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생활에 지나치게 잘 적응해 버린 탓에 일상 속 정전이 대수롭지 않게 되었다. 한국에 살 때는 정전을 겪을 일이 거의 없었다. 오죽 희귀한 일이었으면 아파트에 정전 한 번 일어나는 날이면 급하게 촛불을 찾아 불을 붙였다느니 손전등이 없어 길 건너 슈퍼까지 달려갔다느니 하는 무용담을 사골 국물처럼 우려먹으며 추억팔이를 했다.
안정된 전기 공급이 하나도 당연한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줌 회의를 하다가 느닷없이 인터넷이 끊겨 튕겨나가고, 플레이스테이션으로 넷플릭스 드라마 <마스크걸>을 보다가 화면이 까매지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문서를 작성할 때면 저장 버튼을 누를 새도 없이 본체가 꺼지고, 이제 막 10분쯤 돌아간 세탁기가 먹통이 되어 빨랫감이 드럼 안에 갇혀버리는 일이 특별한 사건이 아닌 평범한 일상이 되었다.
언제 어디서 전기가 끊겨도 이상하지 않은 인도에서의 일상 덕분에 새로운 습관이 많이도 생겼다. 우선 줌 회의를 할 때는 절대 와이파이와 데스크톱을 믿지 않는다. 이 둘에 의존해 실시간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안전벨트 없이 360도 회전 롤러코스터에 타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반드시 휴대폰 LTE 핫스팟을 켜고 노트북이나 태블릿 PC를 사용해 회의에 참석한다. 몇 분 몇 초에 끊길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회의를 하라고 하면 이 쫄보는 도통 불안해서 아무 소리도 귀에 들어오질 않기 때문이다.
세탁기를 돌리는 시간도 섬세하게 골라야 한다. 아무 때나 달려들어 '오늘은 옷이나 빨아볼까?' 할 일이 아니다. 요즘처럼 날씨가 40도를 넘는 여름 건기에는 정전이 훨씬 잦아 생각 없이 세탁기를 돌리다가는 먹통 되기 십상이다. 다른 집에서 전기를 안 쓸 것 같은 가장 애매한 시간대를 골라 후다닥 처리할 때면 마치 남의 전기를 끌어다 쓰는 도둑놈이라도 된 기분이다. 그렇게 성공해서 세탁기가 러닝타임 45분을 버텨내면 그것만으로도 요 녀석이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싱글벙글한다.
새로 온 집은 전기가 많이 불안정하다. 하루 평균 6, 7번은 정전이 일어나는데 끝내 어느 화요일 저녁에 역대급 드라마를 찍었다. 6시부터 10시까지 4시간 동안 무려 15번 전기가 끊긴 것이다. 아파트 주민들이 실시간으로 커뮤니티 앱에 불만을 토로했다. 이 미친 수준의 정전을 당장 해결하라는 인도인의 말이 왜 이렇게 웃긴지 모르겠다. 한참을 배꼽 잡고 웃었다.
오늘도 브런치를 쓰는 동안 대차게 한 번 꺼졌다. 절반은 데스크톱으로, 나머지 절반은 태블릿으로 작성한 이 글이야말로 인도 정전의 산 증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