 그저 끝도 없는 죽음에 이르고자 할 뿐이다. 열에 들뜬 밤이면 거대한 무덤 속으로부터 들리지 않는 통곡은 거듭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선의였고, 쓸모없는 예언처럼 불행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과거로 기록될 뿐이다. 과거는 어떻게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은 미래가 되는가. 그것은 고통인가, 참혹인가, 아니면 무가치한 불치의 병인가. 아름답거나 아름답지 않은 미래를 예감할 때마다 구름은 피어오르고, 사라지고, 이윽고 공중이 되어 간다. 적란운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건 격정적인 구름의 내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보지 못한 구름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위험한 짐승의 울음소리와도 같은 것. 치명적인 결말은 우리의 상상을 전복하며 다가오는 법이지만, 그것은 단지 선의일 뿐이므로 오늘 밤은 상관없다고 누군가는 생각한다.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른 보름이면 우리들은 늑대가 된 소년의 이야기를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 이제 소문은 어느새 진실이 되고, 진실은 이윽고 박제된 실체가 되어 공포의 실존에 이른다. 고요하고 무서운 밤이면 허기를 달래려 식탁 의자에 앉는 누군가가 있다. 오늘 밤의 허기는 함정에 빠진 산짐승이거나 돌이킬 수 없는 어떤 고백. 허기를 달래려 앉은자리마다 오늘 밤의 악몽과 내일 밤의 악몽은 끝도 없이 피어오른다. 이제 세상의 모든 선의 앞에서 어둠은 빛이 되고, 구름은 침몰하고, 오래전에 죽은 어머니는 살아 돌아온다.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해도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선의였으므로,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가 나타났다. 늑대에 대한 소문만이 오늘 밤과 내일 밤을 영원히 배회할 것이다.


  -<시와서정> 2021년







조동범

매일매일 읽고 쓰며 호숫가를 산책하는 사람이다.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은 이후 몇 권의 책을 낸 시인이자 작가이다. 시와 산문, 비평과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고 있으며, 대학 안팎에서 문학과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을 실천하며 길 위의 삶을 살고 있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 시집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금욕적인 사창가> <존과 제인처럼 우리는>, 산문집 <보통의 식탁> <알래스카에서 일주일을>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인문 교양서 <팬데믹과 오리엔탈리즘> <100년의 서울을 걷는 인문학>, 글쓰기 안내서 <부캐와 함께 나만의 에세이 쓰기> <상상력과 묘사가 필요한 당신에게>, 시창작 이론서 <묘사 진술 감정 수사> <묘사> <진술>, 문학평론집 <이제 당신의 시를 읽어야 할 시간> <4년 11개월 이틀 동안의 비>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연구서 <오규원 시의 자연 인식과 현대성의 경험> 등이 있다. 김춘수시문학상, 청마문학연구상, 미네르바작품상, 딩아돌하작품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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