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하고 장래희망가로 살아가기: 퇴사하고 어려운 것들
얼마 전, 퇴사한 뒤로 더욱더 치열하게 눕게 되는 몸뚱이를 되살리고자 필라테스 학원에 등록했다.
물론 격렬하게 누워 있는 것이 퇴사자의 마땅한 의무라지만, 먹고 바로 눕는 걸 반복하다 보니 오래된 식도염과 위염이 낫지 않아서 생활의 질이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체험 수업을 받고 바로 당일 등록을 위해 가입서를 기입하다가 곧장 ‘직업유형‘을 적는 공란을 마주하게 됐다.
‘뭐라고 적어야 하지?’
“제가 얼마 전에 퇴사를 해서…”
처음 본 선생님께 나의 TMI를 풀어놓으며 직업란을 공백으로 남겨두었다.
운동하는데 왜 굳이 직업을 물어보지? 란 생각과 함께 ‘직업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문화의 문제야’라는 성급한 일반화까지 흘러갔지만, 곧 직업에 따라 굳어있는 자세도 다를 테니 운동에 도움이 되기 위해 필수적으로 물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예전처럼 사무직 정도로 기입했어도 됐을 일이다.
그 외에도 직업을 밝혀야 하는 순간은 일상 속에 꽤 자주, 다양한 모습으로 있었다.
홈페이지에 가입할 때, 설문조사를 할 때, 학원에 등록할 때, 누군가를 처음 만나 소개할 때.
대면으로 만나게 되면 “제가 얼마 전에 퇴사를 하고 쉬고 있거든요. 이직할 생각도 아직 없고 이것저것 해 보고 있어요. 한 마디로 장래희망가랄까?!(찡긋)”
하며 구구절절 풀어낼 수 있지만 단답을 적거나 옵션을 선택해야 할 때는 뭐라고 할지 잠깐 머뭇거리게 된다.
어느 날은 ‘프리랜서’를 고르기도 했고 ‘기타’를 선택하기도 했다. 옵션에 ‘(소속이 없는)휴직자‘가 포함되어 있던 곳이 있었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무직‘은 간혹 본 것 같은데.
어떤 직업유형에 나를 딱 맞출 필요는 없지만 세상살이에 조금 애매한 것이 생긴 기분이다.
회사에 소속되었을 때는 “(회사명) 다니는 ㅇㅇㅇ입니다.“라고 깔끔하게 끝났던 소개문이 조금 길어진다.
사실 퇴사를 고민하면서 나를 대표해 주기도 때론 보호해 주기도 하는 회사가 없다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나름의 명예가 사라지지 않을까라는 걱정과 두려움이 컸다. 하지만 그만큼 회사 없이도 잘 사는 내가 돼보고 싶은 마음도 컸기에 퇴사를 선택했으니 앞으로 피할 수 없이 마주해야 할 일이다.
다음 번 직업을 묻는 란에는 적당한 답이 없다면 평범하게 ‘사무직’을 적어낼 생각이다.
홈페이지 가입할 때 옵션에 주관식을 추가해 주신다면 당당히 장래희망가라고 쓸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