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고요하고 따뜻한 악수
1988년의 중학생들에게 누군가의 슬픔을 달래주는 일은, 영어 단어 500개를 외우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숙제였다.
우리는 도덕 교과서에서 '이웃을 사랑하자.'라고 배웠지만, 정작 눈앞에서 무너지는 친구의 어깨를 어떻게 짚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그 어떤 참고서도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날 밤 은하빌라 옥상은, 14살 소년의 서툰 위로와 한 소녀의 거대한 상실감이 충돌하며 빚어낸, 세상에서 가장 고요하고도 치열한 우주였다.
슬픔을 표현하는 법도, 누군가의 시린 어깨를 다독이는 법도 배우지 못한 채 우리는 그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생애 가장 긴 밤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다연이 옆에 한 뼘 정도 거리를 두고 앉았다.
손을 뻗어 다연이의 어깨를 아주고 싶었지만, 다연이의 몸 근처에서 마치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듯 허공을 맴돌았다.
“다연아... 그, 그만 울어. 태경이 형이 너 울면... 하늘나라에서 많이 슬퍼할지도 몰라.”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진부한 위로였지만, 당시 내가 꺼낼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문장이었다.
내 투박한 말에 다연이는 아주 잠시 떨림을 멈췄다.
마치 고장 난 기계가 잠시 멈칫하듯 말이다.
나는 용기를 내어 아주 살짝, 다연이의 셔츠 끝단을 손가락으로 쥐었다.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그저 터져 나오는 오열을 억누르며 떨고 있는 다연이는 마치 누군가 살짝만 건드려도 산산조각 날 것 같은 얇은 유리잔 같았다.
은하빌라 옥상 파란 물탱크 옆, 한낮의 열기를 아직도 품고 있는 콘크리트 바닥에 나란히 앉은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다연이의 셔츠 끝자락을 손가락 끝으로 겨우 쥔 채, 그 가느다란 떨림이 내 팔을 타고 심장까지 전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였다.
“야아 아아아아아 아옹—!”
옥상 구석 어디선가 정적을 찢는 날카로운 길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우와악!”
“앗!”
생각지도 못한 침입자의 소리에 우리는 동시에 몸을 들썩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고양이의 노란 눈동자가 스쳐 지나갔고, 본능적으로 우리는 서로를 향해 몸을 바짝 붙였다.
14살 소년의 용기란 때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우연을 빌려 발휘되기도 하는 법이다.
나는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셔츠 끝단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옮겼다.
손은 마치 자기장을 거스르는 금속처럼 조심스럽고 무겁게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오들오들 떨고 있는 다연이의 가느다란 어깨 위로 내 팔을 조심스럽게 올려 감쌌다.
다연이는 흠칫 놀란 듯 어깨를 굳혔다.
대한민국에서 남녀 중학생이 어깨를 감싸 안는다는 건, 교과서 밖의 금기이자 우주적인 도전이었다.
하지만 다연이는 이내 긴장을 풀었다.
7월의 열기보다 더 뜨거운 내 손바닥의 온기가 다연이의 시린 상실감을 조금씩 녹여내고 있었던 것이다.
다연이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아주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 순간, 내 심장은 금성사의 백조 세탁기가 탈수를 시작하는 모터처럼 터질 듯이 요동쳤다.
덜컹거리며 온 집안을 뒤흔들던 그 투박한 진동이 가슴 한복판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어깨에 닿은 다연이의 머리카락에서 배어 나오는 샴푸 향기와, 내 셔츠를 적시는 다연이의 뜨거운 눈물.
나는 태경이 형이 가르쳐준 그 어떤 난해한 공식보다도, 지금 내 어깨에 실린 이 작고 연약한 무게가 훨씬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우리가 나눈 그 짧은 포옹이 누군가의 죽음을 되돌릴 순 없지만, 적어도 남겨진 이들이 다시 한 걸음을 내딛게 하는 유일한 연료가 된다는 것을 희미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14살의 나는 다연이를 위로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다연이의 시린 어깨를 감싸 쥐며 나 자신의 슬픔을 견뎌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 날 아침,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은 마치 물에 젖은 솜이불을 어깨에 멘 것처럼 무거웠다.
옥상에서 다연이의 어깨를 감싸 쥐었던 그 우주적인 사건 이후, 나는 내가 무슨 대단한 홍콩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교문 앞에서 복장 단속을 하는 당직 선생님의 "야, 너 명찰 어디 갔어? 이리 와!"라는 호통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비장했던 각오는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다.
엉덩이를 한 대 얻어맞고 교실로 향하는 내 꼴은 주윤발보다는 동네 바보에 가까웠다.
나는 마치 길을 잘못 든 행인처럼 공기의 밀도가 달라진 4반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다.
힐끔 들여다본 다연이의 책상은 너무나 정직하게 비어 있었다.
그 텅 빈 책상은 우주의 모든 별이 일시에 소멸해 버린 블랙홀처럼, 교실 안의 모든 빛과 소음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다연이의 빈자리를 보며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질 때쯤,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기남이었다. 녀석은 어제 당구장에서 제가 아버지에게 끌려갈 때 보여준 그 비극적인 퇴장을 마치 어젯밤 본 주말 명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야, 정서진! 너 어제 아빠한테 걸려서 완전히 제삿날 잡은 줄 알았는데, 용케 살아 돌아왔네?”
기남이는 평소처럼 낄낄거리며 농담을 던졌지만, 이내 내 차디찬 표정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녀석의 눈빛에 장난기 대신 낯선 당혹감이 서렸습니다.
“근데... 태경이 형 소식 들었다. 아, 진짜... 말도 안 되지 않냐? 우리 동네 영웅이 그렇게 한순간에... 다연이는 괜찮냐? 아휴, 괜찮을 리가 없지.”
기남이의 목소리는 복도의 소음 속으로 낮게 가라앉았다.
어제 당구장에서 우리가 큐대를 휘두르며 낄낄거렸던 그 철없는 시간들이, 태경이 형의 부고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선 고작 한 줌의 모래알처럼 느껴졌다.
나는 "다연이는 괜찮냐?"라는 기남이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어젯밤 은하빌라 옥상에서 다연이의 시린 어깨를 감싸 쥐었을 때 느꼈던 그 무게감은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른들이 말하는 운명이나 사고라는 단어는 14살의 우리에게 너무나 거대하고 난해한 외계어 같았으니까.
나는 기남이에게 어제 옥상에서 있었던 일, 파란 물탱크 옆에서 다연이의 눈물이 제 셔츠를 적셨던 그 우주적인 사건에 대해선 입을 닫기로 했다.
그건 소문으로 소비되기엔 너무나 뜨겁고 비밀스러운 기억이었으니까.
1988년의 중학생들에게 죽음이란,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귀신 이야기보다 더 비현실적이었다.
중학교 교실은 국가대표 선발전이라도 열린 것처럼 언제나 시끄럽고 무질서했다.
누군가의 비극이 우주를 뒤흔들고 있어도, 열네 살 소년들의 세상은 여전히 짤짤이 동전 소리와 지우개 가루 날리는 소음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세상은 잔인할 만큼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교실 뒷문 쪽에서는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원을 그리며 모여 앉아 운명을 건 한판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홀이야, 짝이야? 빨리 결정해!"
주먹 쥔 손 안에서 십 원짜리와 백 원짜리 동전들이 짤랑짤랑 부딪히는 소리, 이른바 짤짤이는 당시 어느 교실에서나 들려오던 가장 흔한 배경음악이었다.
승부에서 진 녀석의 비명과 딴 녀석의 환호성이 교실 천장을 찔렀다.
창가 쪽에서는 지우개 따먹기 챔피언십이 한창이었다.
점보 지우개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아이들은 침까지 묻혀가며 공을 들였고, 다른 한쪽에서는 어젯밤 보았던 만화책 공포의 외인구단이나 TV 시리즈 맥가이버의 활약상을 침 튀겨가며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 듯 모험담을 떠벌이고 있었다.
그랬다. 아이들은 곧 닥칠 기말고사와 방학 사이의 그 묘한 해방감에 취해 날뛰고 있었다.
나는 텅 빈 다연이의 책상을 떠올리며, 처음으로 시간의 불공평함을 깨달았다.
누군가에게는 말뚝박기 한 판에 목숨을 거는 눈부신 아침이었지만,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이를 잃고 우주의 끝으로 떨어지는 영원한 밤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 활기찬 야만성이 가득한 교실에서, 오직 나만이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기분이었다.
아이들의 함성과 먼지가 가득한 그 소란스러운 은하계 속에서, 다연이의 빈자리만이 유독 진공 상태처럼 고요했다. 어제 옥상에서 내 어깨에 닿았던 다연이의 머리카락 무게와, 내 셔츠를 적셨던 그 뜨거운 눈물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한데, 세상은 어쩜 이렇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굴러갈 수 있는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나는 가방에서 얇은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태경이 형이 군대 가기 전에 나에게 준 어린 왕자였다.
책 속의 어린 왕자는 자신의 별을 떠나 여러 별을 여행했다.
그날 아침, 나 역시 내가 살던 '소년의 별'을 떠나, 슬픔과 책임이라는 중력이 작용하는 '어른의 별'로 강제 전학을 가고 있었다. 그 책은 '넌 이제 어제와 같은 아이로 돌아갈 수 없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내 안의 적막은 더욱 깊어만 갔다.
손가락으로 책장을 스르륵 넘기고 있을 때 기남이가 엉거주춤 다가왔다.
"야, 서진아! 오늘 수업 끝나고 태경이 형 장례식장에 같이 갈래?"
기남이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교실 끝까지 울려 퍼지는 호쾌한 톤이 아니었다.
마치 선생님 몰래 수업 시간에 도시락을 까먹는 아이처럼, 혹은 고해성사를 하는 죄인처럼 녀석의 목소리는 낮고 눅눅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매점에 새로 나온 메뉴'나 '만화책'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기남이의 입에서 '장례식장'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우리 주위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멈춰 선 기분이었다.
"야, 박기남. 네가 웬일이냐? 그런 어른스러운 생각까지 다하고?"
내가 애써 무거운 마음을 감추며 농담조로 던졌지만, 기남이는 책상 모서리를 손톱으로 긁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게... 어제 태경이 형 소식을 듣고 잠이 잘 안 오더라고. 다연이 생각도 나고. 마음이 영 찝찝해서 말이야."
그때였다.
석두가 소리 없이 우리 등 뒤로 다가와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도 갈게. 유덕화는 다른 사람의 슬픔을 그냥 넘기는 법이 없지. 그게 의리라는 거다. 이 녀석들아."
석두의 말에 기남이와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중학생 소년들이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다는 건, 방과 후 오락실 대신 도서관으로 향하는 것만큼이나 생경하고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우리는 다연이를 위로하는 법도, 어른들의 슬픔에 끼어드는 법도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 셋 중 누구도 오늘 이 교실의 야만적인 활기 속에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14살의 우정이란 종종 이토록 투박하고 뜬금없는 제안으로 완성되곤 한다.
기남이의 찝찝한 마음과 석두의 단순한 의리, 그리고 내 가방 속 어린 왕자가 품은 그 막막한 문장들이 모여 우리는 생애 첫 문상이라는 거대한 모험을 모의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 검은 양복도, 하얀 국화의 의미도 모르는 코흘리개들이었지만, 친구의 빈자리를 바라보는 고통만큼은 공유하고 있었다.
그건 학교에서 가르쳐준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누군가를 '길들였다면' 마땅히 책임져야 할 눈물의 몫이라는 것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아이들의 말뚝박기는 여전히 한창이었고, 누군가의 뼈 마디 부러지는 웃음소리가 교실을 뒤흔들었지만, 우리 세 사람의 시간은 이미 교문을 넘어 저 멀리 향 냄새 진동하는 지하 장례식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소년의 별을 떠난 세 명의 어린 왕자들은 그렇게, 서로의 어깨에 의지해 미지의 행성을 향한 첫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우리는 수업을 마치고 아버지와 엄마가 먼저 가있는 군 병원에 안치된 태경이 형 장례식장을 향해 버스를 탔다.
지하 계단 끝에 닿았을 때 우리가 마주한 것은 동네 할아버지들의 구수한 육개장 냄새가 아니었다.
그곳엔 서늘한 에어컨 바람 대신 눅눅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짙은 국방색 군복을 입은 청년들이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가방끈을 꽉 쥐었다.
그들의 각 잡힌 베레모와 광택이 나는 전투화는 14살 소년들의 흙먼지 묻은 운동화와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장례식장 지하 복도에서 나는 입구에서 낯익은 실루엣을 보았다.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아버지와 수수한 검은 치마저고리를 입은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다연이 아버지의 어깨를 으스러지도록 꽉 쥐고 계셨고, 어머니는 통곡하다 실신 직전인 다연이 어머니 곁에서 묵묵히 손수건을 건네며 그 무너지는 몸을 받쳐내고 계셨다.
"서진아, 왔니?" 나를 발견한 어머니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다가와 내 어깨를 짚으셨다.
"다연이 저기 있다. 가서... 손이라도 꼭 잡아줘라."
우리가 장례식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다연이의 아버지가 군 관계자들과 낮은 목소리로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사복을 입은 사내들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조문객들을 훑어보는 풍경 속에서, 우리는 태경이 형의 죽음이 단순히 '사고'라는 단어에 담길 수 없는 복잡한 슬픔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장례식장 정면에는 군복을 입고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태경이 형의 영정 사진이 걸려 있었다.
다연이는 영정 사진 옆, 구석진 자리에 작은 점처럼 앉아 있었다.
제 몸보다 커 보이는 검은 상복을 입은 채, 다연이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 초점 없는 눈으로 문상객들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힘없이 보고 있었다.
"야... 우리 진짜 들어가도 되는 거 맞냐?"
기남이가 내 옷소매를 당기며 속삭였다. 평소엔 동네 대장 노릇을 하던 석두도, 그 위압적인 분위기 앞에서는 굳어버린 채 헌병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나는 가방 속 어린 왕자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한 걸음을 뗐다.
우리가 넘어야 할 것은 장례식장의 문턱이 아니라, 태경이 형을 데려간 그 거대하고 차가운 어른들의 세계였다.
그때, 넋이 나간 듯 바닥만 보고 있던 다연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군복 입은 어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땀에 절어 꾀죄죄한 교복 반바지를 입고 엉거주춤 서 있는 우리를 발견한 순간, 다연이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마치 현실감이 거세된 흑백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색깔이 있는 존재들을 발견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다연이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군인들의 시선을 뚫고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다연이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어제 옥상에서 소리 없이 눈물만 흘리던 그 정적인 슬픔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댐이 무너지기 직전의 거대한 진동 같았다.
“너네... 너네 여기 왜 왔어.”
다연이가 우리 앞에 멈춰 서서 쥐어짜듯 내뱉은 첫마디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 다연이가 내 교복 셔츠 깃을 꽉 움켜쥐었다.
“왜 왔냐고... 바보들아...!”
다연이는 내 가슴팍에 머리를 묻고 오열을 터뜨렸다.
교복 셔츠가 순식간에 눈물로 젖어 들어갔다.
나는 어제 옥상에서처럼 조심스럽게 팔을 들어 다연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석두와 기남이도 약속이라도 한 듯 다연이의 곁을 바짝 에워쌌다.
군인들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작은 울타리를 만들었다.
우리는 다연이에게 다가가 '힘내'라는 말을 건네는 대신, 그 차가운 군인들의 숲 한복판에 함께 서 있어 주기로 했다. 그것이 우리가 세상의 거대한 불공평함에 맞서 낼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슬픔의 중력이 지배하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서로의 체온에 의지해 그 모진 밤을 견뎌내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국방색 군복들 사이로 번지던 우리들의 서툰 포옹은 우리가 어른이 되기 전 마지막으로 부렸던 고집이자, 가장 진실했던 애도였는지도 모른다.
장례식이 끝나고 돌아온 동네는 기이할 정도로 평온했다.
은하빌라 앞 골목에는 여전히 아이들이 던져놓은 딱지 몇 장이 굴러다녔고, 저녁 무렵이면 어김없이 밥 짓는 냄새가 창문을 타고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익숙한 풍경 속에서 다연이의 존재만이 지우개로 지운 듯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다연이가 학교에 나오지 않는 일주일 동안, 나의 시간은 마치 고장 난 금성사 카세트테이프처럼 자꾸만 특정 대목에서 씹힌 채 헛돌고 있었다.
나는 매일 아침 4반 복도를 지났다.
아이들은 여전히 말뚝박기를 했고, 새로 나온 연예가 소식에 열을 올렸다.
다연이의 빈 책상은 이제 아이들에게 일종의 '무관심한 가구'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14살들의 기억력이란 이토록 잔인할 만큼 휘발성이 강한 것이었다.
나는 방과 후면 습관처럼 은하빌라 옥상으로 향했다.
다연이가 앉아 있던 파란 물탱크 옆 콘크리트 바닥은 한낮의 열기를 머금어 뜨거웠다.
나는 그곳에 앉아 태경이 형이 준 어린 왕자를 펼쳤습니다.
형이 밑줄을 그어놓은 문장들이 이제는 단순한 글자가 아니라, 내 살을 파고드는 가시처럼 느껴졌다.
“내 별은 너무 작아서 내가 어디 있는지 보여줄 수가 없어. 하지만 내 별은 다른 모든 별 중의 하나가 될 거야. 그럼 넌 모든 별을 바라보는 게 즐거워질 거야.”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1988년 서울의 하늘은 뿌연 매연으로 가득했지만, 나는 그 너머 어딘가에 태경이 형의 별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리고 다연이가 지금 머물고 있을 그 깊고 어두운 슬픔의 행성도 어딘가에서 조용히 자전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연이가 없는 일주일은 내 인생에서 가장 긴 공백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소꿉친구 한 명이 결석한 기간이 아니라, 내가 당연하게 믿어왔던 세상의 질서가 무너진 후 그것을 다시 조립해야 하는 수련의 시간이었다.
나는 기남이와 석두가 오락실 가자고 부추기는 소리를 뒤로한 채, 매일 옥상에서 다연이의 빈자리를 지켰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 사람의 부재가 남긴 구멍을 내 마음으로 메우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 깨달았다.
어린 왕자가 자신의 장미를 위해 쏟은 시간 때문에 그 장미가 소중해진 것처럼, 다연이가 돌아오지 않는 그 길고 지루한 시간 동안 나는 역설적으로 그녀가 내 삶에 얼마나 깊이 길들여졌는지를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7월은 그렇게 잔인할 만큼 푸르렀고, 나는 매일 저녁노을이 질 때까지 옥상에 앉아 보이지 않는 별들을 세었다.
여름 방학을 코앞에 둔 어느 월요일 아침이었다.
여느 때처럼 습관적으로 복도에서 4반 창가로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그곳에 맺혀 있던 진공 상태의 고요가 깨졌음을 직감했다.
먼지 섞인 아침 햇살이 비껴드는 창가 자리, 다연이가 앉아 있었다.
일주일 사이에 다연이는 조금 더 마른 듯했고, 얼굴은 여름의 열기조차 닿지 못한 듯 창백했다.
아이들의 떠들썩한 웃음소리와 칠판을 닦는 소리,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호루라기 소리 사이에서 다연이는 마치 폭풍우가 지나간 자리에 홀로 남은 작은 나무처럼 위태롭지만 단단하게 서 있었다.
나는 한참을 4반 문턱에서 서성이다가, 가방 속에서 며칠 내내 손때가 묻도록 만지작거렸던 책 한 권을 꺼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다연이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내 그림자가 다연이의 책상 위를 덮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태경이 형이 남긴 어린 왕자를 다연이 앞에 내려놓았다.
"다연아."
내 목소리는 어색하게 갈라졌다.
다연이는 책 표지에 적힌 어린 왕자라는 글자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마치 그 글자 속에 숨겨진 오빠의 목소리를 찾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태경이 형이... 소중한 건 눈에 보이지 않는대. 근데 나는, 네가 다시 여기 보이는 게... 너무 다행이라서."
그건 세련된 위로도, 철학적인 통찰도 아니었다.
그저 지난 일주일 동안 옥상 위에서, 그리고 텅 빈 책상을 보며 내가 삼켰던 가장 투박한 진심이었다.
다연이는 떨리는 손으로 책을 어루만지더니, 아주 천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가에 맺힌 이슬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고마워, 서진아. 정말로... 보고 싶었어."
1988년의 그 아침, 우리는 서로에게 건넨 짧은 말 한마디로 우리가 살던 소년의 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비록 그 별은 예전처럼 마냥 천진난만하고 즐거운 곳은 아니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이 중력처럼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고, 언제든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불안한 행성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슬픔은 지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짊어지고 걷는 것이라는 걸.
어린 왕자가 자신의 별에 핀 단 한 송이의 장미를 책임지기 위해 그 먼 우주를 돌아왔듯이, 우리도 각자의 상처를 품은 채 서로를 지키며 어른이 되어갈 준비를 마친 것이었다.
교실 밖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여전히 말뚝박기를 하며 비명을 질러댔고, 매미 소리는 세상을 다 태울 듯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 소란스러운 우주의 중심에서, 나와 다연이는 낡은 책 한 권을 사이에 두고 세상에서 가장 고요하고 따뜻한 악수를 나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