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벤더 블루를 들으며
새벽 4시에 잠을 깼다
책을 보고
법문을 듣고
어젯밤에 서방님이랑
굴전에 동동주 파티를 하고 나서 어질러진
주방 청소를 하고 식세기가 돌아가는 동안
쓰레기 정리를 하고
셔츠 다림질까지 마치고 보니 술친구에게
해장으로 미역국을 끓여주고 싶었다
아파트 후문에 있는 작은 마트로 가서
간단하게 장을 봐서
미역국을 끓이고 시금치를 무치고
계란말이와 고등어조림을 해서 상을 차리는 동안
디즈니의 신데렐라 ost <라벤더 블루>를 반복재생으로 틀어놓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신데렐라는
왕자님과 결혼만 하면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때부터 인고의 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왕자님은 신혼의 단꿈에서 깨어나자
마음이 잘 맞는 대신들과 밤마다 술을 마셨고
아름다운 후궁들을 선발해서 첩지를 내렸다
신데렐라가 슬퍼하거나 외로워하면
왕족출신들은 자기 아빠가 하는 걸 보고자라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걸 왜 이해하지 못하냐면서 역시 행복하게 자란 여자가 행복하게 산다고 하며 왕자는 자기도 힘들어했다
그리고 왕자의 어머니는
귀한 내 아들을 힘들게 하지 말라며
같은 여자로서 이해하고 위로하는 대신
자기 세대가 더 힘들었다며 끝없이 갑질을 하고
왕자의 형제들은 출신성분을 극복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신데렐라를 무시했다
신데렐라가 성당에서 신부님께 고통을 호소하니
주님의 사랑으로
모든 걸 용서하고 극복하라고 했다
별로 도움도 안 되고 참다못해 다시
스님을 찾아가 조언을 구하니
사랑을 포함해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고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원래 인생이 무상한 줄을 알고
모든 사람들이 겪는 고통 중의 일부를
나도 경험할 뿐이지
내 고통이 특별하다고 생각해서
고통을 더 키우지 말라고 하며
왕관을 쓰려면 그 무게를 견디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특별하다는 착각 즉 에고를 경계하라고 했다
신데렐라는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기 위해서는
생의 모든 현상을 관찰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자기의 집착을 끝없이 비우고
욕망을 내려놓는 길 밖에 없음을 알아차리고
원하는 것이 없어질 때까지
자기의 마음 챙김을 실천하며
수행하는 마음과 공덕을 베푸는 일에서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친정과 시댁에서 받은 상처의 후유증으로 섬유근육통과 불면증이 생의 훈장으로 남았다
드디어 착하고 예쁜 그녀가 죽어서 천국에 가자
신이 몹시 기특해하며
-착하고 어여쁜 아가야 그동안 고생 많았어
너는 생의 모든 고통을 승화시켜 성장을 선택하고
게다가 많은 공덕을 지었구나
상으로 재벌이든 왕족이든 원하는 대로
다시 태어나게 해 줄게
그러자 그녀가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인간으로 태어나면 생로병사의 고통을
또 반복해서 겪어야 하니 착한 사람들에게
축복을 허락하는 요정이나 천사가 되게 해 주세요
그러자 신이 대답했다
-네가 시스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거 같은데
내가 성경에 자세히 설명 두었잖아
너희 중에 가장 작은 자중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고...
그게 축복의 씨앗이 되는 거야
네 전생의 업식으로 선택가능한 인생을 통해서
짓는 모든 업식이 이 생의 가까운 미래가 되고
그것이 쌓여서 그다음의 생이 된단다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고 천상에 머무를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한 존재는
왕국을 버리고 출가해서
수행을 통해 인류를 구원할 가르침을 남긴
석가모니밖에 없어... 아직까지는...
그는 좋은 업식으로 왕자로 태어났지만
혼자 행복한 걸로는 도저히 만족이 안되어서
모든 존재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평생을 고행하고 수행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지
그 양반이 어찌나 고집이 센지
그 양반을 기다리던 아버지와 아들도 결국
모두 왕의 자리를 버리고 출가해서 귀의하고
왕국은 타인에게 넘어갔잖아
그런데
그 양반이 제일 답답해하시는 것이
절에 가서 복을 비는 사람들이래
자기가 왕국을 버리고 수행하여
모든 집착을 버리라고 가르쳤는데
사람들이 무릎이 닳도록 절을 하면서
복을 비는게 안타깝다네
아무튼 이제 시스템이 이해되었지?
자기와 자기 아닌 것의 경계가 사라진
온전한 존재들만
태어나지 않고 천상에 머무를 수 있고
나머지는 자신의 업식을 따라 생을 반복하며
계속 공부하는 거란다
자타의 경계가 없어지도록 완성될 때까지!
신데렐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심사숙고 한 끝에
자기 자녀의 후손으로 태어날 것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