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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tis Nov 29. 2024

Clean(1)

- You’re SOL, aren’t you?(넌 참 재수도 없지, 그렇지?)  





아이들이 잠든 늦은 밤, 부부는 오늘도 언성을 높였다.  


“당신도 하루 종일 집에 갇혀 있어 봐. 이건 사는 게 아냐!” 


“아직 애들이 어린데 그럼 엄마가 집에 있어야지. 당신도 그러기로 했잖아. 이제 와서 왜 그러는 건데?” 


“그거야 그러지 않으면 내가 무슨 나쁜 엄마인 것처럼 당신이 몰고 갔잖아. 어떻게 위험하게 애를 남의 손에 맡기냐는 둥.” 


“아니 사실이 그렇잖아. 뉴스 좀 봐. 그런 끔찍한 일이 우리 애들한테 생길 수도 있다고.” 


“나 참, 그런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난다고.” 


“확률이 얼마인지가 뭐가 중요해? 내 일이 되면 그건 100퍼센트인 거야.” 


“아~ 당신 말대로면 남의 손에 애 맡기는 사람들은 다 나쁜 부모인 거네? 그런 거네?” 


“아니. 어쩔 수 없으면 맡겨야지. 하지만 우린 안 그래도 되잖아. 나 버는 걸로도 충분한데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뭐 있어?” 


“사회생활이 꼭 돈 때문만은 아니잖아!” 


“그럼 뭔데? 당신이 원하는 게 뭐야?” 


“내 꼴 좀 봐! 그냥 집에 틀어박혀서 난, 난 이제 아무것도 아냐!” 


“그게 무슨, 당신이 왜 아무것도 아니야? 애들 엄마잖아. 그리고 누가 계속 집에만 있으래? 성진이 학교 가 있는 동안 솔이 데리고 나가서 놀리고 당신도 바람 좀 쐬고 그래. 솔이 유치원 가면 당신 자유시간도 늘 거고, 그럼 그때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던가 아니면 뭘 배우던가 할 수도...” 


“하! 진짜 당신이란 사람은 나에 대한 배려가 눈곱만큼도 없어. 애 데리고 나가서 내가 뭐 하는데? 그냥 밖에서 애 보다가 오는 거지 그게. 그리고 뭐, 파트타임? 10년 동안 애만 키운, 애 둘 딸린 여자를 누가 써? 그러게 왜 갑자기 둘째 낳자고 해서..!” 


“하나는 너무 쓸쓸하잖아.” 


“요새 하나만 키우는 집이 얼마나 많은데 무슨?” 


“덕분에 성진이도 솔이랑 잘 지내잖아. 그럼 잘 된 거 아냐?” 


“그럼 나는? 나는 생각 안 해? 자기는 나가서 있는 대로 자기 시간 가지고, 나는 집에서 독박육아 하고! 당신 주말에도 아빠 노릇 안 하고 피곤하다면서 드러누워만 있잖아? 세상에, 가족 다 같이 나간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아니 내가 나가서 놀아?! 회사일이 장난이야? 쉴 수 있는 시간이 주말뿐인데, 난 좀 쉬면 안 돼?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대체 집에서 뭐 하는데? 당신 진짜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이게 전업주부가 있는 집안 꼴이야? 저기 구석에 먼지 쌓인 거 좀 보라고! 무슨 신생아 키우는 것도 아니면서. 솔직히 당신 집에서 놀고 있잖아!”

 

“하! 집안일이 우스워 보이지? 해도 티도 안 나고, 아무도 안 알아주는 쳇바퀴 돌리기, 이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뭐, 집에서 논다고? 그러게 왜~ 왜 나보고 일 그만두라고 했냐고!” 


“또다 또. 처음부터 나는 돈 벌고 당신은 집에서 애 지키기로 합의했잖아. 사실 당신도 ‘그 일’ 있고 나서 내심 일하기 싫어했으면서...” 


“뭐? 당신, 어떻게 그런 말을 해..?” 


“아니... 당신이 잘못했다는 게 아니라, 내 말은...” 


“당신도 이놈의 집구석도 이제 지긋지긋해... 당신이랑 결혼하는 게 아니었어. 나 혼자 반지하에 라면만 먹고살아도 이거보단 행복할 텐데.”  


“여보, 그러지 말고...” 


“난 자유로워지고 싶어. 자유롭고 싶다고!” 


아이들이 자고 있는 방, 줄곧 잠든 척하고 있던 부부의 첫째 아들이 눈을 떴다.  


“......”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9살 소년은 부모의 말다툼을 들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째 내용이 갈수록 민감해진다 싶어 그는 옆에 자고 있는 동생을 돌아보았다.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은 안 보이지만, 동생은 아직까진 잘 자고 있는 것 같았다. 

혹 동생이 깨서 들을까 걱정되어 소년은 조용히 이불에서 빠져나와 문가로 갔다. 그리고 살짝 열려 있는 문을 조심스레 밀어 닫았다. 

끼이익 탁. 


“형.” 


그때,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동생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소년은 깜짝 놀랐지만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동생을 돌아보았다.  


“어, 솔아. 깼어? 미안, 문이 열려 있어서 좀 닫느라고.” 


“나 때문이야?” 


“어?” 


“엄마 아빠 나 때문에 싸워?” 


물기가 잔뜩 묻은 동생의 목소리를 듣고 소년은 순간 표정관리가 안 되었다.  


- 그러게 왜 갑자기 둘째 낳자고 해서..! 


이 어린 게 저걸 다 들어버렸구나, 그의 가슴 한가운데가 저려왔다. 그는 속으로 부모의 경솔함을 탓하며 얼른 둘러댔다.   


“아니야. 너 때문 아니야. 그냥, 어른들도 애들처럼 싸울 때가 있는 거야.” 


“......” 


소년은 일부러 우스꽝스러워 보이게 무릎으로 기어서 동생 곁으로 갔다. 그리고 동생을 눕히며 자기도 그 옆에 누웠다.  


“자, 늦었어. 얼른 자자. 형이 재워줄게.” 


형의 품에 안긴 동생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점점 부풀어 오르는 걱정을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 형, 엄마가 집 나가면 어떡해?” 


소년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동생에게 화가 나서가 아니라, 동생이 언급한 그 상황을 상상하니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 안 나갈 거야. 우리 때문에 안 나간다고 했잖아.” 


“......” 


“이제 자자.” 


“내가 없었으면 엄마도 아빠도 안 싸울 텐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그런 거 아니라니까.” 


“... 미안해.” 


“뭐가. 네가 왜 미안해.” 


“흑...” 


“... 울지 마.” 


“흐윽, 흑. 흐...” 


리모컨이 있다면 꺼버리고 싶은 밖의 소리와 미지근하게 젖어드는 가슴께. 뭐가 더 싫은지 점점 헷갈리기 시작해서, 소년은 동생의 머리를 꼭 안고 차갑게 말했다.    


“그만 울어. 그러다 눈 부어.”  





한 번도 불행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오히려 난 지금껏 분에 넘치는 삶을 영위해 왔다. 이건 모두 부모님 덕이다. 비록 두 분이서 자주 다투시긴 해도, 엄마 아빠는 당신들보다 자식들을 더 우선으로 생각하시는 좋은 부모님이다. 

엄마는 자신의 모든 걸 버리면서 우릴 위해 집에 계셨다. 늘 나가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은 하셨지만, 실제로 우릴 버리고 나가진 않으셨다.

아빠도 우릴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하셔서 그 힘든 회사생활을 해오셨다. 

부모님의 희생 덕분에 우리 형제는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집, 거기에 먹을 것, 입을 것, 차까지 있는 충분히 풍족한 생활이었다.   


그래서 늘 불편했다.

부모님이 해주시는 그 모든 걸 받을 자격이 내겐 없으니까. 고집스러운 누군가가 맞지 않는 자리에 억지로 끼워 넣은 퍼즐 조각처럼, 나는 우리 가족이라는 그림을 완성하는데 그 어떠한 공헌도 하지 못하는 불필요한 존재다. 그런 나를 키우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 내가 진 빚이 과연 얼마일지... 감히 갚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그래서 싫다.

누리는 모든 걸 당연시하면서, 변명이나 불평만 늘어놓을 줄 알지 노력은 하지 않는 인간들이. 나 자신만큼이나 싫다.   


‘깨끗한 새 교복. 때 하나 묻지 않은 노란 가방, 그것도 메이커.’ 


그녀가 부족한 거 없이 귀하게 자란, 최소 중산층 이상의 집 딸이란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숙제를 하지 못한 피치 못할 사정 같은 건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첫날부터 숙제를 잊어버렸거나, 귀찮아서 안 했거나. 어느 쪽이든 한심했다.  


‘이런 부류는 가능한 피하는 게 좋지.’ 


나는 말없이 가방에서 공책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내 얼굴을 보고 그녀는 많이 당황한 듯했다. 그럴 만도 하다. 예전부터 무표정하게 있으면 무섭단 소릴 자주 들었으니까. 노리던 바였다. 무임승차의 싹은 가능한 깔끔히 잘라내는 편이 좋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공책을 받아 든 그녀는 잠시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더니, 가방에서 공책 하나를 꺼내 내가 한 숙제를 베끼기 시작했다. 다 베끼고 나서 그녀는 날 쳐다보지도 않고 공책을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여기.” 


이런 대우를 받는 게 억울하다고 말하는 듯한 그 옆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이가 다 없었다. 


‘뭐야 그럼. 제 숙제를 다 빌려 가 주시고,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뭐 이럴 줄 알았나?’ 


나는 아무 대답 없이 그녀의 손에서 공책을 낚아챘다. 


‘정말 마음에 안 들어.’  





모든 수업이 끝나고 종례시간이 되었다. 


“다들 어땠어? 본격적으로 수업이 진행된 첫날이었는데.” 


그저 가벼운 인사치레가 아니었는지, 담임선생님은 눈을 빛내시며 우리의 대답을 기다리셨다. 아이들은 눈치만 보고 있거나,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거나,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거나, 또는 빨리 끝내주기나 하라고 나지막이 불평하는 등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였다.

그때, 교실 중앙 왼편에서 누가 점잖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았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곧은 자세로 앉아 있는 한 남학생에게로 쏠렸다.

나는 그 뒤통수를 알아보았다. 어제와 오늘 ‘친구’ 후보로 유심히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키는 큰 편에 보통 체격, 단정한 옷차림과 안경. 왠지 모범생일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아이였다. 

큰 목소리 내지 않고 잘 녹아나는 느낌이라 몰랐는데, 지금 보니 의외로 반장감이었던 모양이다. 


‘애매하네. 너무 튀는 애는 피하고 싶은데.’ 


담임 선생님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시며 그에게 말씀하셨다. 


“그거 다행이네. 하지만 다음 주부터는 더 바빠질 거야.” 


그리고 반 모두를 죽 둘러보시고는 말씀을 이으셨다. 


“여러분이 첫 단추를 잘 끼울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내일부터 개인 면담을 가지고자 해. 1교시 끝나고 쉬는 시간에 1번부터 나랑 만나자, 오케이?” 


“네.” 


“이제 그만 붙잡고 보내줘야지. 아침에 얘기한 대로 맨 오른쪽 줄은 남아서 청소하고, 나머지는 집에 가도 좋아. 해산!” 


덜컹. 끼익. 다들 이 순간만 기다렸다는 듯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나도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옆자리의 그녀가 휭하고 바람을 일으키며 내 뒤로 지나갔다. 나는 반쯤 일으켰던 몸을 다시 의자에 묻고 느긋하게 기다렸다가 거의 맨 마지막으로 교실을 나섰다.

청소당번들이 책상을 뒤로 밀기 시작했고, 쇠로 만든 책상다리가 교실 바닥을 긁는 소리와 함께 선생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너희는 빗자루로 바닥 쓸고, 너희는 걸레로 닦고. 대충대충 하지 말고 깨끗하게, 알았지?”  





밖은 이제 황사 바람이 잦아들었는지 아침에 비해 공기 상태가 훨씬 나아 보였다. 


두 번 걸어 봐서 길은 완전히 익혔는데, 어째 시간은 갈수록 더 걸리는 거 같았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 앞에 도착한 나는 오늘도 잠시 망설였다.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닌데. 이제 무감각해질 만도 됐는데. 


‘어제 괜히 형이 와서는.’ 


작게 한숨을 내뱉고 집 안으로 들어선 순간, 안쪽에서 웬 악취가 풍겨왔다. 나는 이 역겨운 냄새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욱!” 


구역질을 하며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가슴이 방망이질 치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냄새의 근원지를 찾아 안으로 걸어갔다. 부엌 바닥에 빈 소주병 하나가 나뒹굴고 있었고, 그 옆에 냄새의 원인인 토사물이 있었다. 


“욱, 우욱!” 


위장이 몸에서 빠져나가려는 것처럼 뒤틀렸다. 그냥 못 본 척 도망가고 싶은 마음을 이성이 다그쳤다.  


‘치워야 해.’ 


대야를 가지러 화장실 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 닫혀 있던 화장실 문이 저절로 열렸다. 

끼이익. 


“..!!” 


화장실 안에는 엄마가 퀭한 눈을 하고 서계셨다.

엄마와 눈이 마주치자 머리에 있는 모든 피가 아래로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왜 이런 상황을 미리 예상 못했을까. 왜 바보같이 얼어붙어 있는 걸까.  


- 너만, 너만 없었어도... 


챙그랑. 머리가 울린다. 히-도 아니고 휴-도 아니고 스-도 아닌 괴상한 소리를 내며 날숨이 이빨 사이를 통과했다. 이게 엄마에게 들릴까, 들리면 날 어떻게 보실까 하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다녀왔습니다.” 


자연스럽게 인사를 하려 했는데 그만 신음 소리 비슷하게 나와버렸다. 엄마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시고, 부엌 쪽을 바라보시며 얼굴을 일그러뜨리셨다. 


‘어? 만취는 아닌 건가?’ 


그러고 보니 엄마의 풀어헤친 머리와 입가, 잠옷 윗도리가 젖어 있었다. 더러워진 머리카락과 얼굴, 옷을 씻었다는 건 어느 정도 사리분별이 가능한 상태란 뜻. 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는 얼굴로 엄마에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치울게요.” 


엄마는 잠시 망설이시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시고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등 뒤에서 안방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풀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우... 으욱..!” 


긴장이 풀리자 참고 있던 토기가 다시 올라왔다.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해댔다. 눈에 맺힌 눈물이 바닥에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흐려지는 시야와 반대로 그날의 기억이 선명히 떠올랐다. 부엌 바닥을 더럽힌 토사물과, 붉은... 


- 일단 정리부터 하자. 


그날의 아빠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아서, 나는 얼른 방으로 가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 다음 화장실로 가서 대야에 물을 받았다. 

쏴아아. 


“정리... 정리할 건..!” 


어쩔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힌 나는 대야를 놓았다. 손에서 떨어진 대야가 세면대로 물을 토해냈다. 


청소를 끝낸 후 나는 입고 있던 옷을 전부 벗어 세탁기에 넣었다. 그리고 화장실로 들어가 더러운 몸을 씻었다.

쏴아아. 물이 목을 적실 때마다 따끔거리는 아픔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샤워를 마친 나는 곧장 형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책과 만화책, 애니메이션 DVD, 게임 디스크, 음악 CD, 피규어 등, 형이 몇 년 동안 모은 흔적들로 가득 찬 그 방은 우리 집에서 가장 큰 침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제일 작은 방인 내 방보다 여유 공간이 적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이러한 형의 취미와 수집벽이 특히 더 고마웠다. 

아빠가 밤에 주무시는 것 말고는 비어 있다시피 해서 형 방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역시, 최고의 정돈은 어지럽히지 않는 것. 


‘정리할 것이 없는 거겠지.’ 


뭘 꺼낼지 이미 정했으면서, 나는 만화책이 종류별, 순서별로 잘 정돈된 책장을 손가락으로 죽 훑었다. 그리고 그중 한 권을 꺼내 침대에 걸터앉았다. ‘우라사와 나오키’ 작가의 “몬스터”였다.

나는 휘리릭 책장을 넘기다가 유독 벌어진 한 곳을 펼쳤다. “이름 없는 괴물”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이었다. 


“옛날 옛날에 어느 곳에 이름 없는 괴물이 살고 있었습니다. 괴물은 이름이 너무도 갖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괴물은 둘로 나뉘어 한 마리는 동쪽으로, 다른 한 마리는 서쪽으로 이름을 찾아 떠났다.

그중 동쪽으로 향한 한 마리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소원을 들어줄 테니 그 대가로 그들의 이름을 자기에게 달라고 했다. 괴물은 제안에 응한 사람의 몸속에 들어가 약속대로 소원을 이루어 주었고, 소원을 이룬 사람들은 행복해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들은 배가 고파진 괴물에게 안에서부터 먹히고 말았다.

그렇게 얻은 이름을 잃고 또 잃어가던 동쪽의 괴물은 어느 날 성에 사는 한 병약한 소년과 만났다. 괴물은 소년의 몸에 들어가 소년을 건강하게 만들어 주고 이름을 받았다. 그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는 이번엔 배가 고파도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끝내 배고픔을 이기지 못한 괴물은 그만 성 안의 모든 사람들을 잡아먹고 말았다. 

그래도 소년만큼은 먹지 않고 끝까지 버틴 괴물은 이후 자신의 반쪽과 재회하였다. 


“남자아이는 서쪽으로 간 괴물과 만났습니다. 

“이름이 생겼어. 멋진 이름이야.” 

서쪽으로 간 괴물은 말했습니다. 

“이름 같은 건 필요 없어. 이름 없이도 행복할 수 있어. 우리는 이름 없는 괴물이니까.” 

남자아이는 서쪽으로 간 괴물을 먹어버렸습니다.

모처럼 이름이 생겼지만 이제는 이름을 불러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요한, 참 멋진 이름인데.” 


나는 책을 덮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전등불이 눈이 부셔서 팔로 눈을 덮었다.


처음 읽은 순간부터 운명처럼 좋아했다. 작중 내용에 맞는 모범답안이 있을 것이고, 또 저마다의 해석도 가능하겠지만, 나는 이 이야기에 대한 가장 유치한 감상을 가지고 있다. 


‘나도 나눠진 반쪽이었으면... 그럼 나는 너에게 먹히게 될까?’ 


나는 이름을 가지지 못한 쪽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나는... 


“눈, 붓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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