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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램프(13)

by Outis

어느 날 밤, 아빠는 몰래 울고 있던 나를 안고 밖으로 나가셨다. 싸늘한 바람을 피해 나는 아빠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릴 적 몸이 약해서 여름에도 저녁만 되면 할머니가 집안에 꽁꽁 가두다시피 하셨기 때문에, 처음 마셔보는 겨울의 밤공기는 무척이나 생소하고 두려웠다.


"휘야, 저기 봐봐."


나는 고개를 들어 아빠의 손끝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싫었던 찬공기를 나도 몰래 흠뻑 들이마시고, 잠시 숨을 멈추었다. 빨개진 눈이 눈물을 떨구고 대신 반짝이는 빛을 담았다.


"저기, 엄마 저기 있다."


"어디?"


"가장 밝고 예쁜 별."


나는 열심히 눈을 굴렸다. 수많은 별들 중 딱 하나, 가장 아름다운 별을 찾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엄마는 별이 되어서 우리 휘를 지켜보고 있어. 휘가 슬퍼하면 엄마도 같이 슬퍼하고, 휘가 씩씩하게 잘 지내면 엄마도 안심할 거야."


엄마별은 결국 못 찾았지만, 저 어딘가에 엄마가 있다고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나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응. 이제 안 울게, 아빠. 엄마 걱정 안 시킬게."


아빠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으셨다.


"그래. 장하다, 우리 아들."


그날 아빠는 처음으로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아빠가 첫눈에 반할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 무서운 사람들한테도 지지 않은 용감한 사람, 그리고... 기꺼이 목숨을 걸 정도로 날 사랑한 사람.


"휘야, 잊지 마. 엄마는 널 정말 많이 사랑했고, 지금도 너와 함께 있어. 그러니까, 힘들 땐 별을 봐. 알았지?"


코끝이 빨갛게 되고 콧물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 때까지, 아빠와 나는 한참 동안 별을 바라보았다. 촉촉해진 눈가와 훌쩍이는 코를 추위 탓으로 돌리며.



그로부터 몇 년 뒤, 나는 알았다.

아빠가 혼자 견디셔야 했던 서울의 밤하늘이 어떤 것인지.


미안해요, 아빠.

아무래도 저는...




손에 닿지 않는 별을 멍하니 응시하면서, 주인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빠는 독일에서 유학 중에 엄마를 만나 첫눈에 반하셨대. 가난한 유학생과 난민 출신 아가씨는 양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에 와 결혼을 했지. 사진 속 부모님은 정말 행복해 보였어. 실제로도 서로를 너무 사랑하고 아끼는, 이상적인 커플이었을 거야.

그런데 내가 생김으로써, 모든 게 틀어지고 말았어."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눈을 감았다.


"날 가진 엄마의 건강에 무슨 문제가 생겼대. 산모를 위해선 빨리 태아를 몸 밖으로 꺼내는 게 최선이었는데, 엄마는 가능한 오래 날 품어 보겠다며 미루셨대. 너무 일찍이라 내가 살 확률이 희박해서였다고.. 그러는 사이 엄마의 몸은 망가져갔고, 결국 날 낳다가 세상을 떠나셨어.

그렇게 나는... 아빠의 사랑하는 아내를, 행복을 빼앗은 거야."


다시 떠진 그의 눈은 사막처럼 메말라 있었고, 더는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빠는 날 무척 사랑하셨어. 혼자선 날 돌보기 힘들어 시골에 있는 할머니집에 맡기셨지만, 휴일마다 꼬박꼬박 나를 보러 오셨거든. 내가 좋아하는 과자를 잔뜩 사들고서. 할머니도 말은 퉁명스럽게 하셔도 날 끔찍이 아끼셨고. 그땐 몰랐어도 지금 돌이켜 보면 행복한 삶이었어. 네 살까진."


주인은 무릎을 세우고 팔로 다리를 감쌌다.


"할머니의 지병인 당뇨와 고혈압이 급격히 악화돼서 고모가 할머니를 모시고 가고, 나는 서울로 와서 아빠와 살게 되었어. 아빠는 날 어린이집에 맡기고 일을 하셨지. 최대한 빨리 퇴근하고 오셨는데, 어린 나에게는 기다림이 너무 길었나 봐. 난 아빠에게 떼를 썼어. 생일에는 빨리 데리러 와달라고.

다섯 살 생일날, 나는 창문에 딱 달라붙어서 아빠를 기다렸어. 아빠는 약속대로 진짜 일찍 오셨지. 한 손에 케이크 상자를 들고서.

건널목 저편에 아빠가 보였을 때, 난 너무 좋아서 손을 막 흔들었어. 아빠도 웃으며 나한테 손을 흔들어 주셨고..."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기억을 더듬는 그의 눈이 갑자기 떨리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길을 건너오시는 아빠를 웬 차가 덮치더라."


우우웅. 바람이 불어와 희미하게 걸려있던 미소를 떨구었다.


"음주운전. 즉사. 아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도 못했는데, 사람들은 뭔지도 모를 소릴 하면서 날 상주 자리에 앉혔어.

장례 이후 난 바로 고아원에 보내졌어. 할머니는 충격으로 쓰러지셨고, 고모는 날 거둘 형편이 안 된다 했고, 내가 안쓰럽다며 난리 피우던 어른들은 모두 싹 입을 닫았거든.

다 악몽이 아닐까, 다시 눈을 뜨면 아빠가 있지 않을까. 매일 밤 간절히 빌면서 잠들고, 눈을 뜨면서 좌절했지. 거기다 다른 애들이 괴롭혀 대고... 정말 버티기 힘들더라고."


주인이 고아원 출신이라는 그 카지노 여자의 말은 사실이었구나. 그렇게 알아내려고 애썼던 주인의 과거를 본인 입으로 술술 불어대는 걸 듣고 있자니 어째 허망할 정도다.


솔직히, 더는 듣고 싶지 않다.


불행한 얘기라서가 아니다. 전쟁, 기아, 질병, 노역 등. 난 훨씬 더한 불행을 수도 없이 봐왔다.

그럼에도, 더 알고 싶지가 않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은 그때, 주인의 눈에 빛이 감돌았다.


"그때였어, '그녀'를 만난 건. 당차고 예쁜 아이.. 날 괴물이라며 놀려대는 애들에게 대신 맞서서 싸워준 아이.

왜 도와주냐고 물으니 내가 자기 왕자님이라고, 자기 꿈을 이루어줄 왕자님은 아무래도 나밖에 없다고 했어. 그녀의 꿈은 '남들처럼 사는 것'. 그때부터 난 그녀의 꿈을 위해서 살겠다 다짐했어. 정말 죽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해서, 비록 최상위권은 아니지만 장학금을 받으며 대학에도 들어갔어.

성인이 되어서도 그녀의 도움은 계속되었지. 네가 마음에 안 든다는 그 양복도, 면접 볼 때 입으라고 그녀가 사준 거야."


그는 옆에 놔둔 배낭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마 부득부득 그 양복을 챙겨 온 모양이다.


"그녀에게 보답하기 위해 난 최선을 다해 살았어. 그녀의 진한 화장도, 향수 냄새도... 다 내 탓이라고, 내가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면 그녀도 그만둘 거라고 되뇌면서.

하지만 난 끝내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했어. 월세집도, 중소기업인 직장도, 그녀가 말한 '남들처럼'의 기준에 못 미쳤나 봐.

어느 날 퇴근해서 와 보니 그녀는 홀연히 떠난 뒤더라. 통장도, 도장도, 보증금도 다 들고.

그날 모든 게 다 사라진 거야. 삶의 목적도, 이유도. 전부."


그 말을 끝으로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그래서 그 노름쟁이가 준 손거울을 받고 그토록 질색한 거구나.


같이 소주잔을 기울인 날에 주인이 술주정처럼 흘렸던 말이 떠올랐다.


- 이젠 계획이 필요 없다는, 흐흣, 거지.


주인의 눈길은 여전히 배낭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고집스럽달까, 겁이 많달까. 어느 쪽이든 그는 여기서 멈춘 채 더 이상 나아가지 않을 테다.


"내가 태어나서, 모두가 불행해진 거야..."


나는 힐끔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직 별이 떠있으니 두 번째 소원은 유효하다.

진실만을 말하라니, 하여튼 성가신 소원만 빌어대긴.


만약 내게 '그런 거냐?'라고 묻는다면, '오만하기 짝이 없다'가 내 대답이다.

태어나는 것은 자기 의지가 아니요, 부모 또한 고를 수 없다. 그런데 부모의 선택으로 인한 결과인 주제에 원인 행세를 하다니. 착각도 정도가 있는 게 아닌가.

제 생사와 운명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면서, 타인의 생사와 행복에 책임을 지겠다니. 끝도 없는 인간의 욕망을, 그것도 타인의 욕망을 채울 꿈을 꾸다니.

인간 주제에 웃기지도 않다.


이렇듯 쏘아붙여줄 준비가 되었는데.


"이제 세 번째 소원을 빌 차례네."


아직 날이 새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주인 놈은 서두르고 있었다.


"그전에, 옷 좀 갈아입을게."


그가 배낭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냈다. 처음 만났을 때 입고 있던 그 허름한 양복이 잔뜩 구겨진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먼저 점퍼를 벗고 양복 재킷을 입었다.

다음은 바지 차례.


"?! 그 다리는..?"


"아, 이거? 하하, 흉측하지? 무슨 오징어 빨판에 휘감겨서 자국 난 것처럼. 어릴 때 이거 때문에 괴물취급받았었지."


발목부터 무릎 아래까지, 잎사귀덩굴이 휘감고 올라간 것 같은 모양의 옅은 갈색 표식.

파티마의 다리에 남긴 것과 꼭 같은 나의 문양이, 구김 진 양복바지 속으로 쓱 사라졌다.


말도 안 돼. 저게 대체 왜?


"마지막 소원이야."


"자, 잠깐만..!"


기다려줄 생각 따윈 없다는 듯이, 주인 놈은 바지 주머니에서 어떤 물건을 꺼내어 양손에 쥐었다.

산 지 얼마 안 된, 아직 한 번도 쓰지 않은 새것.


"?!"


- 나, 여기서 사고 싶은 게 있는데...


주머니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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