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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사랑은...

월남댁 : 베트남 출신의 결혼한 부인을 높여서 부르는 말

by 한자루

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풍덩 빠져버리는 건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버릴 수 있는 건 줄은 몰랐어.

-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 중 춘희의 대사



무뚝뚝한 표정의 의사가 병실로 찾아왔다.

"오늘은 좀 어떤가요? 식사할 때 통증이나 구토 증상이 있나요?"

"약간의 현기증이 나긴 하지만 훨씬 좋아졌어요."

"현기증은 항암치료 때문이니 크게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이제 통원치료로 전환해도 될 것 같습니다."


힘겨운 병원 생활이 끝나고, 그녀는 마침내 퇴원하게 되었다.

나는 그녀와 새로운 일상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퇴원은 새로운 도전의 시작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퇴원이 완치라도 의미하는 것처럼 나는 뛸 듯이 기뼜다.


그녀는 조금씩 회복하면서 작은 목표들을 달성해 나갔다.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다행히도 병원에서보다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처음으로 혼자 집 주변을 10여 분간 산책을 나갔다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절대 혼자 나가면 안 된다고 말했지만 내심 그녀가 그 정도로 회복한 것에 대해 기뼜다.

누워만 있자니 너무 답답해서 잠시 나갔다 온 것이라며 나를 안심시키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그 후 우리는 집 근처 공원에 짧은 산책을 종종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회복이 진행됨에 따라 그녀는 새로운 취미를 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작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새로운 요리법을 시도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나는 그녀가 좀 더 편안하게 치료에 집중할 수 있도록 카페 인근에 2층짜리 단독 주택을 임대했다.

카페는 다른 사람에게 임대하여 낮에는 그녀의 동생이 간호를 했고 퇴근 후에는 내가 간호를 도왔다.


어느 날 퇴근 후에 그녀를 방문했을 때 그녀는 환한 미소로 나를 맞이하며 말했다.

"오빠, 오늘은 내가 오빠를 위해 한국 음식을 요리를 해봤어요!" 그녀는 설레는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한국 음식이라고? 신통하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요리를 기다렸다.

이미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미역국 냄새가 그윽했기 때문에 무슨 요리를 했는지 금방 알 수 있었지만

나는 짐짓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만 지었다.

그녀는 식탁에 잡곡밥과 미역국 그리고 김치까지 올리며 나를 위해 준비한 음식들을 내밀었다.

대강 씻고 함께 식탁에 앉았다. 미역국 냄새가 근사했다.

숟가락으로 첫술을 떠서 맛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요리 솜씨는 형편없었다.

너무 짰다. 베트남 사람들은 대체로 짜게 먹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 맛있게 먹는 척했다.

"정말 맛있어! 이런 음식 솜씨가 있었는 줄 몰랐네. 이거 어떻게 만든 거야?" 나는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정말요? 다행이에요. 오빠 입에 맞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요리하면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요? 오빠가 맛이 없다고 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다고요." 그녀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호아는 치료 중이니 짠 음식은 조심해야 해. 내 입에는 맞지만 호아는 물을 좀 더 넣어서 심심하게 먹는 게 좋겠어."

나는 미역국의 짠맛을 줄여볼까 하여 밥을 한 그릇 넣어 말아먹었다.

그 모습이 맛있게 먹는 것처럼 보였는지 그녀는 미역국을 국자로 떠서 내 국그릇에 더 넣어주었다.

나는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얼굴 근육이 제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6개월이 흘렀다.

그녀의 건강이 더 좋아지자, 나는 그녀와 함께 짧은 여행을 계획했다.

토요일 오전에 떠나서 다음날 돌아오는 짧은 여행이었지만 그녀는 진짜 오랜만의 여행이라며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집에서 차로 3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바다인 붕따우로 갈 생각이었다.

시원한 바닷바람과 풍경이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줄 거라 생각했다.

느긋한 아침에 출발했지만 아직 태양이 이글거리는 오후에 우리는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에 짐을 풀자 그녀는 피곤했던지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2시간 정도 잠들었던 그녀는 한참 노을이 물들어갈 무렵 잠에서 깼다.

바람이 부드럽게 창가의 커튼을 흔들고 있었다.

"오빠 내가 너무 많이 잤나요?"

"아니야. 피고했지? 배고프지 않아? 우리 잠시 바다보고 저녁 먹을까? 힘들면 여기 테라스에서 바다를 봐도 되고."

"아니에요. 오빠. 한숨 자고 났더니 한결 기분이 좋아요. 우리 잠깐 나가요."

수평선에 반쯤 잠긴 태양이 뿜어내는 노을은 하늘에 아름다운 스펙트럼을 그려내고 있었다.

"오빠 하늘이 정말 아름다워요. 고마워요. 오빠" 그녀는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며 소녀처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나는 말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우리는 인근 식당에서 간단하게 저녁식사를 했다.

그녀는 준비해 온 약간의 죽과 식당 음식을 조금씩 맛보았다.

"빨리 좋아져서 오빠랑 같이 이것저것 먹어보고 싶어요."

"그래. 여기 해산물들이 싱싱하니까 맛 좀 봐."

나는 게살수프며, 생선구이등 부드러운 음식을 조금씩 떼어 그녀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붕따우 밤해변이 보이는 노천 식당에서 파도소리를 들으며 함께 한 식사는 낭만적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손을 잡고 해변을 걸었다. 밤해변을 즐기는 연인들이 웃는 소리와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모래사장에 앉아 멀리 지나가는 고기잡이 배를 바라보다가 그녀에게 말문을 열었다.


"너와 함께한 시간들, 우리가 겪어온 모든 일들, 그리고 앞으로 함께할 미래에 대해 생각해 봤어, "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 그녀는 그의 진지한 눈빛을 보며 긴장된 표정으로 답했다.

"너와 함께하는 매 순간이 너무 소중하고 행복해. 나... 너를 사랑해. 우리 결혼하자."

나의 프러포즈는 멋대가리 없고 갑작스러웠으며 전혀 로맨틱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오빠, 물론이에요. 나도 오빠와 함께하고 싶어요."

우리는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다는 듯이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출렁거리는 파도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가 내 어깨에 살짝 기대었다. 작은 새가 품으로 안기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결혼을 약속하긴 했지만 그녀의 건강 상태가 호전되는 것을 보고 진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현재 상태에서 결혼을 부모님께 알리면 반대하시거나 걱정하실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통원 치료를 받으며 건강을 회복해 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병원으로 가는 횟수도 현저히 줄었고, 완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가 제안했다.

"오빠, 우리 웨딩사진부터 찍어보는 게 어때요?"

나는 그녀의 제안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우리 특별한 날을 위해 준비해 볼까?"

우리는 웨딩 사진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를 예약하고, 드레스와 턱시도를 골랐다.

촬영 당일, 그녀는 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정말 예쁘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감탄했다.

그녀는 소녀처럼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오빠는 뱃살을 좀 빼야겠는데요?"

이제는 제법 농담도 하고 정말 많이 좋아진 것 같아 마음이 흐뭇했다.

그러나 사실 뱃살을 빼야 하는 것은 농담 섞인 사실이기도 했다.

촬영이 시작되고, 우리는 서로를 향한 사랑과 행복을 사진 속에 담았다.

스튜디오 안은 웃음과 즐거움으로 가득했다.

그녀의 건강이 좋아질수록 우리의 결혼 준비도 점점 구체화되고 있었다.





결혼

회사 직원 중에 서른이 넘은 여직원이 있다. 꼰대 같은 질문이긴 했지만,

언제 결혼할 생각이냐고 가벼운 투로 질문했다가 아차 했다.

그런 질문이 상대에게 고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꼰대의 어이없는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직원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밝게 웃으며 결혼 생각이 없다고 했다.

20대 친구들이 벌써부터 결혼 압박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이미 달관한듯한 직원의 표정과 말투에 안심(?)이 되었다.


실제로 베트남에서는 20대 중 후반 젊은 여성들이 자신을 ‘노처녀’라 칭하는 경우가 많다.

베트남에서는 혼기를 놓친 노총각·노처녀를 놀릴 때 ‘에 로이’(ế rồi) 혹은 ‘에 꽈’(ế quá) 등의 표현을 쓴다. 아직 20대인 베트남 친구들에게 어떨 때 이 말을 쓰냐고 했더니 “더 이상 어리지 않아서 아무도 데이트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을 놀릴 때”라고 한다.

물론, 친한 친구들끼리 농담조로 장난치는 말이긴 하다.


페이스북 같은 SNS에서 베트남 노총각·노처녀들의 모임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베트남어로 검색을 해보니 가입된 멤버가 18만 명, 11만 명에 달하는 모임도 있다.

‘마음 맞는 사람을 찾는다.’며 자기소개와 사진을 담은 글이 주로 올라오는데, 1998년생도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우리 나이로 치면 26살인 1998년생이 노총각, 노처녀 그룹에서 활동하고 있다니, 한국 사람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 일이다.



EGRJAIOIARDU7MMP2RTED3TUYE.jpg?auth=9199e34fa07048632125b79ccddd95123e1be8d3ddb49b93ffb6388e4633e7c2&width=476&height=491&smart=true 베트남 북부 박닌성의 한 어머니가 아들의 며느리를 구한다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VTV



베트남에서는 결혼하지 않는 아들의 짝을 찾아주기 위해 직접 ‘구인 공고’를 붙인 어머니의 이야기가 화제가 됐다. 베트남 북부 박닌성에서 한 어머니가 집 앞에 ‘우리 아들의 며느리를 찾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내건 것이다. 아들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잘 생겼고, 일도 열심히 하며 아이들을 사랑합니다.’라는 설명을 붙인 이 어머니는 ‘우리 아들은 귀신이 무서워 밤에 놀러 나가지도 않아요.’라고 가정적인 아들을 자랑하기도 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베트남에서도 결혼 문제는 언제나 진지한 것 같다.


실제로 최근 베트남에서는 ‘결혼하지 않는 젊은 세대’가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2004년 6.23%에 불과했던 독신자 비중은 2019년 10.1%까지 많아졌다.

초혼 연령도 높아지는 추세다. 베트남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23.1세였던 베트남 여성의 평균 초혼 연령은 꾸준히 올라 2022년 26.9세까지 증가했다. 젊은 세대가 결혼을 미루는 현상은 대도시에서 특히 심한데,

남부 호찌민시의 경우 2022년 남성의 초혼 연령이 29.8세에 육박했다.

현지 언론들은 “젊은 사람들이 자신의 커리어를 잃기 싫고, 결혼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 등을 내세워 결혼을 늦추고 있다.”는 기사를 쏟아냈다. 이를 단순한 사회적 현상이 아닌 심각한 사회 문제로 보는 것이 어째 한국에서 벌어지는 현상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베트남 현지 언론 VTV는 “결혼을 일찍 하냐, 늦게 하느냐는 더 이상 개인사가 아니다.”라며 “큰 흐름에서 이는 전 사회적인 노동력 감소와 연관된다”라고 보도했다.


결혼이 늦어지는 것만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최근에는 2023년 베트남의 출산율이 1.95명을 기록해 난리가 났었다. 베트남에서 출산율이 2명보다 낮아진 것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남성의 초혼 연령이 30세에 가까워진 호찌민시 같은 도시에서는 출산율이 이미 1.5명 수준까지 떨어졌다고 한다.

베트남 보건부 인구총국 소속 마이 쭝 선 박사는 “출산율 감소는 전 세계적인 추세이지만 베트남의 출산율 하락은 빠르고 분명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우려를 내놓기도 했다.

1960년대만 해도 6.5명이었던 베트남의 출산율은 2020년 2.05명까지 줄어들더니 결국 1명대까지 떨어졌다. 이런 추세라면 현재 1억 명에 달하는 베트남 인구는 2044년 1억 700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감소세로 돌아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2100년에는 베트남 인구가 7200만 명까지 줄어든다는 예상도 있다.

인구수를 기반으로 한 강력한 내수 시장과 풍부한 인력이 강점으로 꼽히는 베트남에선 청년들의 결혼 기피와 저출산이 경제 성장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베트남 정부 역시 출산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마련 중이다. 2명 이상의 자녀가 있는 가정에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학비를 면제하는 내용의 법안을 준비 중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젊은 청년들의 결혼과 출산을 장려하는 게 비단 베트남 만의 과제는 아니다.

타국의 결혼 적령기와 출산율 걱정보다 사실 우리나라 걱정이 더 앞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마음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정부는 물론, 여야가 나서서 저출산 해결을 위한 대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문제는 우리의 상황이 베트남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합계 출산율은 2024년 0.72명으로 채 1명이 되지 않는다.

이미 출산율에 적신호가 켜진 것은 오래전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별다른 개선 효과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결혼과 출산 장려 정책이 제대로 젊은 국민들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어느 나라든 국민이 없는 국가는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장기적이고 효과적인 국가 정책들이 쏟아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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