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na May 03. 2022

무언가를 안 먹을 권리가 있는 나라


"맛있는데?"


임파서블 와퍼를 한입 베어물고 들었던 생각이다. 고기가 들어가지 않았다는 걸 모르고 먹는다면 그냥 평범한 햄버거인줄 알았을 것 같았다. 조금 퍽퍽하다, 는 느낌이 있었지만 지구환경을 위해서라면 견딜만한 수준이었다. 특히 버거킹 특유의 불향이 그 퍽퍽함을 극복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맥도날드였다면 빅맥의 '특별한 소스'가, 롯데리아였다면 '좋은건 다 집어넣어' 정신으로 이 식물성 패티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커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뉴욕에서 임파서블 와퍼를 맛본지가 2년 6개월이 지났다. 맥도날드에서도 '맥플랜트 버거'란 채식 햄버거가 나왔다고 한다. 그럼에도 아직 한국에는 이 패스트푸드계의 이단아들이 언제 출시될지 감감무소식이다. 우리나라도 대체육 제품들이 꽤 유행하고 있는데 왜 시장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걸까. 유행은 하고 있지만 채식이 일종의 라이프스타일이나 문화로 자리 잡은 것이 아니라 아직은 '신기한 것', '궁금해서 한번 먹어보고 싶은 것', '그래서 먹어봤더니 별로인 것'에 불과하다고 글로벌하게 소문이라도 난걸까.




수프가게 'Hale & Hearty'에서 암호문 같은 메뉴판이 신선하게 느껴졌던 것은, 음식의 종류뿐만 아니라 '성분'도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는 밀가루(글루텐)를 못/안 먹거나 우유도 안 먹는 빡센 채식을 한다해도 메뉴를 고를 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음식에 우유가 들어가는지, 고기가 들어가는지, 일일이 물어볼 필요도 없고 특정 성분들을 빼달라고 번거로운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으로 요청하지 않아도 됐다.


오히려 그런 까다로운 메뉴 선택이 ' 아무거나 먹지 않고  건강과 지구를 생각해서 음식도 따져 먹는다' 의미가 있는 것이라, 어쩐지 소신 있는  같고 힙해 보여서(?) 괜히 따라해보고 싶기도 했다. / 먹는 것도 하나 없이 평범한 치킨 팟파이 수프를 주문한  자신이 너무 무신경한 사람같이 느껴졌달까. 우리나라에서는 주는대로 아무거나  먹는게 미덕이고, 이렇게 '성분' 따져서 먹는 일이 자연스럽게 죄인이 되는 상황이 종종 생기는 것과는 완전 딴판의 상황이었다.


돼지고기와 커피를 못 먹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못 먹는건 딱 그 두 가지뿐이었는데, 너무나도 대중적인 음식 두 가지를 못 먹는 바람에 어쩐지 '못 먹는 게 많은' 이미지를 갖게 된 억울한 사례였다. 돼지고기라 함은 회식의 정석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친구가 있는 테이블만 소고기를 주문하는 특혜(?) 같은게 주어지곤 했다. 아무도 대놓고 뭐라고 하진 않았지만 "고기 먹을 땐 OO이랑 꼭 같이 앉아야겠다~"라며 은근 핀잔을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학교나 회사에서 단체로 밥을 먹고 카페에 가면 이것저것 고르고 따로따로 주문하기 귀찮으니 보통은 아메리카노로 통일을 한다. 뜨아와 아아를 선택할 수 있게 해주면 그나마 민주적인 집단이었다. 그런 와중에 그 친구는 "전 커피 못 마셔요"라고 말해야 했다. 그럼 그 순간 갑자기 커피 오더에 정체가 발생한다. 모두가 불편하고 어색한 상황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나는 가급적 내 주위의 '커피 못 마시는 사람'들을 기억해두려고 애썼다. 그나마 예전에는 "전 안 마셔도 돼요"라고 그냥 '포기'를 선택했다면 요즘은 그래도 '난 커피를 못 마시니 다른걸 주문하겠다'고 당당히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그 '안 마셔도 돼요'가 '커피 못 마셔요'와 같은 의미라는걸 알게 된지도 얼마 안된다.


하지만 그것도 일일이 기억하고 챙기려다 보니 점점 피곤해지고 짜증이 몰려오기도 했다. 그 친구와 식당을 갈 때면 돼지고기가 안 들어간 음식을 파는지 안파는지 꼭 확인해야 했고, 만약 다른 일행 중에 매운걸 못먹는다거나, 밀가루를 못먹는다거나 하는 사람이 한 명만 더 있어도 당췌 갈 수 있는 식당이 없었다. 아무거나 주는대로 다 먹는 나 같은 사람의 취향은 식당 선택의 협상테이블에 올라가지도 못했다.




미국 사람들은 비만이 많다고들 한다. 그런 내용을 다루는 기사에서는 거대한 몸을 소파에 구겨넣고 TV를 보며 감자튀김이나 햄버거를 먹는 이미지가 첨부되어 있곤 했다. 하지만 일주일동안 지내본 뉴욕은 오히려 '여기서는 살이 찔 새가 없겠다'는 인상이었다.


우선 물가가 너무 비싸서 음식을 많이 먹을 수가 없었다. 그냥 일반 식당에서 각 잡고 제대로 밥 좀 먹으려면 세금에다 팁에다 몇 만원이 훌쩍 넘는 금액이 나왔다. 핫도그 가게에서 습관적으로 음료와 감자칩이 포함된 세트를 주문했더니 대략 3만원이었다. 옆에서 점심을 사러 온듯한 젊은 언니가 달랑 핫도그 하나만 사들고 가길래 '저걸로 밥이돼?'라고 생각했던 나는 무자비한 뉴욕의 물가 앞에서 '저것만으로도 밥이 되어야 한다'는걸 깨달았다. 식비를 조금이라도 아끼려면 어디 노점상이나 슈퍼마켓에서 샌드위치를 사다가 공원에 앉아 먹는게 최선이었다. 게다가 교통체증은 심하고 지하철을 타는 것과 걷는 것이 별 시간 차이가 나지 않는 거리를 이동할 때가 많아, 정말 무지하게 걸어다녔다. 그러다보면 조깅을 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기도 했다. 적어도 뉴욕은 '비만'과는 거리가 먼 도시였다.


그날도 저녁에 호텔에서 먹을 음식을 사러 어느 슈퍼마켓을 들렀다. 과일과 샐러드, 초밥, 요거트 등으로 가득 채워진 진열대를 보니, 버거킹이 왜 채식버거를 팔 수 밖에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렇게 건강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나라에서 계속 패스트푸드 장사를 하려면 베지테리안들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원활한 장 운동을 위해 과일도시락과 요거트를 골라 계산을 하고,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과일과 온갖 건강식들로 가득찬 뉴욕의 슈퍼마켓




"이거 맛이 왜이래..?"


슈퍼마켓에서 사온 요거트를 개봉해 한입 떠 먹은 나의 얼굴은 이상야릇 요상한 맛 때문에 심히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기대했던 새콤하면서도 부드러운 우유의 맛이 아니었다. 단맛을 좋아하지 않아서 일부러 설탕이 안든 것으로 사오긴 했지만 이건 단맛이 없기 때문에 이런 맛이 나는건 아닌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수프가게에서 봤던 암호 중 하나가 적혀 있었다.


Dairy-Free.


그렇다. 이건 데어리 프리, 즉 유제품이 빠진 요거트였던 것이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맛이었지만 버리기는 또 아까워서 약이다 생각하고 꾸역꾸역 다 먹었다. 요거트에서 설탕과 유제품이 모두 빠지면 어떤 맛이 되는지 온몸으로 느끼며, 그럼에도 건강과 지구를 위해 새콤 부드러운 요거트를 포기하고 이런 제품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표하며,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선택을 보장하는 뉴욕의 식품 라인업에 감탄하며, 나는 데어리 프리 요거트의 충격에 한동안 빠져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임파서블 와퍼를 임파서블 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