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의 성전에 불어닥친 불일치
1학기 중간고사가 끝나고 석두와 기남이의 허세에 질세라 처음으로 발을 들인 당구장은 이제 마치 동네 오락실처럼 거리낌 없이 들락거리게 되었다.
1988년의 중학생들에게 당구장이란 단순히 공을 굴리는 곳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욱한 담배 연기와 어른들의 은밀한 언어가 뒤섞인, 미성년자 출입 금지라는 붉은 딱지가 붙은 금단의 성전 같은 것이었다.
태경이 형의 두 번째 편지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무렵, 기남이와 나는 이미 그 성전의 독실한 신도가 되어 있었다.
당구에 빠진다는 건 일종의 기하학적 중독이었다.
세상의 모든 평면이 초록색 천으로 덮이고, 모든 둥근 물체가 회전값을 가진 입자로 보이기 시작하는 지독한 환각의 시작이었다.
그날 이후, 나의 눈은 정상적인 기능을 상실했다.
수학 시간, 칠판 앞에 선 수학 선생님의 분필 소리는 더 이상 공식으로 들리지 않았다.
“자, 이 삼각형의 내각을 구해보면...”
선생님이 칠판에 긋는 하얀 직선은 내 눈엔 완벽한 쓰리쿠션의 궤적이 되었고, 책상 위에 연필을 큐대처럼 비스듬히 쥐고, 교과서에 인쇄된 마침표들을 향해 가상의 회전을 걸기도 했다.
머릿속에선 이미 복잡한 물리 공식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기남이의 수학 실력은 당구대 위에서 꽃을 피웠다.
수학실력과 당구 실력이 비례할리 없건만 그럼에도 기남이의 당구 실력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나고 있었다.
그 녀석은 수업 중에도 연습장에 복잡한 각도를 계산하며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서진아, 저 칠판지우개를 1/3 두께로 맞춰서 밀어치면, 분필 가루가 정확히 선생님 안경 앞으로 모일 것 같지 않냐? 각도는 정확히 45도, 시네루(회전)는 3시 방향.”
석두는 “야, 오늘은 ‘오시(밀어 치기)’의 미학을 전수해 주마.”라며 우리를 아리랑 당구장의 어두운 지하 계단으로 인도했다.
14살 소년들에게 그 눅눅한 곰팡이 냄새는 에르메스 향수보다 치명적이었고, 초록색 당구대 위로 쏟아지는 형광등 불빛은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의 조명보다 찬란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풍경이었다.
칠판을 보며 각도를 재고, 지우개로 쿠션을 연구하던 그 시절의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그렇게 간절히 도망치고 싶었던 걸까.
“야, 오늘은 내가 밀어 치기를 제대로 보여줄라니까 다들 수업 끝나고 그냥 집에 가기 없다!” 기남이는 프로 당구 선수라도 된 양 거들먹거렸다.
그 녀석은 이미 모범생이라는 허물이 어느 정도 벗겨진 상태였다.
석두는 옆에서 연신 “오, 기남 군! 역시 수학을 잘하니까 당구 각도도 잘 보네!”라며 바람을 잡았다.
우리는 자욱한 담배 연기 사이로 짜장면을 비비며, 세상에서 가장 쿨한 사나이가 된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석두가 건넨 큐대를 잡고 내가 멋들어지게 자세를 잡으려던 그 찰나였다.
“... 최 대리! 전화 끊지 말고 대기해! 관세사 들어오면 바로 보세창고로 팩스 쏠 거니까! 그리고 영업 2팀 최 대리에게 이번 바이어 건은 어떻게 됐나 확인해 줘. 당연히 급한 건이잖아.”
당구장 구석, 카운터 쪽에서 전화기를 든 남자의 익숙하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욱한 연기 너머로 서서히 드러난 인물의 실루엣에 나는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부림전자 해외 영업부 정한수 부장님,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인생이라는 복잡한 기하학 속에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좌표들이 존재한다.
금지 구역에 버젓이 들어간 중학생 아들과, 수출 역군으로 전 세계를 누비던 아버지가 자욱한 담배 연기 속의 아리랑 당구장에서 조우할 확률 같은 것 말이다.
요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두고 "아빠가 왜 거기서 나와?"라며 웃어넘기겠지만, 1988년 그해 여름의 나에겐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우주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빅뱅의 순간이었다.
중동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 항구로 향할 예정이었던 컬러텔레비전 2,000대.
선적은 이미 끝났고 배는 출항 직전이었지만, 은행에서 청천벽력 같은 연락이 왔다.
수입국에서 개설한 신용장에는 모델명이 ‘CTV-14R’로 되어 있는데, 아버지가 보낸 선적 서류(B/L)와 송장에는 ‘CTV-14’라고만 적혀 있었던 것이다.
모델명 끝에 붙은 단 한 글자 ‘R’이 실종된 것이었다.
그것은 리모컨의 유무를 뜻하는 결정적인 표기였다.
사우디 세관과 은행은 이 'R' 한 자가 빠진 것을 두고 계약 조건 위반, 즉 디스크레판시(Discrepancy /불일치)를 선언하며 서류 인수를 거부했던 것이다.
“최 대리! 사우디 쪽 수입업자가 리모컨 없는 구형 모델을 보냈다고 우기면 우리 네고(은행 입금) 안 돼! 그럼 이번 수출 대금 20만 달러 다 날리는 거야!”
아버지는 당구장 카운터에 놓인 낡은 다이얼 전화기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듯 외치고 있었다.
우리 학교 근처에 있던 대성 관세사 사무소 직원이 세관에 뛰어가 서류를 정정하고 다시 직인을 받아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는 그 1분 1초가 말라죽을 것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대성 관세사 사무소는 고장 난 에어컨과 전송 불능의 팩스기 탓에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바로 옆 당구장으로 피신해 전화기 한 대에 매달려야 했다.
수화기 너머로 고함을 치며 현장을 지휘하던 아버지에게, 그 낡은 당구장은 20만 달러의 운명을 짊어진 단 하나의 관제탑이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땀에 젖어 살갗이 비치는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담배를 연신 태우며 관세사 직원이 언제 나타날지 목이 빠져라 문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가 전화통에 매달리고 있던 순간에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당구장에 들어왔고 늘 하던 대로 구석진 빈 당구다이에서 진검 승부를 겨루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관세사 직원을 기다리는 숨 막히는 순간에도 무의식적으로 만지작거리던 건 전자수첩 카탈로그였다.
그 시절 우리에게 전자수첩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마치 우주선에서 떨어진 부품처럼 경이로운 물건이었다.
샤프나 카시오 같은 로고가 박힌 그 은색의 플라스틱 껍데기는, 잉크 냄새나는 종이 수첩의 시대를 끝내고 우리를 21세기로 데려다 줄 유일한 티켓처럼 보였다.
내가 아버지에게 전자수첩 카탈로그를 들이밀며 했던 말은 지금 생각해도 꽤나 그럴싸했다.
“아빠, 이제 종이 사전 넘기면서 단어 찾는 시대는 끝났대요. 수학 문제 풀 시간도 부족한데, 영어 단어 하나 찾으려고 그 두꺼운 동아 프라임 사전을 뒤지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에요. 이 전자수첩에는 영어 단어 3,000개가 수록되어 있어서, 버튼만 누르면 1초 만에 뜻이 나와요. 아빠 회사처럼 세계를 무대로 일하려면 영어가 필수잖아요.”
사실 그 안에는 영어 단어보다 석두가 알려준 당구 3쿠션 각도 계산법이 더 많이 채워질 예정이었지만, 아버지는 그 효율이라는 단어에 흔들리셨던 것이 분명했다.
해외 영업부에서 콩글리시와 사투를 벌이며 서류 뭉치에 파묻혀 사는 아버지에게, 아들이 디지털의 힘을 빌려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인재가 된다는 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피 마르는 수출 서류 정정 대기 시간에도, 제가 건넨 그 꼬질꼬질한 카탈로그를 보물처럼 쥐고 계셨던 것이다.
당구장 카운터 전화기를 붙잡고 있던 아버지는 내가 형광펜으로 동그라미를 쳐놓았던 고성능 영어 사전 기능 탑재라는 선명한 문구에 시선을 꽂아 놓고 계셨다.
아버지는 그 작은 은색 기계가 아들의 무거운 책가방을 가볍게 해 주고, 단어 하나를 더 빨리 외우게 해서, 결국 자신처럼 먼지 나는 보세창고가 아닌 깨끗한 사무실로 보내줄 마법의 열쇠라고 믿으셨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글로벌 인재 후보생인 나는, 아버지가 사줄 전자수첩에 입력할 영어 단어를 외우는 대신 당구대 위에서 큐대로 시네루를 주는 법을 익히고 있었다.
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발견했을 때, 카탈로그 속에서 은색으로 빛나던 그 찬란한 미래는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
그때 아버지의 눈빛은 분노보다 깊은 배신감으로 일렁였다.
영어 사전을 사달라며 눈을 빛내던 아들이,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서 큐대를 쥐고 서 있는 모습.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카탈로그를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그 빳빳한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는, 그날 밤 제 종아리에 가해질 회초리 소리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서... 서진아?”
전화기를 든 아버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뜨거웠던 오후, 그 시간, 그 장소라는 수억 분의 1이라는 확률을 뚫고 만난 우리 부자의 좌표는 결코 마주쳐서는 안 될 아리랑 당구장이라는 낡은 좌표 위에서 최악의 교집합을 만들고 있었다.
그건 수학의 그 어떤 난제보다 복잡한 함수였다.
아들에게 늘 학생의 본분을 강조하며 태경이 형의 시위를 못마땅해하던 아버지와, 아버지를 피해 진짜 사나이가 되겠다며 당구장에 온 아들.
석두와 기남이는 이미 돌부처처럼 굳어버렸고, 나는 너무 놀라 큐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때 마침 당구장 카운터 너머로 문이 급하게 열리면서 땀에 젖은 관세사 사무소 직원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세관의 붉은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CTV-14R'이라고 정확히 수정된 정정 승인서가 들려 있었다.
“부장님! 됐습니다! 지금 바로 보세창고로 팩스 넣었습니다. 선적 이상 없습니다!”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그 서류를 받아 확인했다.
마침내 사라졌던 'R'의 저주가 풀리고, 20만 달러의 수출 대금이 안전하게 입금될 것이 확정된 순간이었다.
아버지는 수화기를 들고 본사의 최 대리에게 마지막 승전보를 전했다.
“최 대리, 상황 끝났어. 수고했어. 퇴근해. 나도 여기서 바로 현장 퇴근한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아버지의 어깨에서 거대한 짐 하나가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 빈자리를 채운 건, 조금 전까지 업무의 긴장감에 가려져 있던 아버지로서의 분노였다.
아버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20만 달러를 지켜낸 영웅의 눈빛은, 이제 탈선한 아들을 심판하는 준엄한 검사의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정... 서진.”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내 뒷덜미를 낚아챘다.
석두와 기남이는 이미 혼비백산하여 사라진 지 오래였고, 나는 아버지가 뿜어내는 짙은 쾌남 스킨 향과 승리의 열기, 그리고 차가운 분노가 뒤섞인 공기에 압도되어 숨조차 크게 쉬지 못했다.
“너, 여기가 어디라고 와? 공부하라고 과외까지 시켜놨더니 여기서 불량배 놀이나 하고 있어?”
퇴근 시간의 혼잡한 153번 버스 안에서, 아버지는 손잡이를 꽉 쥔 채 창밖만 바라보셨다.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아버지의 굵은 팔뚝에 솟은 힘줄이, 곧 내 종아리에 가해질 매서운 회초리를 예고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영진이 형에게는 몇 차례 회초리를 드신 적은 있었지만 막내인 내게 한 번도 회초리를 대지 않으셨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직감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생애 처음으로 가장 무거운 매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버스에서 내린 아버지는 성큼성큼 앞서 걷기 시작하셨다.
평소보다 두 배는 더 빨라진 그 걸음걸이는, 당신이 밖에서 겪어낸 치열한 생존의 속도였다.
나는 그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하며,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버지의 그림자를 밟으며 끌려갔다.
아버지의 구두 굽이 보도블록에 부딪히며 내는 '탁. 탁.' 소리는, 곧 종아리에 내려앉을 회초리의 예고편처럼 규칙적이고 단호했다.
아버지는 1분 1초를 다투며 20만 달러짜리 수출 서류를 바로잡기 위해 온몸을 던졌는데, 그 결과물로 지켜낸 아들은 고작 지하실 연기 속에서 큐대나 휘두르고 있었다는 사실.
그 지독한 디스크레판시 (Discrepancy/불일치)가 아버지의 넓은 어깨를 더욱 팽팽하게 긴장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골목 어귀에 들어섰을 때,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아버지의 회초리보다 백 배는 더 차갑고 날카로운 통곡 소리였다.
옆집 다연이네 대문 앞에는 검은색 군용 지프차 한 대가 흉물스럽게 서 있었고, 마당에서는 세상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슬픈 울음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다연이네 대문 앞에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저앉아 계셨다.
아버지는 화가 난 목소리로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여보, 이 녀석 좀 봐! 당구장에서 큐대 잡고 노는 걸 내가 잡아왔어. 오늘 내가 아주 버릇을 고쳐놓을...”
하지만 아버지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어머니가 고개를 들어 옆집을 가리켰을 때,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렸다.
“여보... 태경이가, 옆집 태경이가 죽었대요. 군대에서... 사고가 났대요.”
순간, 모든 소음이 음소거된 것처럼 정적이 찾아왔다.
씩씩거리던 아버지의 숨소리가 멎고, 대신 그 자리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낮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나를 혼내려던 아버지의 손은 허공에서 갈 길을 잃고 있었다.
1988년의 대한민국은 국가 전체가 거대한 분장실과도 같았다.
올림픽이라는 화려한 무대 뒤에서 사람들은 가난을 가리고, 상처를 덮고, 모두가 행복하다는 가면을 쓴 채 군무를 췄다.
하지만 그 화려한 조명등 아래로 흐르던 어두운 하수구에는, 차마 박수 소리에 섞이지 못한 비명들이 고여 있었다.
태경이 형의 죽음은 그해 여름, 국가가 작성한 가장 잔인한 오답 중 하나였다.
군에서 날아온 부고장에는 훈련 중 급성 심장마비라는 몇 글자가 전부였다.
평소 대학가 전체를 종횡무진하며 전경들을 피해 뛰어다녔어도 숨 하나 차지 않던 스무 살 청년이, 고작 훈련 중에 심장이 멎었다는 그 명료한 사인은 우리 가족과 다연이네 식구들에겐 도저히 풀 수 없는 기괴한 고차방정식과 같았다.
하지만 훗날, 역사의 가려진 페이지들이 하나둘씩 들춰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알게 되었다.
형의 심장을 멈추게 한 건 뙤약볕 아래의 구보가 아니라, 형의 가슴팍에 찍혀 있던 학생 시위 경력이라는 주홍글씨였다는 것을 말이다.
그 시절 군대는 거대한 세탁기와도 같았다.
체제에 반대했던 청춘들의 생각을 뜯어고친다는 명목하에 자행되던 이른바 녹화사업의 서슬 퍼런 칼날은, 태경이 형처럼 곧은 대나무 같은 청년들을 가장 먼저 겨눴다.
시위에 가담했던 경력을 문제 삼은 내부의 가혹행위는 밤마다 내무반 구석에서, 혹은 인적 드문 연병장 뒤편에서 은밀하고도 집요하게 계속되었다.
형은 아마 그곳에서 홀로 싸우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형의 심장이 멈춘 건 의학적인 결함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가할 수 있는 가장 야만적인 폭력이 한 청년의 영혼을 통째로 으깨버렸기 때문이었다.
국가는 금메달의 개수를 세며 환호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 국가가 던진 거짓말이라는 돌에 맞아 부서진 한 집안의 조각들을 주워 담아야 했다.
심장마비라는 사인은 국가가 정한 가장 편리한 정답이었고, 그 정답 뒤에 숨겨진 가혹행위라는 진실은 1988년의 그 뜨거운 아스팔트 아래에 오랫동안 매몰되어 있었다.
열네 살의 나는 당구대 위에서 각도를 재며 인생을 낙관하고 있었지만, 태경이 형은 그 지독한 어둠 속에서 홀로 진실이라는 무거운 짐을 진 채 소멸해가고 있었다.
다연이에게 보냈던 잘 지낸다는 형의 편지는 동생을 안심시키기 위한 마지막 거짓 정답지였음을, 우리는 그제야 깨달았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우리 집도 초상집이나 다름없었다.
어머니는 옆집을 오가며 같이 울었고, 아버지는 밤새 베란다에서 담배만 태웠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14년이 넘게 이웃으로 살았다.
나와 다연이가 엄마 뱃속에 나란히 들어 섰을 때부터 두 엄마는 대문을 열어놓고 태교를 함께했다고 했다.
다연이 엄마가 진통을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가 산파 역할을 자처하며 미역국을 끓여낸 것은 우리 엄마였고, 내 백일잔치 때 수수팥떡을 빚어 무병장수를 빌어준 것은 다연이 엄마였다고 했다.
그 14년의 세월 동안, 태경이 형은 우리에게 언제나 완성된 형의 모습으로 존재했었다.
우리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때 형은 이미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다니던 의젓한 초등학생이었고, 우리가 구구단을 외우느라 쩔쩔맬 때 형은 정석 책을 끼고 방정식을 풀던 천재였다.
내 기억 속의 태경이 형은 소꿉장난을 하던 우리를 향해 "서진아, 다연아! 아이스크림 먹자!"라며 불러내던 다정한 거인이었다.
밤새 베란다에서 담배를 태우시던 아버지의 거친 손에는 월남전 참전 당시 전우들과 찍은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사진 속 청년들은 찌는 듯한 정글 속에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지만, 그들 중 태극기를 덮고 돌아온 이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연신 담배 연기를 뱉어내며 사진 속 얼굴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셨다.
아마도 아버지는 죽음이라는 불공평한 파도에 휩쓸려간 그 어린 전우들의 얼굴 위로, 이제 겨우 스무 살을 넘긴 채 차가운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태경이 형의 얼굴을 겹쳐보고 계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태경이 형이 시위를 나갈 때마다 “공부나 하지 왜 저러냐?”며 혀를 차셨지만, 사실은 형의 올곧은 성품을 누구보다 아끼셨던 것 같다.
해외 영업부 부장으로 비굴하게 고개를 숙여야 했던 당신과는 달리, 세상의 부조리에 고개를 꼿꼿이 쳐들 줄 알던 그 청년의 기개를 내심 자랑스러워하셨는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내뱉는 담배 연기는 7월의 습한 공기를 뚫지 못하고 베란다 주위에 눅눅하게 머물렀다.
그것은 자식을 먼저 보낸 이웃의 고통에 대한 무력한 공감이기도 했고, 앞으로 살아갈 내 아들이 마주할 세상에 대한 공포이기도 했을 것이다.
“... 서진아, 가서 다연이 좀 챙겨줘라. 다연이도 많이 힘들 거야.”
아버지가 어둠 속에서 낮게 읊조렸다.
그건 내게 내리는 명령이 아니라, 당신이 차마 다연이네 가족에게 건네지 못하는 미안함과 위로를 대신 전해 달라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다연이를 찾아 집을 나섰을 때, 나는 뜻밖의 장소에서 우리 집의 골칫덩이 영진이 형을 마주했다.
평소 같으면 “야, 좁밥! 너 또 어디 가서 헛발짓하려고 이 밤에 돌아다녀?”라며 내 뒤통수를 갈기거나, 있지도 않은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나를 괴롭혔을 형이었다.
두 살 위라는 이유로 세상 모든 이치를 통달한 척하던, 중학교의 허세 끝판왕 영진이 형 말이다.
형은 전봇대 옆, 호돌이 포스터가 붙어 있는 낡은 담벼락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평소 형이 사나이의 보물이라며 끔찍이 아끼던 맥가이버칼로 담벼락을 의미 없이 긁어대고 있었다.
“... 야, 정서진. 너도 알지?”
형이 나를 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목소리엔 평소의 그 가당치 않은 자신감이 쏙 빠져 있었다.
“어... 응?”
“... 쳇, 태경이 형 말이야. 나 고등학교 가면 오토바이 타는 법 가르쳐준다고 했거든. 그 형, 진짜 뻥쟁이 아니냐? 약속도 안 지키고...”
형은 코끝을 훌쩍이더니, 갑자기 담벼락을 발로 ‘쾅’ 하고 걷어찼다.
“아, 씨팔! 덥기는 왜 이렇게 더워!”
형은 화를 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나는 보았다.
담벼락을 걷어찬 형의 운동화 끝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허세로 가득 찬 16살 소년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애도는, 그렇게 애꿎은 벽을 걷어차며 태경이 형을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는 것뿐이었을지도 모른다.
형은 내가 더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뭘 봐, 인마! 가서 잠이나 자!”라며 쌩하니 골목 저편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형이 긁어놓은 담벼락에는 태경이 형의 이름 세 글자가 삐뚤빼뚤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는 다연이가 있을 곳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어릴 때 자주 갔던 뒷산 정자에도, 동네에 유일했던 작은 놀이터에도 다연이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놀이터 미끄럼틀을 바라보다가 다연이가 있을만한 마지막 공간을 생각해 냈다.
뒷산 올라가는 입구 옆쪽에 우뚝 서있는 4층 건물, 은하빌라.
당시 평범한 단독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우리 동네에 어느 날 갑자기 솟아오른 은하빌라는 우리 동네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자, 가장 세련된 욕망의 결정체였다.
4층이라는 높이는 당시 우리에게 구름에 닿을 듯한 고도였고, 그 옥상은 세상의 모든 소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우리들만의 유일한 섬이기도 했었다.
1층과 2층 높이의 고만고만한 지붕들 사이에서, 은하빌라의 옥상은 동네의 모든 비밀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지적 시점의 관찰대였다.
그곳에 올라가면 옆집 마당의 빨랫줄은 물론이고, 멀리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의 움직임까지 손바닥 보듯 훤히 보였다.
어느 화창한 일요일 오후, 입대를 앞둔 태경이 형은 다연이와 나를 이끌고 은하빌라 옥상으로 올라갔다.
형의 겨드랑이 사이에는 종이 질이 좋은 두툼한 서양철학개론 원서가 끼어져 있었다.
옥상 난간에 도착하자마자 태경이 형은 싱긋 웃으며 그 두꺼운 대학 전공 서적을 펼쳤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첫 장을 '북-' 하고 찢어냈다.
나와 다연이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당시 전공 서적 한 권은 중학생인 나의 두 달 치 용돈을 몽땅 털어도 못 살 만큼 비싼 물건이었고, 공부가 가난을 벗어날 유일한 비상구였던 우리 동네에서 책을 찢는다는 건 일종의 신성 모독에 가까웠으니까 말이다.
“형! 미쳤어? 그 비싼 책을 왜 찢어! 그거 전공 책 아니에요?”
“서진아, 너 전에 철학과가 뭐 하는 데냐고 물어본 적 있잖아? 형이 보여줄게. 철학이 뭐 하는 건지 말이야.”
형은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또다시 책의 두 번째 장을 과감하게 '북-' 하고 찢어냈다.
칸트니, 헤겔이니 하는 이름들이 적힌 상아색 페이지가 형의 손길에 속수무책으로 뜯겨 나갔다.
“잘 봐. 어른들은 이 책 안에 정답이 들어있다고 말해. 그런데 형이 생각하는 철학은 말이야... 이 무거운 정답들을 찢어서, 아주 가볍게 날려 보내는 거거든.”
형은 그 반짝이는 종이로 비행기를 접은 후 우리를 향해 개구쟁이 소년처럼 웃었다.
"이건 종이비행기계의 그랜저가 아니라, 하늘을 나는 소크라테스라고 보면 된다."
형은 엉뚱한 궤변을 늘어놓으며 두 번째 장을 찢어 다연이에게, 세 번째 장을 찢어 나에게 건넸다.
"너희들도 비행기 접어봐. 누가 가장 멀리 날리는지 시합해 보자."
“오빠. 이걸 엄마가 아시면... 오빠는 군대 가기 전에 아빠한테 맞아 죽을지도 몰라.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 오빠가 더 잘 알잖아.”
다연이가 오빠의 팔을 붙잡으며 낮게 읊조렸다.
다연이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형이 건넨 빳빳한 전공 서적 한 장을 받아 든 그녀의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14살 소녀에게 그 종이는 너무나 무거웠을지도 모른다.
대학생 오빠의 미래, 아빠의 희망, 그리고 가난한 골목길의 자존심이 앞뒷면으로 빽빽하게 인쇄된 종이였으니까 말이다.
“... 정말 날려도 돼? 나중에 엄마가 물어보면 난 오빠 시켰다고 말할 거야. 정말이야.”
다연이는 그렇게 툴툴거리면서도, 누구보다 꼼꼼하게 종이를 접기 시작했다.
오빠의 엉뚱한 제안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가며 세상에서 가장 예쁜 미소를 짓듯, 다연이 역시 그 불온한 장난에 기꺼이 공범이 되기로 한 것이었다.
“오빠, 내 비행기가 오빠 것보다 더 멀리 가면... 나중에 면회 갔을 때 내가 먹고 싶은 거 다 사줘야 해. 약속해!”
그날 오후, 다연이는 오빠의 전공 서적을 찢으며 처음으로 금기 너머의 풍경을 보았다.
아빠의 기대라는 감옥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의 손으로 접은 날개가 어디까지 날아갈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우리는 옥상 난간에 나란히 서서, 세상에서 가장 비싼 철학들을 손에 쥐었다.
다연이의 눈동자에는 두려움보다 더 큰 호기심이, 그리고 5월의 태양보다 더 뜨거운 생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하나, 둘, 셋!”
다연이가 던진 비행기는 우아한 궤적을 그리며 5월의 바람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 순간, 다연이는 더 이상 명문대를 다니는 오빠를 둔 착한 동생이 아니었다.
자신의 꿈과 희망을 하늘로 쏘아 올린,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비행사였다.
우리는 옥상 아래로 흩어지는 하얀 종이 조각들을 보며 소리를 질렀다.
다연이의 웃음소리가 은하빌라 옥상을 가득 채울 때, 나는 보았다.
추락하는 비행기를 바라보는 다연이의 눈이 반짝이는 건, 언젠가 자신도 저 담장을 넘어 더 넓은 세상으로 날아가겠다는 소리 없는 다짐이었다는 것을.
다연이의 웃음소리가 은하빌라 옥상을 가득 채울 때, 우리 머리 위로는 정말로 소크라테스가 웃으며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태경이 형은 지는 노을을 배경으로 서서, 아직 우리 손에 남은 종이 뭉치들을 보며 말했다.
“나중에 내가 없더라도, 가슴이 답답하면 여기 와서 날려. 공부하기 싫거나 집에서 짜증 나는 일 있을 때 있잖아. 던져버리고 나면, 이상하게 기분이 좀 나아지거든. 잘 날고 못 날고는 별로 안 중요해. 그냥 내던지는 게 중요한 거지.”
지금 생각하면 그건 철학이라기보다 그저 철없는 형의 장난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4살의 우리에게 그날의 비행은 우리가 알던 세상의 틀이 깨지는 작은 경험이었다.
책은 꼭 읽어야만 하는 게 아니고, 가끔은 찢어서 날릴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소한 반항이 얼마나 짜릿한 위로가 되는지를 말이다.
형은 알고 있었을까? 훗날 우리가 진짜 슬픔을 마주했을 때, 그날 날렸던 빳빳한 종이비행기의 감촉이 우리를 버티게 해 줄 유일한 기억이 될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은하빌라 옥상으로 올라가는 철제 계단은 아직도 한낮의 열기를 머금어 뜨거웠지만, 물탱크 뒤편의 그림자는 묘하게 서늘했다.
다연이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7월의 매미 소리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울려 퍼졌지만, 다연이가 내뿜는 고요함은 그 소음들을 모두 집어삼키고 있었다.
“... 다연아.”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다연이는 대답 대신 어깨를 한 번 크게 들썩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다연이의 이가 부딪히는 딱딱 소리가 들려왔다.
열대야라고 방송에선 난리였는데, 다연이는 마치 냉동실에 갇힌 사람처럼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저기... 아빠가, 너 좀 찾아보라고 하셔서...”
나는 괜히 아버지 핑계를 댔다. 그게 열네 살 소년이 낼 수 있는 최선의 용기였으니까.
다연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퉁퉁 부은 눈, 엉망이 된 머리카락. 내가 알던 새침하고 예쁜 다연이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
“... 서진아. 나, 나 좀 이상해.”
다연이의 목소리가 가늘게 갈라졌다.
“자꾸... 자꾸 추워. 얼음물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 내 몸이... 내 몸이 안 멈춰.”
다연이는 자신의 팔을 감싸 쥐며 떨림을 멈추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몸은 더 크게 요동쳤다.
14살 소녀에게 오빠의 죽음은 슬픔이라는 단어로 정의하기엔 너무나 물리적인 통증이었다.
“... 이거, 전에 태경이 형이 준 박하사탕인데. 먹을래?”
나는 주머니에서 박하사탕을 하나를 까서 다연이에게 내밀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바보같이 내민 손이 허공에서 민망하게 흔들렸다.
다연이는 사탕을 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꺽꺽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그 울음소리는 옥상 바닥을 타고 내 발등까지 전달되는 것 같았다.
“오빠가... 오빠가 이제 못 온대. 엄마가 그랬어... 이제 오빠 방 치워야 한다고. 근데 나는... 나는 며칠만 지나면 오빠가 웃으면서 집에 올 것 같거든. 나 아직 오빠한테 빌린 만화책도 안 돌려줬는데... 이제 오빠는 집에 못 온다잖아.”
다연이의 말은 엉성하고 유치했다.
하지만 그 유치한 말들이 내 가슴을 더 아프게 찔렀다.
14살에게 죽음이란 영원한 부재 같은 거창한 개념이 아니라, '돌려주지 못한 만화책'이나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옆방의 기침 소리' 같은 지극히 사소한 것들의 상실이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