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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운 Apr 03. 2024

김보영 <얼마나 닮았는가>를 읽고 남기는 조각글

  

# 반전과 퍼즐 조각

난 추리물을 좋아한다. 추리물의 특성상 반전이 많은데, 그 반전이 밝혀지는 순간을 좋아한다. 잃어버린 마지막 퍼즐 조각을 계속 찾아 헤매다 딱 끼우는 느낌이다. 의미를 알 수 없었던 다른 조각의 모양들도 마지막 퍼즐 조각이 나타나면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런데 마지막 조각이 잘 들어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다른 조각들의 모양과 맞지 않아 구멍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설정상 오류라든가 앞뒤가 맞지 않는 반전이 그렇다. 독자를 속이겠다는 일념하에 말도 안 되는 걸 반전이랍시고 들고 오면 참 실망스럽다. 지금까지 맞춘 퍼즐 조각들이 다 의미 없어지는 느낌이다.

마지막 조각이 너무 헐렁한 경우도 있다. 구멍에 들어는 가는데 공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꼭 그렇게 생긴 조각이어야만 하는가'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이 또한 실망스럽다. 작가가 준비한 조각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만, 다른 조각도 있을 수 있는데 이 조각이 맞다고 우기는 느낌이다.

김보영의 <얼마나 닮았는가>는 추리 소설은 아니지만, 나에게 완벽한 퍼즐을 선사했다. AI 훈이에게서 지워진 것이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 그 조각이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았고 모양도 딱 맞았으며, 마지막 퍼즐 조각으로 완성된 그림도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 과학문학

과학문학 = α × 과학 + (1 − α) × 문학

과학문학을 위의 수식처럼 정의한다면, 김보영 작가의 α 값은 내가 가장 즐길 수 있는 α 값과 비슷한 것 같다.

(여기서 α는 0 이상 1 이하의 실수이다.)


# 추한 망상과 따뜻한 망상 

소설에서 선원들과 선장의 목표는 모두 타이탄이라는 행성에 보급품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선원들은 보급을 포기했고 선장은 계속 보급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정반대의 행동이지만, 보급을 포기하겠다는 의지도, 계속하겠다는 의지도 모두 망상에서 나왔다. 선원들은 보급품을 전달하기 어려워지자 "아래에 해골 밖에 없다"는 비약을 펼치기 시작한다. 반면 선장은 "저 아래에서 우리만 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포기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 세상엔 다양한 비합리가 있다. 소설에 등장한 성차별, 타자에게 갖는 망상 모두 비합리다. 하지만 선장이 AI인 훈이를 인간으로 착각하는 것도, 그래서 훈이가 보급품을 전달한 후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걸 걱정하는 것도 비합리다. 추한 망상과 따뜻한 망상. 두 가지 면을 모두 보여준 것이 재밌었다.


# 굳이 잡아보는 트집

AI 훈이는 ^_^; 라는 이모티콘을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현재 방식으로 학습된 LLM이라면 이 정도의 이모티콘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학습 데이터에 충분히 많이 등장한다면 말이다. LLM은 문장을 토큰으로 나누고 각 토큰의 임베딩은 토큰의 의미를 반영하게 되는데, 머쓱한 문맥에서 ^_^; 라는 이모티콘이 많이 등장했다면 ^_^; 토큰의 임베딩은 머쓱함의 의미를 담게 될 것이다. 실제로 ChatGPT는 이모티콘만 보고 영화 제목 맞히는 게임을 잘한다.

하지만 LLM에게 토큰은 인덱스에 불과하다. 어떤 토큰이 한글이든, 알파벳이든, 이모티콘이든 상관없이 임의의 숫자에 대응된다. 그래서 ^_^ 가 웃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상형 했다거나 '댕댕이'라는 토큰이 '멍멍이'와 생긴 것이 비슷하다거나 하는 정보는 알지 못한다. 그래서 훈이가 ^_^; 라는 이모티콘을 이해하지 못한 거라고 해석해 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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