쏴아. 샤워기에서 깨끗한 수돗물이 뿜어져 나온다.
이렇게 따뜻한 물로 편하게 샤워를 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손잡이만 돌리면 뜨거운 물이 펑펑 나온다. 물 떨어지는 소리, 돈 나가는 소리에 심장 떨리지 않아도 된다.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감사한 사람들 덕분이다.
그러나 감탄과 감사도 잠시.
'나는 과연 이런 호사를 누릴 자격이 있는가?'하는 생각이 마음을 짓누른다.
고개가 떨어지고, 그 위로 흐른 물이 뚝뚝 떨어진다.
어째서 감사만으로 끝낼 수가 없는 걸까.
"나 충분히 쓸모 있어?"
'사랑하냐'고 묻는 대신, 난 내 효용성을 확인하곤 한다.
처음에는 무슨 그런 소릴 하냐고 질색하던 남편도 이젠 그러려니 싶은지, "응. 엄청."이라고 대답한다.
그러고도 몇 번을 더 묻고 나서야 불쑥 찾아온 불안이 조금 진정된다.
'쓸모 있으면 버림받지 않는다'. 평생 가슴에 새겨온 믿음이다.
끊임없는 인풋과 아웃풋의 저울질. 들어간 비용보다 높은 만족도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불안감에 늘 시달렸다.
이가 시큰거린다.
양치를 안 하는 게 충치의 원인이란 걸 도무지 믿지 못한 어머니 덕분에 내 어금니는 어릴 적에 진작 다 썩었다.
이빨을 때우러 혼자 치과에 간 나는 불과 초등학생이었다. 아말감 크라운을 씌운 후, 원래 이빨 모양대로 긁어내야 하니 다시 오란 말을 듣고 나왔다.
또 가면 돈을 내야 할까 봐 난 가지 않았다.
대신 혼자서 열심히 이빨을 갈아댔다. 거친 표면에서 조금씩 떨어져 나온 아말감 조각을 꿀꺽꿀꺽 삼켰다.
끝까지 부모님에게 하지 못한, '나 돈을 아꼈어요. 잘했죠?'라는 자랑과 함께.
알고 보니 아말감엔 수은이 들었다 한다. 정말이지 멍청한 짓을 했다고, 어른이 된 나는 어린 나를 욕했다.
수은이 안 들었으면 그런 생각도 안 했을 거 같다.
성인이 되어서도 별로 달라진 건 없었다.
전화기 화면에 나 보라고 '내 입에 들어가는 먹이도 아깝다'는 문구를 적어놓고 다녔다.
대학 친구가 그걸 보곤 기겁을 하면서 날 혼냈다. '그게 어때서'하고 나는 멀뚱멀뚱 그녀를 쳐다보았다.
누군가 그런 날 이렇게 불렀다. '지독한 년'.
지독할 정도로 스스로를 증오하며, 그걸 원동력으로 살아온 나.
음양의 조화 같은 게 아니라, 생과 사가 서로 잡아먹을 듯이 투쟁하며 굴러온 삶.
적절한 긍정과 부정 속에서 발전한 것이 아니라, 무작정 때리고 맞기만 해 구부러진 자아.
나름 지독하게 살았는데.
그다지 쓸모는 없는 거 같다.
또 칼에 손을 베었다.
키친타월로 상처를 감싸 쥐고 스스로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계속 손에 물을 묻혀야 하는 주부에게 손의 상처만큼 귀찮은 것도 없으니까.
머리에 안개가 낀 것처럼 정신이 맑지 않은 날은 꼭 이런 실수를 한다. 이젠 패턴이지 싶다.
생활의 상당 부분을 무의식적인 오토매틱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건만. 어째 그 시스템이 요새 영 못 미덥다.
어찌어찌 부엌일을 마치고 샤워를 하는데 머리카락이 뭉텅 빠졌다.
손가락에 붙인 반창고가 물에 젖어 끝부분이 떨어지면서, 끈적한 접착부에 머리카락이 달라붙었다.
"쯧, 성가시게."
덜렁거리는 반창고를 쑥 빼서 머리카락과 함께 쓰레기통에 버렸다. 다 씻고 나서 보니 수건에 피가 묻어 있었다. 손가락 상처에서 다시 스멀스멀 배어 나온 피였다.
"갈수록..."
점점 더 쓸모가 없어진다.
어디서 봤더라.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이상해져서 자기가 가사로봇이라 믿기 시작한 여자.
죽기 직전 그녀는 자신이 모시던 주인들(실은 이쪽이 로봇이었다)에게 물었다.
"저는,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었나요?"
눈물을 글썽이며 그렇다고 대답하는 주인들에게 미소 지어 보이며, 그녀는 행복하게 세상을 떠났다.
부러웠다.
그게 어디서든, 언제든, 내 마지막 말 또한 저와 비슷하겠지.
"나는, 쓸모가 있었나요?"
제발 그렇다는 대답을 듣기를 바라면서, 예의 그 비겁한 미소를 띠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