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케이크, 나카시마 미카, 생일 문자, 그리고 기적
어느 날 저는 마트에서 큼지막한 롤케이크를 하나 샀습니다. 롤케이크 노래를 부르던 둘째에게 꼭 사주마 약속했거든요. 초코와 라즈베리, 둘 사이에서 한참 고민하던 저의 손은 빨간 라즈베리 케이크를 집어 들었습니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온 아이들에게 저는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롤케이크 먹을래? 엄마가 라즈베리맛 사 왔어."
단 걸 안 좋아하는 첫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둘째는 환호했습니다. 저는 두툼하게 자른 롤케이크 두 조각을 각각 따로 접시에 담아 하나는 둘째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제가 먹으려고 부엌으로 가져갔습니다. 안 그래도 달달한 게 땡기던 참이었는데 잘됐다 생각하며 포크로 케이크 조각을 잘라 입에 넣었지요. 처음 맛보는 라즈베리맛 케이크, 과연 어떤 맛일까? 하는 궁금증이 머릿속에 BGM을 틀었습니다. 해피해피해피~ 해피해피해피해피.....?
"......"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습니다. 케이크는 달아도 너무 달았어요. 입에 넣자마자 이빨이 썩을 거 같았죠. 그래도 돈 주고 산 건데 아까워서 저는 꾸역꾸역 케이크를 먹었습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젠장! 욕심 많게 크게도 잘랐네.
저는 둘째 아이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먹지 말라고 할까? 아니, 그 정돈 아닌가? 싫으면 알아서 안 먹겠지. 한참 뒤에 둘째가 빈 접시를 들고 부엌으로 오더군요. 별다른 말이 없는 아이의 표정을 보고 알았습니다. 아, 역시 잘못 샀구나 하고요. 막내에게는 케이크의 키읔도 꺼내지 않았죠.
그 후 냉장고 속 케이크를 볼 때마다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먹자니 얻는 것보다 잃을 게 많을 거 같고, 그렇다고 버리자니 너무 아깝고, 어쩐다... 이실직고를 하자 남편이 그러더군요.
"그럼 버려."
그렇게 냉장고 안에서 며칠을 보낸 케이크는 결국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쓰레기통에 처박힌 케이크에게 미안하다고 속으로 사과하면서, 저는 왠지 저 모습이 버려진 유년기의 꿈같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 달콤하기만 한 철없는 꿈은 결국 저런 결말을 맞이하는 거지, 그게 인생이지. 누구한테 얘기하기도 민망한 망상이 조용히 생각 속을 유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죠.
"케이크가 불쌍해요."
쓰레기를 버리러 온 둘째가 제 등 뒤에서 말했습니다. 뜨끔. 죄책감을 느끼며 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게."
저의 동조에 둘째는 상상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아이는 그 속에서 케이크가 되었지요.
"제발 저를 사가세요. 와, 지금 저를 고른 거예요? 맛있게 먹어줄 거죠? 신난다... 아. 날 먹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어, 흑흑..."
제대로 감정이입한 둘째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본 저는 이제 그만 현실로 꺼내주어야겠다 싶어 선을 그었습니다.
"그러네. 미안하고 슬프다, 그치? 근데 말야, 그건 네가 느끼는 감정이지 케이크의 것이 아니야. 다행히도 케이크는..."
"감정이 없으니까요?"
"맞아.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
아이는 쿨하게 인정하고는 자리를 떴습니다. 다시 혼자 남은 저는 한 번 더 쓰레기통 속 케이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새가 운다, 꽃이 활짝 웃는다. 지극히 인간중심의 표현이죠. 무생물, 동식물뿐만 아니라 우리는 같은 사람끼리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 OST의 여왕 '나카시마 미카'의 노래 "내가 죽으려고 생각한 것은"은 그녀의 가슴 아픈 사연과 어우러져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솔직 담백한 창법과 시적인 가사는 듣는 이로 하여금 공감과 상상을 끌어내기 충분했죠.
그런데 이 가사가 말이죠, 굉장히 난해합니다. '괭이갈매기가 울어서, 생일에 살구꽃이 피어서 죽으려 했다'? 난데없이 '소년'이랑 '돈키호테'는 또 뭐지? '신발끈이 풀려서'라는 부분은 그럭저럭 알겠는데, 나머지는 선뜻 이해가 안 가요. 그래도 워낙 좋은 곡이라 '그런가 보다'하고 들으시는 분들도 계시고, '아무것도 아닌 이유로 죽고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저도 그중 하나였죠. 한 댓글을 보기 전까지는요. 기억나는 대로 여기에 적어보겠습니다.
"일본 문학에서 '괭이갈매기'는 불안정한 삶과 외로움을, 빠르게 지는 '살구꽃'은 인생의 덧없음이나 죽음을 뜻한다. '새장 속 소년'과 '단칸방의 돈키호테'는 히키코모리(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사람)인 자신을, '나를 바라보는 소년'은 현재의 나를 책망하는 과거의 나로서, 자책에 사로잡힌 것을 표현한 것이다. '신발끈을 다시 묶는 건 어려워'라고 하던(사람과의 관계에 능숙하지 못한) 화자는 마지막에 '너 같은 사람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조금은 기대해 볼게'라며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사람을 통해 치유받는 모습을 보여준다."
만약 작사가의 의도가 저러했다면, 일본의 상용구적 표현을 알지 못한 우리는 '외로움'이나 '덧없음'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 되지요. 이 얼마나 큰 차이인가요!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이유'로 받아들인 편이 더 정확한 게 아닐까.
어차피 사람은 절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하니까요.
아무리 잘 표현해도 완전히 같은 인생을 살아오지 않은 이상 그의 생각과 감정을 온전히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에요. 우리는 누군가의 생생한 경험담에도 자신의 기억을 덧칠합니다. 결국 우린 투명한 유리 속에서 굴절되어 들어온 빛을 보고 세상을 '이해'했다 '착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요.
"나는 너를 이해해."
"너도 나를 이해하지?"
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사고인가요. 정말, 서글플 정도로 우스운 일 아닌가요.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상이 채워지지 않는 간극 속으로 무너져 내리는 느낌이 들지는 않으신가요.
제 전화기에는 안 쓰는 앱이 한가득입니다. 'WhatsApp'이라는, 카톡 비슷한 앱도 그중 하나죠. 거의 반년 넘게 열어보지도 않았는데요, 최근에 쓸 일이 생겨서 오랜만에 앱을 켰습니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어요.
"Happy birthday!"
5년 전 그만둔 전 직장의 매니저로부터 온 생일 축하 메시지였습니다. 본의 아니게 전 매니저의 연락을 몇 달 동안 안읽씹한 거였죠. 미안함으로 머리가 하얘진 저는 바로 사과 문자를 보냈습니다. 다행히 그녀는 쿨하게 이해해 주는 듯했습니다. (이것 또한 나의 착각일지도)
직장을 그만둘 때 저는 그녀에게 부탁을 했었습니다. 그만두는 사람에게 모든 부서 직원들이 모여 감사를 표하고, 떠나기 전에 일 끝나고 같이 드링크를 하는 게 그곳 전통이었는데요, 그걸 하지 말아 달라고요.
"마치 처음부터 여기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떠났으면 좋겠어요."
회사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그랬냐고요? 글쎄요. 윗선에 대한 불만은 있었죠. 미팅을 핑계로 평판이 좋지 않은 직원과 그에게 불만을 품은 팀원들을 불러놓고 그 직원을 대놓고 비판하게 하는 걸 보고 정나미가 떨어져서요. 저도 싫어하던 직원이었지만 그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아마 매니저는 그 일 아니면 제가 부끄러움이 많이서 그러려니 했을 텐데,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떠나는 거, 어차피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 완전히 잊히고 싶었어요.
역시 이런 제 의도가 전해지지 않았던 걸까요. 사람 좋은 매니저는 제 유치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마 해놓고 뒤에서 가까운 팀원들을 초대한 식사자리를 마련했죠. 그리고 친하게 지낸 다른 직원 한 명만 불러 조촐한 술자리를 가지도록 했습니다.
그녀는 5년이 지난 지금도 제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자기만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우리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했다 착각하면서, 남(가족도 친구도 결국 남)과 부대끼며 대부분 서로 죽이지 않고, 죽지 않고 일상을 살아가는 것. 제게는 기적처럼 보여요. 몰이해의 간극이 비극을 낳을 정도로 크지 않아서 그나마 멸망하지 않고 문명을 유지해 온 걸까요.
어쩌면 들이부은 김칫국에 성난 상처가 기대하지 않았던 누군가의 따스함으로 덮여서, 그래서인지도 모르겠군요.
어쩌면 당신의 미소가, 상냥함이, 세상을 아직 살만한 곳으로 보이게 만드는 건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