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부를 원한다면
나는 왜 부자처럼 보이고 싶었을까
저녁 무렵, 어느 한 호텔 앞.
반짝이는 검은 차 한 대가 천천히 멈춰 선다.
비싼 브랜드 로고, 윤이 나는 차체, 낮게 깔린 엔진 소리.
차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조용히 내린다.
맞춤 슈트, 반짝이는 시계, 흔들림 없는 걸음.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차, 그 옷, 그 손목 위의 브랜드에 머문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감탄사를 내뱉는다.
조금 이상한 장면이다.
존재보다 소유가 더 많은 주목을 받는 이 상황이 어색하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사람을 보기보다, 그가 가진 것에 먼저 반응한다.
누군가 명품 시계를 차고 있으면, 그 사람의 금융자산을 묻기보다 자기도 모르게 그 시계가 의미하는 사회적 지위를 먼저 상상한다.
좋은 차, 비싼 집, 고급스러운 식사, 여행지, 이 모든 것은 이제 ‘부’의 상징이자 ‘인증 가능한 콘텐츠’가 되었다.
부는 수단이 아니라 상징이 되었고, 삶의 질이 아니라 이미지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실제로 부유해지는 것보다 ‘부유해 보이는 것’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쓰게 된다.
사람들이 진짜 부를 오해하는 방식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6년 할부로 산 9천만 원짜리 차를 몰고 다니면서, 자신을 ‘부자’라고 믿는 사람.
그건 부가 아니라, 부를 흉내 낸 장면일 뿐이다.
스스로를 기만한 채, 남의 시선에 맞춰 만들어낸 환영 속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가짜 부'가 진짜 부가 자라야 할 기반을 갉아먹는다는 것이다.
자유, 건강, 관계—그 모든 것을 물질의 과잉 연출이 침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는 부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부처럼 보이기 위해 삶을 소모하고 있는 것이다.
소셜미디어는 우리의 욕망을 근본부터 바꾸었다.
예전에는 내가 만족스러우면 그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가 '좋아요'를 눌러줘야 만족이 완성된다.
그로 인해 ‘사고 싶은 것’보다 ‘보여주고 싶은 것’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돈은 이제 소비의 수단이 아니라, 정체성을 연출하는 무대 장치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더 자주, 더 무의식적으로 ‘실제 부자’가 아닌 ‘부자처럼 보이는 사람’을 연기하며 살아간다.
문제는, 그 연기가 너무 잘 어울린다는 데 있다.
감탄을 끌어내고, 감정을 자극하며, 시선을 휘어잡는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지속되지 않는 장면일 뿐이다.
부자가 되기 위해 돈을 벌고, 그 돈으로는 부자처럼 보이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이건 정말 기이한 자기모순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일 그 안에서 욕망하고, 비교하고, 지쳐가며, 다시 또 같은 선택을 반복한다.
‘부자처럼 보이는 삶’은 쉽고 빠르며, 눈에 잘 띈다.
하지만 그것은 바닥이 보이는 무대 위의 장면일 뿐이다.
진짜 부자가 되고 싶다면 타인의 시선에서 나를 회수해야 한다.
카메라가 꺼지고, 조명이 사라진 뒤에도 나 혼자일 때, 평온할 수 있어야 한다.
부는 결국, 삶의 중심을 누구에게 맡기느냐의 문제다.
타인의 시선이 내 욕망을 설계하게 둘 것인가. 아니면 내가 내 방향을 다시 그릴 것인가.
진짜 부자는 더 가지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삶의 주도권을 끝까지 놓지 않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