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1세기, 새벽의 멱>
나시르의 아들 무스타파(Mustafa)가 밖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부름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옆에는 산달을 앞둔 아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무스타파는 아내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며 집을 나섰다.
아직 동이 트기 전 새벽. 아들이 밖으로 나오자 나시르는 말없이 앞장섰다. 무스타파의 퀭한 눈이 아버지의 뒤꿈치를 좇았다. 그의 낯빛이 어두운 건 꼬박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탓만은 아니었다.
무스타파가 걱정스레 물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요?"
나시르는 걸음을 멈추고 아들을 돌아보았다. 아들은 눈을 내리깐 채 그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이틀 전에 이미 얘기가 끝난 줄 알았건만, 아직도 망설임을 내려놓지 못했나. 이런 유약한 녀석 같으니라고! 나시르가 어금니를 앙다물고 성난 황소처럼 콧바람을 불었다.
"흥! 그럼, 우리가 계속 저것한테 휘둘리면서 살아야겠냐? 뭔 귀신한테 홀려도 단단히 홀려서 시집도 안 가겠다는데, 평생 저거 뒤치다꺼리만 하며 살겠다는 거야?"
"그건 아니고요..."
"내가 죽고 나면 저 짐덩이는 네가 감당해야 한다. 네 가족도 건사하기 버거울 판에, 네 자식 입에 넣을 것도 모자란데 저거까지 먹여 살려야 해. 네 허리가 휘는 꼴을, 내 손자가 배곯는 꼴을 보고 내가 어떻게 편히 눈을 감겠느냐."
무스타파의 눈이 번쩍 떠졌다. 그는 아내와 아내 뱃속에 든 자신의 피붙이를 떠올렸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얼굴이 활짝 웃었고, 그의 마음속 저울은 바로 한쪽으로 기울었다.
나시르는 아들의 손을 잡고 그 위에 칼을 올렸다. 아들은 그 투박한 날붙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이내 결심을 굳힌 듯 꼭 쥐었다. 나시르가 만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이 모든 건 너와 네 가족을 위해서다."
흐뭇한 얼굴의 아버지와 비장한 표정의 아들. 두 부자는 나란히 나시르의 창고로 향했다.
"그런데 아버지, 그 사람이 돌아오면 뭐라 합니까?"
끄응. 나시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머릿속에 파티마를 아내로 삼겠다 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곧이어 그 얼굴은 그가 지불한 동전 몇 닢으로 바뀌었다.
신부가 없는 걸 알면 준 돈을 도로 내놓으라 하겠지. 뭐라고 해야 안 돌려줘도 되려나. 지난 사흘 동안 나시르는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 어쩌긴 어째. 모른 척 잡아떼야지."
"신부가 없어진 걸 알면 길길이 날뛸 텐데요. 돈도..."
"그 돈은!... 약혼의 증표로 준 거고. 약혼은 성사됐으니 그걸로 끝인 거지 뭘."
"......"
"지가 그런 계집을 고른 걸 우리 탓을 하면 안 되지."
산 넘으면 태산이겠구나. 무스타파의 시름이 깊어져만 갔다.
계집이라 하니 문득 떠올랐는지 나시르가 물었다.
"참, 네 처는 아무 문제없고?"
"네. 입덧도 몇 달 전부터 없어졌고, 이젠 잘 먹고 있어요."
"막달에 너무 잘 먹어도 안 좋은데.. 아니지, 대장부가 태어나려는 모양이구먼. 허허."
필시 아들일 거야. 암, 그렇고 말고. 나시르는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었다.
어느새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나시르의 눈에 오늘 새벽녘의 하늘은 유난히 말갛고 고왔다. 막 피어난 새벽과 곧 태어날 손자. 참으로 어울리는 징표였다.
고민 끝, 행복 시작. 즐거운 나시르의 즐거운 상상 속으로 웬 다급한 외침이 파고들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다니까요! 시집갈 거예요, 가고 싶어요!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네? 빨리요!"
나시르와 무스타파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저거.. 파티마 목소리, 아닙니까?"
"그러게. 대관절 저게 무슨 소리냐?"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굴리는 나시르와 달리, 무스타파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뒤면 아기가 나올 텐데 부정한 피를 보는 게 영 꺼림칙했거늘, 참 잘 되었다. 그는 칼을 쥔 손의 힘을 풀었다.
미리암은 딸 파티마의 몸에 묻은 먼지와 때를 닦아내고 단장을 도왔다. 제멋대로 자유분방하게 자란 딸의 머리카락이 자꾸만 하얗게 일어나고 갈라진 미리암의 거친 손가락에 걸렸다.
마치 내 마음과 같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딸이 고집을 꺾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제 아비와 오라비의 손에 죽임 당하지 않게 되어 너무 기쁘다. 하지만 이제, 그런 남자에게 딸을 보내야 한다.
오늘부터 하루라도 마음이 편할 날이 있을까. 미리암은 들릴락 말락 한숨을 쉬었다.
어미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파티마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키득거렸다.
"흠흠흠, 흐음~ 흐훗."
무슨 영문인지 딸은 하룻밤 사이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사막의 정령에게 온전히 빼앗겼던 마음을 갑자기 얼굴도 모르는 남편감에게로 돌린 것이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듯 너무나도 극적인 변화. 미리암은 그것이 아무래도 불안했다.
갈팡질팡하는 마음과 달리 부지런히 움직인 손 덕분에 단장은 이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미리암이 옷을 꺼내었다. 옷은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아도 신부로서 구색은 갖출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미리 준비할 여유가 없어 오늘 아침 며느리를 찾아가 더 좋은 옷을 해주마 약속하고 얻어 온 옷이었다. 파티마와는 썩 잘 어울리지 않는 요란한 색상. 그 위로 삐죽거리며 마지못해 내어 주던 며느리의 얼굴이 겹쳤다. 미리암은 쓴웃음을 지었다. 상을 치를 줄 알았는데 그래도 신부옷을 입히게 된 게 어딘가. 그녀는 비쩍 마른 딸의 몸에 옷을 입혔다. 며느리보다 키가 커서 그런가, 움직일 때마다 옷자락 밑단에서 발끝이 애타는 술래잡기를 했다.
단장을 마친 파티마가 보란 듯이 미리암 앞에 섰다. 해준 것도 없는데, 꽃처럼 고왔다. 뜨거운 눈시울이 눈물을 떨구려는 걸 미리암은 애써 꾹 참았다.
파티마는 감정에 복받친 어머니를 꼭 껴안았다. 고단한 세월에 젊음도 무엇도 다 뺏기고, 거친 주름만 남은 왜소한 몸을.
"걱정 마요, 엄마. 나 잘 살 게요."
기특하여라. 미리암은 억지로라도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이 딸의 앞길을 축복해 주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에.
나시르와 무스타파는 밖에 서서 신부단장 중인 여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시르는 한시도 가만히 못 있고 서성이며 뭐라고 중얼거렸다. 아버지한테 붙잡혀 집에 못 간 무스타파는 그저 임신한 아내 걱정뿐이었다.
나시르가 아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불안하다."
"... 예?"
"이상하지 않느냐.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냥 날 죽이소~' 하고 배짱을 튕겼단 말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을까?"
"그야, 막상 죽게 되니 무서웠나 보죠."
"아니야. 저게 얼마나 독한데. 전갈의 독침보다도 더 독한 계집이야. 뭔가 있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다. 그게 대체 뭐란 말이냐..."
다 잘 진행되고 있는데. 자꾸만 딴지를 거는 아버지가 자칫 일을 그르칠까 걱정이 된 무스타파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설마요. 이제 제 발로 시집도 가겠다는데, 뭐가 걱정이세요."
아들이 뭐라 하건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있던 나시르가 갑자기 짝 박수를 쳤다. 깜짝 놀란 무스타파는 입을 다물고 멀뚱멀뚱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거야!"
"예? 그거라뇨..?"
"중간에 도망칠 셈인 게 틀림없어. 그 정령이 사막에 산다지 않냐. 도망쳐서 정령한테 갈 셈인 거다!"
"아버지... 너무 상상이 지나친 거 아닐까요. 아버지께서도 정령은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 저러는 거 아니겠냐? 만에 하나 장로 영감탱이 말이 사실이라면, 진짜 사막의 정령이 있다면, 그래서 저게 그 정령을 꼬드겨 복수하러 든다면! 그럼 진짜 큰일 아니냐! "
"그럴 리가요. 그럼 진작에 그랬겠죠..."
이미 확신으로 굳어진 생각에 사로잡힌 나시르는 독에 갇힌 쥐처럼 더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곧 데리러 올 텐데, 어쩐다. 안 보내는 것도 꼴이 이상하고.. 뭣보다 우리가 안 보내겠다 하면 돈을 돌려달라 하겠지?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보내면... 만약 진짜 사막으로 도망가면 그때는... 가만, 도망?"
나시르의 눈에 빛이 번뜩였다. 그는 성큼성큼 아들에게 다가가 아들의 어깨 위에 털썩 손을 얹었다.
"좋은 수가 생각났다! 허허허!"
광기로 가득 찬 아버지의 두 눈을 바라보며 무스타파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의 손이 바지를 꼭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