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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램프(10)

by Outis

경쾌한 음악과 시끌시끌한 알림음. 흥분해서 몰려드는 구경꾼들.

주변은 이렇듯 떠들썩한데, 정작 주인공인 우리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망했다. 너무 눈에 띄어 버렸어.'


말쑥한 정장 차림의 한 남자가 거구의 경호원 둘을 거느리고 다가왔다. 보아하니 이쪽 플로어맨(Floor man; 객장의 1차 감독자로서, 특정 테이블과 딜러들을 관리하며, 분쟁이나 손님의 요구가 있을 시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맡는다.) 같았다.


"축하합니다. 당첨금 수령을 위해 VIP실로 모시겠습니다. 절 따라오시죠."


하얀 달걀에 펜으로 미소를 그려 넣은 것 같은 얼굴. 깍듯한 말투와 빈틈없는 자세는 우리에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었다.


잠자코 그를 따라가는 우릴 향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남의 속도 모르고, 거슬린다 생각한 것도 잠시. 귀에 통신용 이어폰을 꽂은 경호원들이 지키고 선 문을 지나자마자 우리는 객장의 인파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었다.

말 그대로 사자의 입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경호원이 하나씩 달라붙어 몸수색을 시작했다. 아무 무기도 지니고 있지 않음이 확인되자, 플로어맨은 쓸데없이 호화로운 로비를 가로질러 우리를 엘리베이터로 데리고 갔다. 두 자리 숫자의 층에서 내린 우리는 미로처럼 복잡한 복도를 걸어 제일 안쪽에 위치한 방에 다다랐다.


"이 안에서 기다리시지요."


'기다려 주십시오'도 아니고 '기다리라'니. 플로어맨은 주도권이 그쪽에 있다는 걸 드러내는데 서슴이 없었다. 우리는 시키는 대로 방 한가운데 놓인 소파에 앉았다.


VIP실이라는 그 방은 마치 서재처럼 꾸며져 있었다. 널찍한 한 벽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뭐 하나 꺼내 보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빽빽하고 단정하게 고전 문학 전집과 백과사전들이 꽂혀 있었다. 다른 벽에는 가짜 불꽃이 신기루처럼 일렁이는 벽난로가 장식처럼 놓여 있었고, 맞은편 벽에는 고급스럽고 커다란 사무용 책상이 있었다. 책상 뒤에는 '최후의 심판'의 느낌을 주는 그림이 걸려 있었다. 욕망과 죄악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간군상과, 멀찍이 떨어져 그들을 내려다보는 고결한 존재들. 참으로 카지노에 어울리는 그림이었다.


방 안에는 경호원이 넷, 문 밖에는 적어도 둘이 지키고 있을 거다. 탈출구는 들어온 문과 딱 봐도 굳게 잠긴 창문 하나뿐이다.

나는 주인 놈을 돌아보았다. 자책인지 긴장감인지, 아니면 원망인지,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현실도피를 하는 것처럼 바닥에 깔린 카펫만 쳐다보고 있는 그에게 나는 한국말로 속삭였다.


"지금부터 어떤 일이 벌어져도 동요하지 말고 포커페이스를 유지해. 넌 아무 말도 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


"이래 봬도 너와 계약을 맺은 정령이야. 믿어.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인인 널 지킬 거니까."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주인 놈이 내 팔을 붙잡고 당부했다.


"죽이지 마. 아무도."


"... 하, 요구사항 참.. 노력할게."


누군가가 뒤에 대여섯 명을 대동하고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매끈한 검은 하이힐, 하얀 다리. 한껏 절제된 디자인의 드레스도 감추지 못하는 고혹적인 매력을 진한 향기처럼 풍기며 한 금발의 젊은 미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바로 책상으로 가 앉더니, 깍지를 낀 손 위에 턱을 올리고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당신들이군요? 오늘 밤 행운의 여신의 키스를 받으신 분들이. 부디 편히 앉으세요. 얘기가 길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나는 다리를 꼬고 앉아 여유로운 미소로 받아쳤다.


"얘기? 카지노에서 오가는 건 돈만으로 충분하지 않아? 우린 당첨금을 준다고 해서 따라왔거든. 그쪽이 우리한테 돈을 줄 사람인가?"


여자는 깍지를 풀고 활짝 웃었다.


"아하하, 그건 룰이 지켜졌다는 전제하에서죠.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이 카지노의 핏보스(Pit boss; 카지노 경영 조직에서 가장 위에 있는 감독자), 엘로디(Elodie)입니다."


20대 후반, 아무리 많이 쳐줘도 30대 초반으로 밖에 안 보이는데 이 정도 규모의 카지노를 관리하는 핏보스라. 과연. 성씨도 말하지 않고 이름만으로 자기소개를 하는 걸 보니 세간에 웬만큼 알려진 가문의 방계혈족 아가씨인 모양이다. 지금 그 자리도 경영 수업의 일환으로 하고 있는 거겠지.


엘로디가 데리고 온 사람들 중 비서로 보이는 한 명이 엘로디 앞 책상에 종이 몇 장을 내려놓았다. 엘로디의 푸른 눈동자가 종이를 쭉 훑었다.


"미스터 킴(Mr. Kim)과 미스터 신(Mr. Shin). 두 분 다 남한에서 오셨군요."


나도 모르게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동의도 없이 남의 뒷조사를 이렇게나 빨리 마치시고, 카지노의 룰이라 이건가.


"흠~ 그나저나 흥미로운 조합이네요. 고아원 출신과 아무 기록도 없는 중동계 한국인이라..."


'고아원?'


중동계 한국인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일 텐데, 그럼 주인 녀석이 고아원 출신이란 말인가?

나는 잠자코 엘로디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엘로디는 서류에서 눈을 떼고 우리 둘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두 사람 사이의 공통점은... 피뿐인데?"


"피?"


"아, 실례. 조기교육의 폐해랄까요. 얼굴만 보고 대충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는 훈련을 아주 어릴 적부터 받아 와서요. 인상이나 사소한 버릇, 예를 들면 눈을 깜빡이는 모양새, 숨 쉬는 리듬, 입술 근육의 움직임, 손동작, 자세 등만 봐도 그 사람의 성격과 직업,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까지 대충은 알 수 있죠. 피부색과 이목구비 생김새로 출신지역 및 인종을 알아내는 거야 식은 죽 먹기고요."


"그래서, 피라는 건?"


"두 사람에겐 사막의 피가 흐르고 있어요. 그것도 화약처럼 뜨거운 분노가 서린."


나는 주인 놈의 얼굴을 곁눈으로 힐끗 쳐다보았다. 눈이 좀 큰 편이다, 피부톤이 좀 가무잡잡하다, 그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저 말을 듣고 보니 어쩐지 혼혈인 것 같기도 하다.


"불미스러운 일을 피하기 위해 꼭 확인해야겠어요. 혹시 우리 쪽에서 염려해야 할 만한 일을 꾸미고 계신가요?"


"그게 무슨 뜻이지?"


"물으시니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죠. 세계의 화약고 출신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 한 명은 한국에서 태어난 혼혈. 다른 한 명은 신상기록 전무, 미국에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는 한국 시민권을 획득한 것도 언제인지조차 불명. 어떻게 알고 만났는지도 모를 이 둘이 로또에 당첨, 미국에 함께 입국하여 처음 방문한 카지노에서 거액에 당첨되었다. 그것도 매우 작위적인 느낌으로... 어떤가요?"


"우리더러 테러 자금을 모으러 왔냐고 묻는 건가?"


"그렇게 들렸다면 그렇다고 해두죠."


엘로디의 미소가 싸늘한 냉기를 품었다.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맙소사, 상상력도 지나치면 병이라고? 우리가 로또 당첨금을 어디에 썼는지 이미 알고 있잖아? 도저히 자금을 모으려는 행동으로는 보이지 않을 텐데? 우린 그저 비즈니스차 들린 것뿐이야. 이쪽이 내 클라이언트지."


"그래요? 무슨 비즈니스죠?"


"그런 것까지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을까?"


엘로디는 가만히 내 눈을 응시하고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얼핏 비웃음 같았지만 한결 온기를 되찾은 미소였다. 그녀가 주인 놈에게 말했다.


"나라면 미스터 킴과 비즈니스를 하지 않을 거예요, 미스터 신. 당신 파트너는 전형적인 거짓말쟁이예요. 명심해요."


이 여자, 쓸데없는 소리를 주절대는군. 나는 주인 놈의 눈치를 살폈다. 내 당부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영어라 잘 못 알아들은 건지, 그는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엘로디가 다시 내게로 시선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포커에서 이긴 수법, 저는 매우 교묘한 속임수라고 여기고 있어요. 증거가 없기에 눈감아 주었던 것뿐. 그러니 제안을 하나 하죠."


"어디 들어 볼까."


"당신이 포커에서 이긴 상금은 지불하겠어요. 하지만 슬롯머신 건은 무효 처리하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실 포커에서 딴 돈만으로도 충분하다. 애초에 슬롯머신 잭팟은 계획 밖이므로 없는 일로 쳐도 상관없다. 그걸로 이 이상 귀찮은 일에 얽히지 않고 나갈 수 있다면 우리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그렇다고 그냥 덥석 물면 저쪽의 마음이 변할 수도 있으니, 이쪽도 적당히 줄을 당겨야겠지.


"테러 자금이냐는 둥 어지간히 따지더니, 결국은 돈이로군? 마음에 들어. 하지만 괜찮겠어? 우리가 잭팟 터뜨린 거 사람들이 다 봤는데?"


"문제없어요. 기계 오작동이라고 설명하면 되니까."


"무려 잭팟이라고? 기계 오작동이라고 입 싹 닫았다간 이 카지노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떨어질 거야. 적어도 책임을 지는 태도는 보여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면요?"


"기계 오작동이라면 제대로 관리를 못한 그쪽 잘못이니까, 우리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상금을 지불해. 많이는 필요 없어. 그저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액수를 그쪽에서 정해서 주면 돼."


"좋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조심히 가십시오."


카지노 놈들은 앞문이 아닌 뒷문으로 우릴 내보냈다.


각자가 딴 돈이 든 가방을 안고서 우리는 깜깜한 주차장을 터덜터덜 걸었다. 그러다 곧 멈춰 서서, 서로를 바라보며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숨을 내뱉었다.


"하... 하, 하하."


"하아... 하하하."


그제야 무사히 나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현실감이 돌아왔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키득거렸다.


이런 데서 거금을 들고 어슬렁거리다간 총을 맞을 수도 있으므로, 나는 전화 앱으로 택시를 불렀다.


"빌어먹을 카지노 놈들. 친절하게 차로 보내주면 좀 좋아?"


"사지 멀쩡히, 돈까지 받아서 나온 것만으로 감사하자. 그나저나 난 또 업이 늘어버렸네..."


"너야말로 그냥 감사하면서 좀 즐겨라. 오는 행운마다 다 차버린다고 업이 안 쌓일 줄 아냐? 오케이. 15분 뒤에 도착이래."


"... 어? 저 사람."


"응?"


주인 놈이 가리킨 곳에는 웬 남자 한 명이 세상이 무너진 표정을 하고서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딱 봐도 카지노에서 다 잃고 삶을 비관하고 있는 중이네. 쯧쯧쯧."


"... 우리 이 돈 필요 없댔지?"


"어? 야 잠깐만, 너 설마?!"


미처 말릴 틈도 없이 주인 놈은 그 남자에게 다가가 자기 가방을 내밀었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머뭇머뭇 가방을 받았다. 의심 가득한 얼굴로 가방을 열어본 그는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하자마자 고무공처럼 튀어올라 인사 한 마디 없이 곧장 카지노로 달려갔다.


그 남자의 뒷모습을 멀뚱히 바라보고 선 주인 놈에게 나는 혀를 끌끌 차며 다가갔다.


"뭔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 대충 짐작은 간다만, 방법이 틀렸어. 카지노 근처에서 죽을 상을 하고 있는 놈한테 돈을 주는 건, 다시 도박에 빠지라고 내모는 거나 다름없다고."


"......"


"비싼 수업료 주고 배웠다 생각해. 이제 저놈의 업이니 네가 신경 쓸 거 없어."


그때 달려가던 남자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다. 처음엔 내 돈가방까지 노리고 오는 건가 싶었는데, 표정을 보니 그럴 의도는 없는 듯했다. 그는 주인 놈의 손을 붙잡고 펑펑 울며 자기 나라 말로 뭐라고 한참 떠들었다. 그러고는 품에서 주섬주섬 여자 손거울을 꺼내 주인 놈에게 쥐여 주고는, 다시 카지노로 뛰어갔다.


주인 놈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기에, 대충 어떤 사연인지 설명해 주었다.


"아내가 전재산 다 들고 도망갔대. 남기고 간 게 그거뿐이랜다. 아마 남편이 도박중독인 거 알고 자기 살 길 찾은 거 아닌가 싶은데."


내 말에 주인 놈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는 손거울이 무슨 저주받은 물건이라도 되는 양, 손을 벌벌 떨며 내게 억지로 거울을 떠 안겼다.


"나, 나 이런 거 못 가져. 네가 좀 가져가."


"뭐야, 왜 그래? 싫으면 버리면 되지."


"그래도 준 건데.. 버리는 건 좀..."


"그렇다고 너 싫은 물건을 나한테 떠넘기냐?"


"그거, 뒤에 문양 좀 봐봐. 아무래도 너네 고향 물건 같아. 너한테 딱이야."


"네가 뭘 안다고 헛소릴...?!"


거울 뒷면의 문양을 본 나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 나의 사랑...


2천 년 동안 묻어둔 이름. 떨리는 입술이 그 이름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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