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요술램프(20)

네버 엔딩 스토리

by Outis

너에 대해 알려했다. 짜릿한 엔딩을 위해, 마지막 순간에 최고의 절망을 네게 안겨주기 위해서.


막상 알게 되었을 땐 아무 감흥이 없었다. 그저 빨리 다음 인간으로 넘어갔으면 했다.

너를 어떻게 하든. 너야 어떻게 되든. 잘라낸 페이지처럼, 없었던 일로 치고서.


그랬는데.



<시간을 넘어, 그들의 운명이 맞닿은 곳>


"마지막 소원이야."


"자, 잠깐만..!"


이 인간이 갑자기 왜 이렇게 서두르는 거야. 소원 빈다면서 칼은 또 왜 꺼내 드는데?

어째서 네놈 다리에 내 문양이 있는지, 난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일단은 허튼짓 못하게 저 칼부터 빼앗아야 한다.

나는 녀석의 자세, 동작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다행히 놈의 팔과 손은 힘이 없어 보였고, 약간의 충격만 가해도 칼을 놓칠 듯했다. 시선도 지금은 내가 아니라 아래로 향하고 있어서, 재빨리 달려들면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일어나서, 몸을 날려, 칼을 뺏고, 진압한다. 좋았어.'


칼까지의 거리와 높이, 손잡이와 날의 방향을 머릿속에 새기고서, 수십 개의 시뮬레이션 중 최상의 시나리오 하나를 골라냈다. 그리고 마침내 실행을 위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너는,"


"?!"


녀석의 목소리가 마치 주박처럼 날 옭아매었다. 온몸이 쇠사슬로 감긴 것같이 꼼짝하지 않았고,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눈뿐이었다. 나는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서, 주절주절 읊조리는 그의 입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목숨과 마음을 유린한 죄로 램프 속에 갇힌 죄인. 그러고도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계속해서 수많은 인명을 해쳐왔어. 그런 너를 그냥 둬서는 안 되겠지?"


놈이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주박은 더욱 세게 나를 휘감았다.


"네가 더 이상 그 누구도 헤치지 못하도록, 내가 끝을 내겠어."


그의 눈길과 칼끝이 나를 향했다. 커다란 갈색 눈이 굳건한 다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저 눈빛, 닮았다. 꼭 살아야겠다고 떼를 쓰던 그 눈과.

그랬구나. 진작 알아봤어야 했는데. 볼 때마다 왠지 짜증 난다 싶었을 때, 알아봐 줬어야 했는데..


이제야 알겠다. 전 주인들을 모조리 죽여도 내 능력이 지금껏 그대로였던 이유. '너희들 그렇게나 나한테 감사했던 거냐?'하고 비웃었는데, 그게 아니었어.

운명은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내게 가장 무서운 벌을 내릴 수 있는 때를. 제일 무거운 철퇴를 들어 올려줄 손이 나타날 순간을.


영력도 변변찮은 한낱 인간이 날 이렇게 묶어둘 수 있는 까닭. 그건 저 녀석이, 휘가 파티마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그에겐 내가 저지른 죄의 대가를 요구할 권리가, 나를 단죄할 자격이 충분하다.


- 반드시 살아서, 나한테 복수하러 와. 알았지?


'그래, 내 말대로 했구나. 너는 살았구나. 그래서 이렇게 오래, 돌고 돌아서 결국은 날 찾아왔구나...'


내 짐작이 맞았다는 걸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황금색 실이 휘에게서 내게로 이어졌다. 죄를 짓고 영력이 감소한 탓에 그간 보이지 않았던 업보의 실이었다.

나는 휘가 겨눈 칼을 보며 생각했다. '싫지 않다'. 언젠간 소멸당할 거라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기왕이면 파티마의 피를 이어받은 자의 손에 끝나는 게 낫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건.


'라미엘, 이 빌어먹을 자식. 이용해 먹을 게 따로 있지..!'


예나 지금이나, 끝까지, 고결한 척 뒷짐 지고 서서 우릴 장기짝처럼 이용해 먹는 그들이다.

그래도... 명색이 천사인데 써먹고 나서는 뒤를 봐주려나 싶은 기대가 조금 생긴다.


'꼴도 보기 싫은 이 골칫덩이를 없애주지 않습니까. 저 인간 좀 잘 돌봐 주쇼.'


나는 눈을 감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참 길고도 꼴사나운 생이었지. 지쳤어. 다 그만하고 싶다.

휘이잉. 모래가 우는 소리에 휘의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소원이야. 지금부터 넌 인간에 대해 일절 관여하지 말고, 램프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의 몸이 되어 줘."


...... 뭐라고?

바람 소리 때문에 잘못 들었나 싶어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주인 녀석이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알고 보니 너 참 못된 녀석이라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싶은데, 내가 할 일은 아닌 거 같아. 그러니까 집으로 돌아가면 알아서 반성도 좀 하고 그래."


날 친친 감고 있던 속박이 풀리고, 몸이 붕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휘의 눈이 살짝 커졌다가, 다시 휘어졌다.


"고마웠어. 램프에 안 들어가고 쭉 같이 있어줘서. 비록 네가 사람은 아니지만, 누군가와 뭘 해본 게... 나 진짜 오랜만이야."


위로, 하늘로 몸이 뜬다. 땅이 점점 멀어진다. 녀석의 모습이 작아져간다.

손, 발, 팔다리. 내 모습이 사라져 갔다. 그러자 밑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라면, 같이 먹어줘서 고마워!"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비싸고 불편한 데만 가지 말고, 포크 나이프 순서 따위 따지지 말고, 매너 없이 좀 지저분하게 굴어도 괜찮은 곳으로 가는 거였는데.

명품이니 뭐니 쇼핑하러만 다니지 말고, 네가 가보고 싶은 곳도 가 볼걸. 데스밸리 관광지 좀 둘러보자 할 때 괜히 못 들은 척 고집 피우지 말걸.


내가 아니라 너를 좀 더 볼걸.



사막과 밤하늘이 한데 녹아내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정령의 모습은 사라지고, 눈물 두 방울만이 남았습니다. 반짝이는 눈물은 하늘에서 떨어져, 별이 되지 못하고 모래 속에 삼켜졌습니다."


끄읕~ (탁.)


네? 이게 뭐냐고요? 뭐긴요, 이 이야기의 엔딩이죠.


하하, 여러분.. 아무래도 이번 이야기가 너무 길어서 잊으신 거 같은데요. 여긴 인간과 인간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비추는 이야기, "The Dark Side of..."랍니다.


요술램프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말씀드렸죠? 결말은 여러분의 상상에 따라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다고요.

예를 들어보라고요? 음~


1. 휘의 소원대로 자유를 되찾은 정령씨는 사막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휘는 데스밸리에서 최후를 맞이한다.

2. 정령씨가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고 휘에게 돌아와 그를 구하지만, 그 대가로 정령씨는 사라진다.


뭐 대충 이런 거요.

둘 중 어느 쪽을 끝낼지, 선택은 여러분께서 하시면 됩니다. 무엇을 선택하시든 해피 엔딩 따윈 없으니 안심하시고요.


그럼, 여러분의 선택은...?



... 어?


(휘리리릭~)


말도 안 돼. 어째서?


덮은 책이 제멋대로...?





"여긴, 내 집?"


2천 년 전에 살았던 집으로 돌아왔다.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25화요술램프(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