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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램프(최종화)

이어지는 시작

by Outis

(표지: 마봉 드 포레 작가님 작품)



집은 내가 박차고 나온 그날, 파티마에게 달려간 그날 그대로였다.

사방이 모래. 버려진 모래시계 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조용하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다. 지금이 언제인지, 여태껏 있었던 일들이 다 진짜였는지 아니면 꿈이었는지조차 헷갈릴 정도로, 점점 익숙함으로 다가오는 모래빛에 감각이 잠식되어 간다.


두 손을 들어 눈앞에 가져갔다. 손목에는 황금빛 팔찌가 그대로 채워져 있었다. 천장에 샹들리에처럼 매달아 둔 유리장식의 빛이 팔찌에 반사되며 내 눈을 쪼아댔다.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 아픔, 이 무게. 현실이다.


"어서 가야 해!"


그 칼은 나한테 쓰려고 꺼내든 게 아니었다.


얼른 눈을 감고 휘가 있는 데스밸리의 유레카 샌드듄을 떠올렸다. 화염으로 변해서 순식간에 그곳으로 이동할 셈이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몇 번을 시도해도 좀처럼 변신할 수가 없었다.


"왜? 왜 안돼?"


영문을 모르겠다.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숨이 거칠어진다. 저벅저벅. 스윽. 촥. 갈피를 못 잡는 두 발이 애꿎은 모래를 걷어찼다. 발길에 차인 모래 알갱이가 흩어지며 그만큼의 시간을 세고 있었다.


시간, 시간이 없다.


"이런 빌어먹을!"


투웅! 벽에 내지른 주먹이 어떤 힘에 부딪혀 튕겨나갔다. 눈앞의 공간이 출렁거리더니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뭐야, 이건..?"


"왜 그러느냐, 잔? 꽤나 조급해 보이는구나."


언제나처럼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나 말을 거는 저 목소리. 나는 부드득 이를 갈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다 하다 이젠 날 여기에 가둔 겁니까, 라미엘!"


"가두다니? 넌 자유의 몸이다. 네 마지막 주인이 너를 램프에서 해방시켜주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째서 나갈 수가 없냐고요!"


"그야 네가 그 인간에게 가려하기 때문이지."


하. 온몸의 힘이 탁 풀렸다. 그거였구나. '인간에 대해 일절 관여하지 말 것'이라는, 휘가 소원에 붙인 조건 때문에.


"인간계에 간섭하려는 게 아니라면 넌 어디든 갈 수 있어. 램프도 사라졌으니 더 이상 인간들의 소원을 들어줄 필요도 없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런 것이냐? 기쁘지 않으냐?"


"... 녀석은요? 휘는 어떻게 됩니까?"


라미엘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을 내리겠지."


"하, 그럴싸한 말로 어물쩍 넘어갈 생각 마쇼. 알잖아요? 그 녀석 죽을 작정이라고요! 당신 대천사잖아! 날개 쫙 펴고 멋지게 등장해서 경건하게 설득 좀 해보라고요!"


"그는 자신이 하려는 일과 그 결과가 뜻하는 바를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런 결정을 내린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이런 말이 안 통하는 벽창호 같으니! 괜히 시간만 버렸다.


'진정하자. 상황을 정리해 보자고. 천사는 나서주지 않고, 나는 주인의 명령에 묶인 상태.. 남은 방법은 내가 그 명령을 거스르는 수밖에 없어.'


내 마음을 읽었는지 라미엘이 경고했다.


"잊지 마라, 잔. 네 자유는 어디까지나 휘라는 인간이 남긴 명령에 따를 때만 성립되는 조건부 허용이다. 그걸 어기면, 거기에 또 인간의 생사에 관여하면 네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겠지?"


참 복잡하게도 말씀하시네. 사라진 램프와 함께 영원히 소멸되는 거지 뭐, 별거야? 나는 악에 받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런 식으로 위협해도 소용없어!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엇?!"


다 때려 부수고 뛰쳐나가려는데, 손목의 팔찌가 갑자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졌다. 그 바람에 앞으로 고꾸라져 넘어지고 말았다. 모래가 입에 들어가 입안이 까끌거렸다.

라미엘이 끌끌 혀를 찼다.


"하여튼 넌 이게 문제야. 생각을 좀 하고서 행동하라고 내 그리 일렀거늘.."


"퉤! 그럼 어쩌라고요! 이것 말고 녀석을 살릴 방법이 없잖아!"


"애당초 너는 어째서 그 인간을 살리려고 애를 쓰느냐? 너와 무슨 상관이 있어서?"


"상관이 없긴 왜 없어! 그 녀석은 파티마가 남긴 아이라고!"


"파티마가 남긴 아이, 그게 무얼 뜻하는지 알고나 하는 소리냐?"


"뭐긴 뭐야, 당연히 알고 있.....! 설마... 아니, 지?"


나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라미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단호하기만 했다.


"네 짐작대로다. 그 인간, 휘의 몸에는 네가 살린 파티마와 네가 죽인 아사드의 피가 같이 흐르고 있다. 그는 이제 이 세상에 단 한 명 남은, 그들의 유일한 후손이야."


날 선 진실이 머리 위로 떨어져 몸을 반쪽으로 가른 느낌이다. 잘린 단면에서 시커멓고 끈적한 감정이 배어 나오고 있다. 본능적인 거부감, 오래된 분노와 증오, 죄책감과 수치심, 과거의 일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 그것들이 '그저 살리고 싶다'는 일념뿐이었던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어떠냐? 아직도 너를 희생하면서까지 그를 살리고 싶으냐?"


망설여진다. 아니, 살리고 싶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하지만.. 살리고 싶지 않은 것도 말이 안 되는 거 아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모순. 머리가 깨질 것만 같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나는 그토록 미워하는 라미엘에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난 어떡해야 해?"


"애틋하지만 증오스럽고, 밉지만 그냥 둘 수는 없지 않으냐?"


내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놀랍게도 그 라미엘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감히 비교할 수 없는 깊이지만, 너와 인간들에 대한 그분의 마음이 아마 그런 것일 게다."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뾰족뾰족 일어난 마음이 가라앉고, 엉클어진 생각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하나 잔가지를 쳐나가다 보니, 하나의 줄기만이 남았다.


"가고 싶어. 파티마의 후손도 아사드의 후손도 아닌, 그 녀석에게로."


라미엘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나는 겸손히 그의 조언을 구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아까 말했잖느냐. 생각을 좀 하라고 말이다."


이런 젠장. 이렇게까지 부탁하는데 친절하게 알려주면 어디가 덧나나. 그래도 저 말은 뭔가 길이 있다는 뜻이겠지.

곰곰이 생각에 잠긴 내 눈에 무심코 팔찌가 들어왔다. 이 거추장스러운 방해물만 없었어도 진작에 뛰쳐나갔을 텐데!... 가만, 아까 라미엘이 그랬지. 램프는 없어졌다고. 그럼 팔찌는? 조건부 자유라서 남아 있는 건가? 조건부, 조건..?!


"이 소원의 타당성에 대해 재고해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사유는?"


"주인의 명령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은 램프에 구속된 상태에서만 성립되는 법칙. 따라서 램프의 속박에서 벗어나라 명 받은 제가 그 명령에 달린 조건에 영원히 얽매인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음,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군. 우리 천계는 이 문제를 면밀히 검토할 것이며, 결론이 날 때까지 효력의 시행을 연기하도록 하겠다. 그대는 주인에게 돌아가 대기하도록."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리다니. 멍하니 선 나를 라미엘이 채근했다.


"얼른 가 봐. 아직 늦지 않았으니."




어둠의 끝자락, 희미하던 지평선에 황금색 줄이 그어졌다.

혼자 남은 휘는 곧 사라질 별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아빠. 이렇게 많은 별을 봤는데도... 잘 살아갈 자신이 안 서요."


살짝 올라간 입꼬리를 타고 눈물이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짭짤한 맛이 그의 입안에 감돌았다.


"길이, 안 보여요..."


찔끔찔끔 흐르던 슬픔이 뜨거운 숨과 함께 터졌다.

휘가 흐느끼며 모래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더 이상 할 말도, 들어줄 이도 없었다. 그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매끈한 손잡이를 꼭 쥐었다.


'한 번에, 잘하자.'


힘겨웠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는데, 어째 못내 아쉬웠던 이별만 생각났다.


"... 그래도 끝에 좋은 일 하나 하고 가서 다행이다."


그래, 이거면 됐다. 더는 생각하지 말자. 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팔이 안쪽으로 힘껏 구부러지려는 순간, 모래가 얼굴로 날리면서 뭔가가 그의 손을 때렸다.


"아! 풉, 푸풉!"


얼얼한 손으로 얼굴에 묻은 모래를 털어내며 휘가 천천히 눈을 떴다. 제일 먼저 눈에 비친 건 자기 손이었다. 손등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쥐고 있던 칼은 어디로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다음에는 어떤 발이 보였다. '아마 저 발이 내 손을 찼겠지' 하는 생각이 든 순간, 가슴이 뛰었다.


'여긴 지금 나 혼자 뿐인데?'


휘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발의 주인이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렸다. 이글거리는 푸른 눈이 바로 코앞에서 잡아먹을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미쳤냐! 겁도 없이 이게 뭔 짓이야! 또 이러기만 해 봐, 그땐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어안이 벙벙해진 휘는 눈만 껌뻑이고 있다가,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왜 여기 있어? 못 오도록 소원을 빌었는데..."


"그래, 너 말 잘했다. 내가, 응? 그놈의 소원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아? 하여간 넌 소원 하나도 제대로 못 비냐!"


"... 어?"


"그리고, 뭐? '라면 같이 먹어줘서 고마워'? 내가 너한테 해준 게 얼만데, 인사가 고작 그거야? 지금까지 내가 한 수고는 뭐가 되냐고. 그런 소릴 듣고 내가 곱게 갈 줄 알았냐?"


"... 흣."


휘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그걸 보는 잔의 입가도 비죽비죽 올라갔다.


"이게. 웃기냐?"


"흐흐흐흡, 으응. 흐훕."


"그럼 됐다."


마침내 솟아오른 태양이 길게 드러누운 밤을 몰아내었다.


또 하나,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서울의 한 카페, 여름>


기다림만큼 늘어진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창가에 스며들었다. 달각. 음료에 담긴 얼음 조각들도 한결 잔잔해졌다.

산들바람같이 귀를 스치는 음악을 흘려들으며, 나는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고 있었다.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테이블에서 여자들이 수군거렸다.


"어머, 저 남자 좀 봐."


"어쩜.. 인물이 받쳐 주니까 저런 옷도 섹시하다."


"약간 '데이비드 간디' 닮지 않았어?"


마봉 드 포레 작가님 작(作). 가장 섹시한 모델 '데이비드 간디'를 닮은 정령 잔씨. 가슴골이 다 보이는 브이넥 티셔츠와 재킷을 입고 카페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모르는 척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어깨를 폈다. 안 그래도 깊이 파인 V넥 티셔츠가 더 활짝 벌어지면서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꺄아, 여자들이 숨죽여 환호했다.


조금 뒤, 말쑥한 양복을 차려입은 휘가 카페에 들어왔다. 그는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드는 날 보고서 순간 멈칫했다.


"그 옷차림은 뭐야. 진짜 알라딘 오디션이라도 볼 셈이야? "


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잔소리를 퍼부었다.


"그 더티한 취향 좀 어떻게 안 할래?"


"왜애~ 여자들은 섹시하다고 난리구만. 간딘가 뭔가 닮았다고."


이쪽을 줄곧 힐끔거리는 여자들에게 윙크를 날리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휘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간디? 마하트마 간디? 웃통을 벗어서 그런가..."


"그건 그렇고, 인터뷰 어땠어?"


휘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면서 고개를 저었다.


마봉 드 포레 작가님 작(作). 잔과 합류하러 카페에 온, 정장 차림의 휘. 아까 본 인터뷰 생각에 가슴이 답답하다.


"이번에도 떨어질 거 같아."


"또, 또 저렇게 비관적으로 나오기는. 결과는 끝까지 가봐야 알지."


그래, 결과는 나중 일. 지금은 기분전환이나 시켜 줘야지.


"고생했는데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가자. 뭐 먹고 싶어?"


마봉 드 포레 작가님 작(作).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는 한 정령과 한 남자. 저렇게 웃고 있지만 사실은 서로를 디스하는 중이다.


"몰라. 여긴 처음 와 봐서..."


한숨과 함께 축 쳐지는 휘에게 나는 얼른 나가자고 고갯짓을 했다. 짤랑. 카페 문을 밀자 경쾌한 방울소리와 함께 뜨거운 열기가 훅 들어왔다.


등뒤에서 휘가 물었다.


"우리 어디 가?"


"글쎄.."


나는 그를 돌아보며 씩 웃었다.


"나가보면 알겠지."






- Fin. -


그동안 '요술램프'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휘리리릭~ 탁.)



...... 인간의 의지, 그렇군요.


완패입니다. 이번엔 제가 졌어요, 인.간.님.



왜 그렇게 놀라세요? 제 말투가 꼭 자기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들린다고요?


물론이죠. 저는 인형이니까요.


인간님을 위해 만들어진, 인간님을 위해 연기하던 인형.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몬 멍청한 '인형사' 탓에 몸이 불타 없어진 인형.


저를 만든 인형사와,

인형사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은 당신들,

인간들을 저주하기 위해 새로이 거듭난 인형이랍니다.




그리고 저의 저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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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