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플라타너스 그림자를 따라

자! 여름 방학이다.

by 한자루




돌이켜보면, 1988년의 여름은 마치 잘 익은 수박처럼 속이 꽉 찬 희망의 계절이었다.

9월에 열릴 올림픽을 앞두고 온 나라는 단군 이래 최대의 잔치 준비로 들떠 있었고, 우리 같은 중학생들에게 방학이란 수학 시험지나 지겨운 보충수업을 거대한 파도 속에 영원히 수장시켜 버릴 수 있는 유일한 면죄부였다.

당시 우리에게 방학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무한한 가능성이었다.

눅눅한 교실 바닥을 청소하고 마지막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1학년 중학생이 아닌 자유로운 탐험가가 되었다. 냉동실에 얼려둔 쥬시쿨 한 팩과 굴렁쇠 하나만 있으면 온 우주를 정복할 수 있을 것 같던, 그런 무책임하고도 찬란한 희망의 시간 말이다.


거실에는 지난 며칠 동안 태경이 형의 장례식으로 팽팽했던 긴장감 대신, 낡은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와 아버지가 넘기는 신문 소리만이 평화롭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소주를 한 잔 하시고 약간은 기분 좋게 붉어진 얼굴로 신문을 보고 계셨다.

나는 이때가 다시는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아빠, 저기... 지난번에 말씀드린 거 있잖아요. 그 전자수첩말인데요. 이번 기말고사에서 성적도 좀 올랐고, 방학 때 스케줄 관리도 좀 제대로 해보려고 하는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넘기던 신문을 멈추고 천천히 나를 쳐다보셨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며칠 전 아리랑 당구장에서 반으로 접어 넣으셨던, 꼬질꼬질한 전자수첩 카탈로그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두셨다.

아버지는 카탈로그의 굽어진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가만히 펴시더니, 나지막이 입을 여셨다.

“서진아, 1초 만에 단어를 찾아주는 그 기계가 네 가방을 가볍게 해 줄 순 있어도, 네 머릿속까지 채워주진 못할 것 같구나. 당구대 위에서 시네루를 주는 법이 더 중요한 너에게 그런 장난감 같은 전자수첩이 무슨 쓸모가 있겠니?”

순간, 자욱한 담배 연기와 큐대를 쥐고 있던 내 손, 그리고 배신감으로 일렁이던 아버지의 눈빛이 거실을 스쳐 지나갔다.

“영어 단어 3,000개? 그 버튼 누를 시간에 정석 한 문제라도 더 풀어라. 너 한 번만 더 그 꼬질꼬질한 카탈로그 들이밀면서 사기 칠 생각 마. 차라리 이번 휴가 때 이 카메라로 가족들 사진이나 찍어 봐라. 다시는 전자수첩의 ‘전’ 자도 꺼내지 마라. 알겠어? 만약 렌즈에 지문이라도 묻거나 잃어버리는 날엔... 그땐 전자수첩이 문제가 아니라 네 다리가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아버지는 서재에서 묵직한 가죽 케이스를 꺼내 내 무릎 위에 툭 던지듯 얹어 놓으셨다.

그것은 아버지가 애지중지하시던 캐논 AE-1 카메라였다.

“이 카메라, 이게 네가 말하는 그 장난감 몇 대 값인 줄 아냐? 이번 여행 가서 딴생각 말고 이 렌즈로 세상이나 제대로 찍어봐라. 그게 네가 말한 그 효율이라는 거다.”

아버지는 다시 신문 속으로 얼굴을 파묻으셨지만, 무릎 위에 놓인 카메라의 서늘한 금속 촉감은 나에게 어떤 협박보다 무겁게 다가왔다.

그것은 아버지의 소중한 유산인 동시에, 당구장에서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아오라는 일종의 엄중한 과제였다.

그렇게 나는 최첨단 디지털의 꿈 대신, 셔터를 누를 때마다 철컥하고 심장 소리처럼 묵직한 금속음이 들리는 아날로그의 유산을 어깨에 메게 되었다.


방학식이 있던 7월의 마지막 날, 나는 평소와는 다른 낯선 묵직함을 간직했던 가방의 무게를 아직 기억한다.

방학식이 끝나고 교문을 나서자마자 나는 참지 못하고 가방에서 그 묵직한 쇳덩이를 꺼냈다.

가죽 케이스 특유의 쿰쿰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와, 정서진! 그거 진짜 카메라 아니야?” 석두가 눈을 크게 뜨며 달려들었고, 기남이는 안경을 고쳐 쓰며 렌즈 앞을 가로막았다.

“야, 석두야. 렌즈 함부로 만지지 말어. 지문 묻어! 서진아, 이거 셔터 소리 장난 아니겠다. 한 장 찍어봐. 오늘 같은 역사적인 날은 기념으로 남겨둬야 해.”

기남이가 옆에서 들떠서 떠들어댔지만, 내 눈은 이미 교문 옆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서 멈춰 있었다.

그곳엔 다연이가 서 있었다.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다연이의 모습은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단정한 단발머리는 오후의 햇살을 받아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뽀얀 얼굴은 조금 창백해 보였지만 그래서인지 눈동자는 더 깊고 맑아 보였다.

마치 슬픔이라는 여과기를 거쳐 세상의 불순물을 다 걸러낸 듯한, 그런 투명한 아름다움이었다.

태경이 형을 잃은 고통이 다연이를 단숨에 소녀에서 여자로, 혹은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먼 곳을 보는 존재로 밀어 넣은 것만 같았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를 눈가로 가져갔다.

뷰파인더의 둥근 원 안으로 다연이가 들어왔다. 초점 링을 천천히 돌리자, 흐릿하던 플라타너스 잎사귀들이 선명해지더니 마침내 다연이의 눈망울에 초점이 맺혔다.

“다연아!”

내가 부르자 다연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뷰파인더 속에서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셔터가 눌러졌다. 찰칵!

예전의 명랑함 대신, 슬픔을 견뎌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은은하고도 단단한 미소가 렌즈를 투과해 내 가슴에 박혔다.

“안녕. 얘들아? 서진아. 그거 카메라야? 진짜 멋지다.”

다연이가 고개를 돌려 우리를 향해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한여름 오후의 뜨거운 아스팔트 위로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내 가슴을 시원하게 적셨다.

다연이가 다가오자 기남이가 내 등을 툭 치며 카메라를 뺏어 들었다.

“야, 정서진. 뭘 멍하니 있어? 오늘 같은 역사적인 날에는 사진을 찍어야 한다니까. 다연이랑 먼저 한 장 박아야지. 석두야, 비켜봐. 내가 찍어줄게.”

나는 얼떨결에 다연이 옆에 섰다.

푸르른 여름 햇살 아래, 플라타너스 잎사귀들이 흔들리는 그림자 속에서 다연이의 어깨가 내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다.

그녀의 짧은 단발머리 사이로 스치는 은은한 비누 향기가 내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다연이는 내 쪽으로 몸을 아주 조금 기울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자, 찍는다! 하나, 둘... 셋! ‘찰칵-’

묵직한 금속 셔터음이 푸르른 여름의 햇살 아래,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로 아득하게 울려 퍼졌다.

찰나의 순간, 렌즈를 통해 들어온 다연이의 미소와 그날의 정적에 가까운 공기가 필름 위에 선명하게 박혔다. 시간은 0.1초 만에 멈추었지만, 렌즈를 통해 들어온 다연이의 깊어진 눈동자와 그날의 정적에 가까운 공기가 필름 위에 선명하게 박혔다.


석두가 내 어깨를 밀쳐내며 기남이의 목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야, 박기남! 나도 찍어줘. 나 아까 칠판 앞에서 폼 잡을 때 봤지? 그게 진짜 사나이의 눈빛이라고. 자, 각도 잘 잡아라.”

석두는 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침을 한 번 꼴깍 삼키더니, 당구장에서 본 영화 주인공이라도 된 양 눈에 잔뜩 힘을 주었다. 기남이는 질색하며 안경을 밀어 올렸다.

“야, 너는 면적이 너무 넓어서 필름 낭비야. 이거 현상비 확률적으로 석두가 50% 정도는 부담해야 하는 거 아냐?”

둘은 서로 뷰파인더를 보겠다며 옥신각신했고, 그사이 다연이는 내 옆에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길게 늘어진 플라타너스 그림자를 따라 함께 걷기 시작했다.

“너희는 이번 방학 때 뭐 할 거야?”

다연이가 묻자, 석두가 기다렸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나? 난 이번 방학 때 진짜 사나이가 될 거야. 내일부터 바로 공사판 노가다 뛴다. 가서 벽돌 좀 나르고 삽질 좀 하면 팔뚝에 힘 좀 붙겠지?”

“뭐? 공사판?”

기남이가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석두는 진지했다.

“어. 거기서 번 돈으로 중고 오토바이 한 대 뽑을 거야. 그럼 유덕화처럼 흰색 셔츠 입고 바닷가 달릴 수 있잖아. 의리에 사는 남자가 그 정도 가오는 있어야지 않겠냐?”

석두의 엉뚱하지만 비장한 선언에 기남이가 혀를 차며 안경을 밀어 올렸다.

“넌 참 일관성 있어서 좋겠다. 난 독서실 총무 형이랑 협상 끝냈어. 제일 구석진 창가 자리 맡기로 했거든. 이번 방학엔 진짜 기하학의 끝을 볼 거야.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수학 올림피아드 국가대표를 뽑는다는 소문이 있단 말이야. 내가 거기 뽑혀서 호주 대륙에 태극기라도 꽂아야 우리 아버지가 나를 사람 취급해 주실 것 같거든.”

“야, 박기남. 너네 아버지 진짜 너무하시네. 98점 맞고도 사람 취급을 못 받으면, 45점 맞는 나는 벌레냐?”

석두의 물음에 기남이가 안경을 쓱 추켜올리며 툴툴거렸다.

“야, 우리 아빠는 100점 아니면 다 빵점인 줄 알아. 저번에 하나 틀렸을 때도 ‘너 정신을 어디다 두고 사냐’면서 일주일 동안 나랑 말도 안 섞으셨어. 진짜 숨 막혀서 못 살겠다니까.”

기남이는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툭 찼다.

“이번에 올림피아드 대표팀 뽑는다는데, 거기라도 붙어야 아빠가 나한테 공부하라는 소리 안 할 거 아냐. 호주까지 가서 상이라도 타 오면 그땐 나도 좀 내 마음대로 살 수 있겠지. 아빠가 나 볼 때마다 ‘너한테 들어간 돈이 얼마냐’는 소리 좀 안 듣게 말이야.”

석두는 멍한 표정으로 기남이를 바라보다가 툭 내뱉었다.

“올림피아드? 야, 그건 올림픽 나가는 애들이 하는 거 아냐? 너 그 말라비틀어진 몸으로 무슨 국가대표를 해. 그냥 독서실에서 엉덩이 진물이나 안 나게 조심해라.”

기남이는 석두의 무식함이 확률적으로 계산 불가라는 듯 고개를 저었고, 그 사이 다연이는 내 옆에서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맑은 웃음소리가 소란스러운 오후의 소음들 사이로 은하수처럼 흘러내렸다.


우리는 길게 늘어진 플라타너스 그림자를 따라 함께 걷기 시작했다.

두 소년의 엇갈린 포부가 여름 열기 속으로 흩어질 때쯤, 다연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내일 부산 할머니 댁에 가. 가족들이랑 다 같이 거기서 방학 보내기로 했어. 바다도 보고, 오빠 물건들도 정리하면서... 그냥 조용히 지내려고.”

다연이가 말한 부산은 단순히 할머니 댁이 있는 도시가 아니었다.

그것은 태경이 형의 흔적이 없는 곳, 혹은 그 흔적을 가장 경건하게 지울 수 있는 유배지 같은 곳이었다.

“속초 바다가 부산 바다보다 훨씬 파랗대. 서진아, 너 속초 바다 찍어오면 나중에 누구 바다가 더 예쁜지 내기하자.”

다연이는 짐짓 밝은 척 덧붙였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낙동강 하구를 지나 남해의 깊은 수평선 어디쯤을 헤매고 있는 듯했다.

나는 손에 쥔 카메라 케이스를 더 꽉 쥐었다.

다연이가 떠나려는 그 시간 속으로 내가 따라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아버지가 빌려준 이 낡은 렌즈로 그녀가 보고 싶어 할 바다를 가장 선명하게 담아 오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응. 그래. 내기하자. 세상에서 제일 파란색으로 찍어올게.”


다연이네 집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나는 빌라 앞 공터에서 기다리고 있던 석두와 기남이에게 돌아갔다.

두 녀석은 다연이가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참았던 본색을 드러냈다.

“야, 정서진. 너 아까 다연이랑 사진 찍을 때 입이 귀에 걸리더라? 아주 광대가 승천을 해요.”

석두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낄낄거렸다.

유덕화처럼 보이고 싶어 셔츠 깃을 한껏 세운 녀석의 목에는 벌써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뭐라는 거야. 야, 너나 노가다 조심해. 오토바이고 뭐고 다치면 끝이야.”

내 말에 석두는 가방을 고쳐 매며 호기롭게 대답했다. “걱정 마라. 이 형님 팔뚝에 알 배겨서 오면 너희들 다 내 오토바이 뒤에 태워줄 테니까. 대신 기남이 넌 공부하다 엉덩이 진물 나면 말해라. 내가 연고 사다 줄게.”

“됐거든요.” 기남이가 안경을 치켜세우며 대꾸했다.

“서진아, 너 카메라 관리 잘해. 그거 필름 감을 때 너무 세게 돌리지 말고. 그리고 아까 내가 등 안 밀었으면 너 다연이 옆에 서보지도 못했을걸? 사진 잘 나오면 다 내 덕분인 줄 알아라. 나중에 떡볶이라도 한판 쏴야 할 거다.”

“됐거든요.” 내가 핀잔을 주자 기남이는 끝까지 확률과 현상비를 읊조리며 돌아섰고, 석두는 “야! 의리!”를 외치며 반대편 골목으로 뛰어갔다.

친구들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어깨에 걸린 카메라 가죽 케이스를 만져보았다.


방학이란 건 그런 거였다.

매일같이 붙어 다니며 온 동네를 휘젓던 녀석들과도 잠시 작별하고, 각자에게 주어진 각자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기묘한 유예 기간.

우리는 각자 다른 목적지를 향해 흩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먼지 날리는 공사판 위에서, 누군가는 좁은 독서실 칸막이 안에서, 그리고 누군가는 먼 바닷가 마을의 적막 속에서 각자의 여름을 견뎌내야 했다.

우리는 한 울타리 안에서 복작거리던 아이들이었지만, 이 여름이 지나고 나면 각자 조금씩 다른 모양의 추억을 매단 채 다시 만나게 될 터였다.

나는 10년째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아버지의 '속초 타령' 속으로 포니 자동차 뒷좌석에 실려 갈 준비를 하며, 우리를 기다리는 그 뜨거운 계절의 예감을 가만히 음미했다.


월, 수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