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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를 낸다는 것

누군가를 대신해서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by 초코 인사이트 Mar 07. 2024

아무도 관심없는 교내 게시판에 드디어 대자보가 걸렸다.

대자보에는 수많은 소리없는 아우성이 가득한 글로 가득차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등교길이다.



대학원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사람과 관련한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첫발을 내딛었으나 그곳은 내가 꿈꾸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생각한만큼 장학금을 받지도 못하고 (오히려 있는 돈을 뺏기고), 처우는 상상 이상으로 좋지 않았다. 상상 속의 이야기 같았던 부도덕한 교수의 모습, 숨막히는 연구실 분위기. 모든게 현실이었다. 한마디로 연구실 환경은 열악했으나 아무도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얼마나 바뀌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대학원에 입학했을 때(2015년 경)는 이공계 대학원생들 사이에서 '노예'라는 단어가 성행했다. 이공계 대학원생은 교수의 노예가 되는 길이라고 유명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인문사화과학 쪽도 유사한 측면이 존재하겠지만은 이공계 쪽에서 이런 목소리가 더 강하게 들렸던 것은 근무형태의 연구실 생활과 연구실의 폐쇄성에 근거한 것이 아닐까 싶다. 


이공계 대학원은 입학 또는 입학 전부터 연구실 생활을 의무적으로 하게 된다. 연구에 있어 실험이 필수적이기도 하고 연구과제를 이행해야 하기 때문에 이를 위해 직장에서 일을 하는 것처럼 하루종일 몰입하는 환경을 겪게 된다. 이 때 일반 직장인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되는데, 대학원생이 굳이 더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유는 학위과정에 묶여 있어 일반 기업에 다니는 것처럼 쉽게 이직할 수가 없다는 원인이 있다. 이를 빌미삼아 연구실에서는 대학원생을 저렴한 비용으로 다양하게 활용하고 폭력과 같은 비도덕적 일을 쉽게 범하기도 한다. 그리고 연구실에 따라 다르지만 만약 교수의 힘이 강한 곳은 졸업하고 나서도 그 영향력에 의해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커리어가 정해지는 경우가 많아 눈 밖에 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하는 분위기가 존재하기도 한다. 대학원생은 절대적 권위 아래 수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인 것이다. 


입학하지 얼마안되 이렇듯 이공계 대학원생의 현실을 깨닫고 나서는 바로 대학원 총학생회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공계 대학원생 대표가 되어 활동을 시작했다. 내 연구실은 9 to 9 의무 근무라 식사 시간을 쪼개 점심, 저녁시간에 잠깐씩 총학생회 업무를 했어야 했지만 틀린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작게라도 목소리를 내며 학교생활을 해나갔다.  학교 곳곳의 게시판에는 이공계 대학원생의 현황과 낮은 처우를 고발하는 목소리가 담긴 대자보가 걸렸고 가끔씩 캠퍼스 광장에서 간식을 나눠주며 대학원생들을 위로하고 응원하곤 했다. 그리고 전국대학원총학생회 모임에서도 이공계 대학원생이 겪고 있는 힘든 현실을 공유하고 해결책에 대해 간구하고는 했다. 그렇게 발버둥치며 대학원을 다니던 나는 화장실도 제대로 못가게 하는 연구실 분위기에 의해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면서 결국 자퇴를 하고 말았다. 


자퇴하는 것과 동시에 총학생회 일도 중단 되었지만, 그간 연락하고 지냈던 사람들과는 계속해서 연결을 이어나갔다. 대학원생의 목소리를 듣는 커뮤니티 플랫폼 스타트업 팀과의 교류, 그리고 국회에 내 이야기가 생생하게 전달되었던 일. 모두 자퇴이후로 일어난 일이다. 


살면서 어려운 일은 항상 겪을 수 있다. 그럴 때마다 '문제는 해결하면 된다' 라는 주의로 살아왔는데 처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혀 갈 길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거대한 권력 속에 나는 그저 작은 먼지였다. 그래도 난 기대해 본다. 내 보잘 것 없던 작은 날개짓이 아주 작게 나마 그들의 양심을 흔들어 놓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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