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안 고파?”
언제부턴가 생체시계로는 밥 먹을 때를 잘 가늠할 수 없게 되어서, 나는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짧은 시곗바늘이 6을 훌쩍 넘어가 있었다.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형이 있으니 뭐라도 준비해야 했다.
“어,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가서 뭐 좀 사 올게.”
“왜?”
“집에 마땅히 먹을 게 없어. 혼자서 라면 먹으려고 했는데, 형이 올 줄은 몰랐거든.”
“... 라면?”
순간 형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아차. 나는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이며 주워 담을 수 없는 실수를 무마해보려 했다.
형은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서 턱으로 부엌을 가리켰다.
“라면 말고도 먹을 거 있던데.”
“된장국은 안 돼. 아빠 드릴 거야.”
“아니 그런 거 말고. 아주 귀한 거.”
“귀한 거?”
나는 냉장고와 그 내용물에 관한 최근 기억을 머릿속에 펼쳐보았다.
앞에 나와 있는 것과 뒤에 숨어 있는 것, 위층에 있는 것과 아래층에 있는 것. 꼼꼼히 되짚어 보았지만 귀한 거라고 불릴만한 건 딱히 없었다.
형은 의아해하는 나를 보고 혀를 끌끌 차더니, 뭔가 새로운 것을 가르쳐 줄 때 짓는 그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자취생활 1년이 가르쳐 준 삶의 지혜, 뭘 사러 나가기 전에 먼저 냉장고를 잘 뒤져볼 것.”
“그러니까 그 냉장고 안에 특별한 건 없다니...”
형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파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자신만만하게 냉동고 문을 열고서 은박지에 싸여 있는 정체불명의 덩어리를 꺼냈다.
“짜잔! 돈가스!”
‘... 저게 대체 언제부터 저 안에?’
나는 재빨리 좀 더 오래된 기억들을 더듬어보았다.
아직 연상 작용이 답을 도출하기도 전부터 제6감이 빨간 신호를 울렸고, 이게 거짓 경보인지 아닌지 빨리 판단을 내리라고 심장이 마구 피를 펌프질 하여 뇌를 도왔다.
마침내 어떤 푸근한 얼굴과 목소리가 떠올랐다.
- 돈가스인데 너무 많아서 가져왔어. 좀 먹어.
그건 통장 아주머니께서 나누어주신 냉동 돈가스였다.
감사히 받기는 했으나 당시 내 요리 실력으로 튀기는 건 무리일 거 같아서 일단 냉동고에 넣어두었었다.
‘분명 내가 중학교 2학년 때니까, 거의 1년 반...’
아마도 그게 다른 것들에 밀리고 밀리다가 결국 까맣게 잊힌 채로 냉동고 뒤 칸에 고이 잠들어 있었던 모양이다.
포장이 제대로 되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유통기한 같은 건 짐작도 할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오래되었다는 것이었다.
춥고 좁은 냉동고 안에서 치이고 치이면서 찢어진 은박지 사이로 살짝 보이는 갈색이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았다.
“형, 그거 적어도 1년 전 거야. 너무 오래된 거 아닐까? 냄새 좀 맡아봐.”
“쯧쯧쯧, 뭘 모르는군. 삶의 지혜 그 두 번째, 냉동고에 든 음식은 다 먹을 수 있다.”
“먹을 수야 있겠지만, 먹고 나서가 문제 아냐?”
“잘 익혀 먹으면 괜찮아.”
형은 은박지에 싸인 고깃덩어리를 카운터 탑에 살포시 올려놓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는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한번 굳힌 결심은 웬만해선 절대 꺾지 않는 형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나는 일찌감치 설득하기를 포기하고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겠다.’
저 상태면 먹어서 얻는 즐거움보다 나중에 튄 기름 청소하는 게 더 큰일이겠다 생각하면서, 나는 효율적인 청소를 위한 단계를 시뮬레이션했다.
‘일단 바닥에 신문지부터 깔아야지.’
이럴 때를 대비해 모아둔 오래된 신문지를 꺼내려고 캐비닛을 여는데, 형이 멀뚱멀뚱 쳐다보며 물었다.
“뭐 해?”
“신문지 찾아.”
“왜?”
“기름 튀니까.”
“기름이 왜 튀어?”
어건 또 무슨 장난인가 하고 돌아보니 형은 정말로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진 나는 당연하지 않느냐는 투로 말했다.
“왜긴. 그거 튀겨 먹을 거잖아.”
“아~하!”
형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얼굴로 끄덕이더니, 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아니, 아니지. 걱정 마. 안 튀길 거야.”
“어? 안 튀기고 돈가스를 어떻게 해?”
“삶의 지혜 그 세 번째, 모든 냉동식품은 공통의 조리법이 있어.”
그는 은박지에서 고기를 꺼내 커다란 접시 위에 올리고, 큰 그릇으로 그 위를 덮었다.
그리고 마치 요리사 캐릭터처럼 한 손으로 접시를 들고서 눈을 찡긋해 보였다.
“전자레인지에 데워 먹기.”
“... 잠깐!”
내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형은 잽싸게 전자레인지에 접시를 넣고서 버튼 몇 개를 눌렀다.
삑삑삑. 위잉-
무겁고 나른한 동작음과 함께 점점 진해지는 냄새가 불안감을 더해가는 가운데, 띵-하고 맑은 소리가 운명의 시간을 알렸다.
“어디 어디. 앗, 뜨거워!”
맨손으로 꺼내려다 실패한 형은 행주를 집어 들고 그릇과 접시를 조심스레 꺼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다음 함박웃음을 지으며 자랑스레 외쳤다.
“자, 기대하시라. 돈가스!”
형이 덮개 노릇을 하고 있던 그릇을 들어 올리자 마침내 그 안의 참상이 드러났다.
덮개 안에 갇혀 빠져나가지 못한 수분이 스며든 바람에 너덜너덜해진 튀김옷과, 찢어진 옷으로 맨몸을 필사적으로 가리고 있는 것처럼 눅눅한 튀김옷을 걸친, 그래도 한때는 고기라 불릴만했던 단백질 덩어리.
“이게... 원래 이런 건가?”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형에게 책망의 눈빛을 쏘아붙여 주었다.
“... 돈가스는 소스가 생명이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던 형은 재빨리 냉장고 문을 열어 이 악재를 만회할 수 있게 해 줄 소스를 찾기 시작했다.
“뭐야, 집에 돈가스 소스 없어?”
“우리 집에 언제 그런 게 있었어? 아까는 본인 입으로 냉장고를 잘 뒤져 보라며.”
“할 수 없네. 그럼 만능 소스로.”
형이 멋쩍게 웃으며 케첩을 꺼냈다.
언제 사두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케첩이 늠름히 탁자 위에 오르고, 우리의 식사는 시작되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어서 먹어.”
형은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동생에게 차례를 양보하는 미덕을 보였다.
물론 그 안에 숨겨진 진심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먹어도 되는지 확인하려는 거구나.’
상대가 모르모트 전략으로 나온다면 내게 남은 수는 논개의 지략, 동반자살이다.
고기를 썰어 한 조각을 입에 넣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역한 고기 비린내가 쓸데없이 따뜻한 김을 타고 코로 올라왔다.
나는 괴로워하는 코에서 억지로 콧소리를 쥐어짜 내었다.
“으~음. 괜찮아. 먹을만해.”
씹을수록 씹고 싶지 않은 고기 조각을 입안에서 굴리며, 나는 미소를 띠고서 형에게 어서 먹을 것을 권했다.
이런 건 목구멍으로 넘기고 싶지 않다는 자기 보호본능과 적을 속여야 한다는 이성적 계략이 내 안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래? 그럼 어디...”
의외로 긍정적인 내 반응에 조금은 경계가 풀렸는지, 형도 나를 따라서 고기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
형은 잠시 그대로 얼어붙어 있다가 말없이 탁자 위에 놓인 케첩 튜브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자기 접시 위에 마구 케첩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뿌지직. 췩 췩.
케첩 튜브가 말기 폐질환 환자처럼 힘겨운 숨소리를 내었고, 빨간 케첩이 아주 조금씩 방울방울 튀어나왔다.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 사그라드는 순간이었다.
“... 내놔.”
“잠깐만. 나 아직 안 끝났어.”
“그 정도면 많이 뿌렸잖아. 나도 줘!”
나는 얼른 형이 들고 있는 튜브를 움켜쥐었고, 형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버텼다.
그렇게 케첩 쟁탈전이 벌어졌으나 이미 쟁취할 자원은 거의 안 남은 상태.
속절없이 줄어만 가는 케첩과 함께 우리의 입은 움직임이 점점 둔해졌다.
갑자기 형이 피식 웃으며 재미없는 농담을 던졌다.
“이래서 유럽에서 향신료 쟁탈전이 일어난 거구나.”
“풉.”
“하하.”
“아하하하하.”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형다운 농담에 나는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형과 둘이서 밥을 먹은 게 언제였을까.
- 솔아, 이거 봐! 냉동고에서 피자 찾았어.
- 우와! 그럼 우리 라면 안 먹어도 되는 거야?
아직 어렸던 형은 라면이 지겨운 동생을 위해 열심히 냉동고를 뒤졌었다.
마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 속에서 나는 어찌어찌 접시를 비웠다.
그건 정말 다시는 먹고 싶지 않지만, 같은 순간이 온다면 아마 또 먹게 될, 그런 저녁이었다.
설거지를 거의 끝낸 무렵 형이 다가와 졸랐다.
“게임 한 판만 더하자.”
“안 돼. 나 숙제 있어.”
나는 형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고는 고무장갑을 벗고 내 방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형은 내가 거짓말하는 줄 알았는지 뒤에서 툴툴거렸다.
“숙제? 뭔 첫날부터 숙제야.”
“그러게.”
“진짜 있는 거야? 많아?”
“음, 아니. 오래 걸릴 거 같진 않던데.”
“그럼 빨리 끝내. 얼른 게임하게.”
나는 줄기차게 본인 욕구에 충실한 그에게 어이없다는 눈길을 주며 쐐기를 박았다.
“싫어. 나 오늘 일찍 잘 거야.”
“아니 무슨 고등학생이 일찍 잘 생각을 해.”
정색하는 형의 말끔한 얼굴을 쳐다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 인간이 이러는 걸 다른 사람들도 알아야 하는데.’
남들은 모를 거다. 성적 우수, 품행 방정, 외모 준수한 최성진 군이 이런 에고이스트라는 걸.
목적을 위해서는 본인이 한 말도 손바닥 뒤집듯 할 인간.
‘옛날에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말이야. 어째 가면 갈수록 사람이... 아, 가만. 이 시간에 게임을 더 하겠다니, 대체 언제 가려고?’
나는 형에게 물었다.
“근데 오늘 자고 갈 거야?”
“어. 그럴까 하는데.”
“그렇다는 건...”
바로 그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삐리릭- 탁.
이 시간에 우리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올 사람은 단 한 명.
나는 얼른 현관으로 나가서 인사를 했다.
“다녀오셨어요.”
“음.”
굳이 밝히지 않아도 누구나 부자관계라는 걸 알아볼 만큼 내가 쏙 빼닮은 아빠.
쉰을 넘긴 연세에도 눈가에 주름 하나 없는 동안에 깨끗한 피부, 새카만 머리카락.
아빠가 쓰고 계신 금테 안경은 이지적인 외모에 깐깐한 완벽주의자의 느낌을 더했다.
안 그래도 그 나이대 어른치고는 꽤 크신 편이신데, 몸매까지 날렵하셔서 아빠는 키가 더욱 커 보이셨다.
“오셨어요.”
내 뒤에서 슬렁슬렁 늦게 나온 형이 인사를 하자, 막 신발을 벗고 들어오시던 아빠가 잠시 멈칫하셨다.
집에 거의 오지 않는 장남이 명절이나 특별한 날도 아닌데 집에 있다는 것에 놀라신 듯했다.
“음... 왔냐. 머리 바꿨구나.”
“네... 에.”
부자간에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인사가 오갔다.
아빠는 집안으로 걸음을 옮기시며 형에게 지나가듯이 말씀하셨다.
“책임지지 못할 짓은 하지 마라.”
아마도 잘 어울린다는 표현을 저렇게 하신 거 같은데, 형에게는 전혀 칭찬으로 와닿지 않는 것 같았다.
잔뜩 구겨지는 형의 얼굴을 훔쳐보며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그리고 일부러 태연하게 아빠께 여쭈었다.
“진지는요?”
“먹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형은 괜히 팔꿈치로 나를 툭 치며 말했다.
“거봐. 넌 역시 아빠를 닮았어.”
형은 아무 대꾸 없이 실실 웃기만 하는 나를 흘겨보았다.
그러고는 안방이 아닌 자기 방으로 향하시는 아빠를 보고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들 머리보다 더 신경 쓰셔야 할 일이 있을 텐데.”
우리 둘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모습을 감추었다.
형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참, 나 내 방에서 못 자겠구나.”
“어.”
곧 옷을 갈아입고 나오신 아빠도 같은 생각을 하셨는지 형에게 물으셨다.
“너 오늘 자고 가냐?”
“그럴 생각이었는데요.”
“그럼 내가 거실에서 자마.”
나는 말도 안 된다며 손을 내저었다.
“아뇨. 제가 소파에서 잘게요.”
그러자 형이 다른 선택지를 내놓았다.
“아니에요. 저희 둘이 솔이 방에서 잘게요.”
‘뭐라고?’
내가 뜨악해서 쳐다보자 형은 내 어깨에 팔을 두르며 이 사소한 논란에 아름답기 그지없는 종지부를 찍었다.
“오랜만에 형제끼리 시간 좀 보내려고요.”
“음. 그럼 그렇게 해라. 네 방 이불장에 요 있는 거 꺼내 쓰고.”
“네에.”
“아니, 역시 저는 소파에서...”
“참, 너 숙제 있다고 했잖아. 어서 가서 해. 요는 내가 꺼내 줄게.”
속전속결로 마무리되고 있는 이 사안에 대해 내가 소심한 이의를 제기하려 하자 형이 재빨리 가로막았다.
어서 숙제하라는 말은 더 이상 딴지 걸지 말라는 경고.
세상 상냥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형에게 경외감마저 느끼며, 나는 바닥에서 자게 될 운명을 받아들였다.
“그건 그렇고, 대체 이게 무슨 냄새야? 너희 저녁에 뭘 먹은 거냐? 환기 좀 시켜놓지.”
안 그래도 후각이 예민하신 아빠는 돈가스 냄새를 견디기 힘드셨는지 얼굴을 찌푸리셨다.
눈치껏 내가 창문 쪽으로 가려는데 형이 말렸다.
“창문은 안 여는 게 좋아. 오늘 저녁부터 내일 아침까지 황사 경보라고 했어.”
“할 수 없네. 그럼 그냥 둬라.”
아빠는 냄새에 더 신경을 안 쓰도록 뉴스에 집중하려 애쓰셨다.
더 이상 하실 말씀은 없어 보여서 내 방으로 가려고 몸을 돌린 그때, 등 뒤에서 형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부가 저러고 있는데, 아들이 뭘 먹었는지보다 무슨 냄새인지가 더 궁금하신가 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