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요술램프(16)

by Outis

"무, 물렀거라, 이 악령아!"


아사드가 떨리는 손으로 칼을 치켜들었다. 그러다 문득 나시르가 한 말이 생각났는지, 얼른 품에서 돌을 꺼내어 위협하듯이 마구 흔들어 댔다. 그는 다른 손에 들린 칼의 끝을 하늘로 향하고서, 눈을 꼭 감고 저 악령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간절히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너무 열심히 기도한 탓인지, 아니면 한낮의 더위 때문인지, 그의 얼굴이 금세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평소였으면 저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포복절도를 했을 테지만, 사막의 정령, 혹은 악령인 잔은 전혀 웃지를 않았다. 그는 한결같이 허탈한 표정을 짓고서 중얼거렸다.


"그렇게 쉽게 손을 빌려줄 신이면, 파티마를 구했겠지 왜 너를 구하겠냐.."


자박. 자박.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아사드가 눈을 번쩍 떴다. 두툼한 눈썹도 다 못 막을 만큼 흥건히 맺힌 땀이 주르륵 그의 눈으로 흘러들어 갔다. 짭짤한 땀 때문에 눈이 따가워서 아사드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잔이 걸음을 멈추고 팔짱을 끼며 말했다.


"왜? 땀이 눈에 들어가서 괴로워? 내가 도와줄까?"


"어..? 끄아아! 아아악!!"


고통에 찬 절규가 아사드의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의 두 안구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칼과 돌을 팽개치고 아사드는 땅에 털썩 주저앉아 미친 사람처럼 모래를 눈에 뿌려댔다. 그래도 소용이 없자, 그는 급기야 모래 속에 얼굴을 처박았다. 순간적인 기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안구는 기어이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보통의 불이라면 얼굴과 머리에 옮겨 붙어 조금은 더 빠르고 수월한 죽음을 선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잔이 만든 불은 딱 표적인 눈만 태우고서 사그라들더니, 이번엔 아사드의 두 발을 야금야금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포식자를 만난 타조같이 궁둥이를 하늘로 쳐들고 땅에 머리를 박고 있던 아사드는 발이 불타오르자 벌떡 튀어올라 데굴데굴 굴렀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또 한 번의 끔찍한 고통을 맞이한 그는 극한의 공포를 느꼈다. 악령은 그를 산 채로, 가능한 오래, 많은 고통을 주며 태워 죽일 셈인 게 분명했다.

아사드가 비명을 지르며 악령에게 빌었다.


"아아악! 잘못했ㅇ.. 아악!! 불 좀 끄..아아아아악!"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발에 붙은 불을 꺼주기는커녕, 잔은 아사드의 양손에도 불을 붙였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초를 녹이는 촛불처럼, 불은 아사드의 몸을 말단부터 갉아먹었다.


파티마를 잃은 슬픔도, 인간의 만행에 대한 분노도, 인간에게 복수하는 쾌락도 찾아볼 수 없는, 아무 감정도 읽히지 않는 표정으로, 잔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아사드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불로 아사드의 몸을 파괴하는 동시에, 잔은 치유의 마법을 걸어 그의 생명과 의식을 억지로 유지시켰다. 마지막, 폐와 심장이 타는 순간까지도 고통을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아사드의 머릿속에는 그가 평생 들은 신들의 이름과 권능, 사제들에게 헌납한 액수가 수차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 수많은 이름과 얼굴들 중 그에게 응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윽고 어느 것 하나 생각나지 않게 되고, 그의 육신은 한 줌의 재로 변해 모래와 함께 바람에 날려 흩어졌다.


첫 번째 죄의 첫 번째, 첫 살인이 끝났다.




잔은 오아시스를 만들어 나무 그늘 아래로 파티마의 시신을 옮겼다. 더 이상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축 늘어진 몸을 끌어안고서, 찬찬히 그녀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잔의 눈에 후회의 눈물이 맺혔다.


계속, 지켜봤어야 했다.


자기 손으로 딴 남자를 연모하게 만든 주제에, 그에게 가는 그녀를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그러지 말 걸. 계속 너를 지켜볼걸. 너를... 너한테 그러지 말 걸..."


설마 인간이 그 정도로 사악할 줄은 몰랐다,는 건 변명이다. 솔직히 견디기 힘들었다. 저 아사드란 작자에게 질투가 나서, 사랑한다면서 그토록 쉽게 자신을 잊어버린 그녀가 미워서. '너 따위 이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라고 생각해 버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러지 않는 건데..."


순수한 불로 만들어진 정령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한 방울. 두 방울. 툭. 투둑. 뜨거운 눈물이 차갑게 식은 얼굴을 적셨다.


그렇게 한참을 흐느낀 후, 잔이 떨리는 입술을 가다듬었다.


"... 어차피 이젠 돌이킬 수 없어."


결심이 섰다.


잔은 파티마를 땅에 반듯이 눕히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두 손을 펼치자 초록색 빛이 덩굴 식물처럼 그녀의 몸을 감쌌다. 얼굴, 목, 가슴, 팔, 손. 무자비한 아사드의 칼날이 남긴 수많은 상흔에 빛이 스며들었고, 바깥과 안의 상처가 모두 아물었다.

그다음, 잔은 가지고 있는 모든 치유의 힘을 한데 모아 그녀의 머리와 가슴에 불어넣었다. 멈춘 심장이 다시 뛰고, 괴사한 뇌세포가 되살아났다. 폐에 숨이 드나들자 파티마의 피부도 혈색을 되찾았다.


이로써 두 번째 죄, 죽은 자의 부활이 끝났다.


파티마에게서 손을 떼기 전, 잠깐의 망설임 뒤 잔은 아사드에게 죽임 당한 기억을 지웠다.


부활한 파티마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저 곤히 잠든 것같이 보였다.

그녀가 깨어나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할 터.


"... 금방 올게."


첫 번째 죄를 마무리짓기에 충분한 시간일 테다.




"지금쯤이면 처리했겠지? 어떻게, 잘 됐으려나.."


나시르는 한 자리에 가만 못 있고 서성였다. 완벽한 계획이다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일을 맡은 아사드가 일부러 와서 알려 줄 리 만무하니, 나시르로서는 파티마가 잘 제거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뒤따라 가서 확인하기도 만만치 않고, 그렇다고 아사드 그놈한테 찾아가 물어보기도 뭐 하고. 그랬다가 네 딸 없애준 값을 내놓으라 하면 어쩌냔 말이야. 이거 참..."


남편이 계속 안절부절못하는 걸 수상히 여긴 미리암은 몰래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방금 남편이 한 말을 엿듣고 말았다. 미리암은 손에 힘이 풀려 들고 있던 물병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물병이 날카롭게 조각나고, 안에 있던 물이 흙바닥을 적셨다.


"여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어? 뭐, 뭐가!"


"'딸을 없애준 값'이라뇨? 설마 당신.. 그 아사드란 작자한테 우리 파티마를 죽여달라 한 거예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요?!"


"아니, 이 여편네가 시끄럽게! 뭘 혼자 잘못 듣고 헛소리야!"


나시르가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려고 팔을 들어 올렸다. 짤랑! 허리춤에 찬 주머니에서 아사드가 준 동전이 소리를 내었다.


"그거로구나. 네가 기꺼이 판 딸의 피값이."


나시르는 깜짝 놀라 몸을 움찔 떨었다. 분명 아무도 없을 등 뒤에서 웬 남자 목소리가 들리다니. 설마,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잘못 들은 거겠지.

그런데 아내의 표정이 영 심상치 않았다. 그녀는 꼭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헉 소리를 내며 풀썩 땅에 주저앉았다.

나시르는 눈을 크게 뜨고 숨을 골랐다. 여차하면 공격할 심산으로, 그는 팔을 든 자세 그대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감히 너 따위가 나를 보려고?"


완전히 뒤로 돌기 전에 나시르의 두 눈에 불이 붙었다. 아사드가 처음에 그랬듯이, 나시르는 어쩔 줄 몰라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아악! 뜨, 뜨거워! 아파아!!"


"꺄악!"


난데없이 남편의 눈이 불타는 걸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미리암이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저 남자는 사막의 정령이며, 자신들에게 매우 화가 나 있다는 걸. 그리고 그건 아마도, 파티마에게 안 좋은 일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걸.


"너의 죄목은... 많기도 하다만, 제일 큰 건 탐욕이겠지."


남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시르의 허리춤에 달린 돈주머니가 활활 타올랐다.


"으악, 내 돈! 내 도온!"


눈이 새카맣게 타버리고도 나시르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 것 같았다. 얼른 떼서 버리면 될 것을, 뜨거워 죽으려고 하면서도 그는 돈이 든 주머니를 버리지 못했다. 어떻게든 불을 꺼보려고 필사적으로 파닥거려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보다 못한 미리암이 달려들어 남편의 허리에 묶인 줄을 이빨로 끊어내려 했으나, 나시르가 그녀의 머리를 밀쳐버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 미친 여편네가! 가서 물이나 빨리 가져와!"


과연 진짜 미친 건 누구일까. 미리암은 남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물을 가지러 가기 위함이 아니라, 불이 옮겨 붙을까 봐 피하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길은 빠르게 번져 어느새 나시르의 몸통을 핥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나시르가 뒹굴뒹굴 굴렀다.


"으아아아악!"


"아까 그놈처럼 되도록 천천히 죽여주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남자는 불타는 나시르의 몸을 아무렇지도 않게 밟고서 미리암에게 걸어갔다. 미리암은 덜덜 떨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남자, 사막의 정령을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실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장로의 말도 맞았고, 파티마의 마음도 이해가 갈 것 같았다.

그러나 동시에, 남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지금 저자는 복수에 눈이 먼 악령 그 자체였다.


남자가 미리암의 옆을 지나며 말했다.


"너의 죄목은, 무능."


그 말에 미리암은 순응하듯이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가가 파르르 떨리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양 볼에 두 줄기 눈물이 흐르고, 뜨거운 눈가보다 더 뜨겁게, 미리암의 몸이 활활 타올랐다.


두 사람에게서 시작된 불이 집 전체를 집어삼켰다.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21화요술램프(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