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출생 : 1936.09.29. 이탈리아
사망 : 2023.06.12.
가족 : 배우자 베로니카 라리오
학력 : 살레시안 대학교 법학 학사
경력 : 2009 자유인민당2008 이탈리아 의회 몰리세주 하원의원
2008.05.~2011.11. 이탈리아 총리
2006~2008 이탈리아 의회 캄파니아주 하원의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1936년 밀라노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다른 ‘무대 체질’이었다.
대학생 시절에 그는 유람선에서 생계형 가수로 일했다.
손님들에게 노래하고 농담하고, 가끔은 전화번호도 받아냈다.
이미 그때부터 그는 “사람을 즐겁게 하는 것이 곧 영향력이다” 라는 공식을 깨닫고 있었다.
또 그는 학창 시절 친구들의 에세이나 숙제를 대신 써주고 돈을 받았다.
이른바 창업 1호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그는 이미 그때부터 지적 노동의 아웃소싱을 사업 모델로 삼고 있었다.
이런 성향은 커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인이 되어서도 숙제를 직접 하기보다는 “나는 방향만 정하고, 나머지는 전문가들이…” 라는 말을 즐겨했다.
이런 사례를 보면 아마도 어린 실비오는 중요한 건 일의 실력이 아니라, 내가 잘해 보이도록 만드는 능력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이것이 나중에 그의 정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이 된다.
1970~80년대, 이탈리아의 TV 시장은 국가가 운영하는 단일 공영 방송 중심이었다.
하지만 베를루스코니는 이 틈을 노려 민영 방송 3개 채널(칸알레 5, 이탈리아 1, 레테 4)을 창립해 미디어 왕국 메디아세트(Mediaset)을 만든다.
그의 방송 전략은 명확했다. 뉴스는 짧게, 광고는 자극적으로, 프로그램은 밝고 가볍게, 여성 출연자는 시청률을 위해서 예쁘고 젊어야 한다
이 전략은 당시 이탈리아 사회를 뒤흔들었고, 비평가들에게 이탈리아 대'중문화의 실리콘 주조업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실리콘이 왜 등장하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미디어가 장악되는 순간, 정치적 기반도 자연히 따라왔다.
그의 화면 속에 나오는 인물·뉴스·광고는 모두 그의 세계였다.
1986년 그는 재정난에 빠진 AC 밀란을 인수한다.
그리고 나서 밀란은 유럽 챔피언스리그 우승 5회를 달성하며 클럽 축구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시기 도래시켰다.
밀란 팬들은 그를 영웅처럼 떠받들었다.
그리고 그는 훗날 대놓고 말했다. “축구는 정치보다 국민을 단합시키는 힘이 크다.”
즉, 축구 팬들의 사랑은 곧 자신의 잠재적 유권자였다.
그는 축구를 ‘정치적 자원’으로 활용한 초기형 정치 엔터테이너였다.
1994년, 이탈리아는 부패 스캔들 *‘탕젠토폴리(Tangentopoli)’*로 정치권 전체가 무너지는 중이었다.
정당이 줄줄이 해체되는 가운데, 베를루스코니는 TV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나라를 위해 출마합니다. 이탈리아를 다시 일으키겠습니다!”
그의 말은 마치 신제품 런칭 발표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정당 이름도 마케팅 냄새가 났다.
Forza Italia! (이탈리아여 힘내라!)
이건 마치 축구장에서 들리는 응원구호 같지 않은가?
정치학자들은 혀를 내둘렀다. “저건 정당이 아니라 브랜드인데?”
하지만 국민은 좋아했다.
진중한 정치 이야기에 지쳐 있던 국민들에게, 그의 메시지는 선명했고, 무엇보다 재밌었다.
이탈리아는 오랜만에 ‘웃으며 정치 소식을 듣는 나라’가 되었다.
물론 그의 통치는 그 웃음만큼 가볍지는 않았다.
그의 집권 시기를 통틀어 언론은 매일 같은 세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헤드라인으로 달았다.
경제 위기, 총리의 외교적 실언, 총리 사저의 파티 사진 유출!
그는 메르켈에게 “너무 남성적이다.”라는 발언을 했고 (당연히 국제적으로 논란됨), 오바마에게는
“햇볕에 잘 그을린 잘생긴 청년.” 이라는 시대착오적 발언으로 비판받았다.
국내 여성 정치인에게 “첫눈에 반했습니다. 우리 정계엔 미인이 너무 드물어요.”라는 기절 초풍할 막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의 막말은 국제 뉴스에서 ‘이탈리아 헤드라인’ 자리를 거의 독점했다.
그의 사저에서 열린 파티는 “붕가붕가(Bunga Bunga)”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보도에 따르면 젊은 모델, TV 연예인, 정치인, 미성년자인 전 댄서(‘루비’ 사건) 까지 참석했다는 의혹이 있었고, 이 때문에 그는 미성년자 매춘 알선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그의 변명은 지나가던 개도 웃을 정도였다.
“나는 여성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준 것뿐이다.”
“내가 가진 건 너그러움뿐이다.”
이쯤 되면 그의 변호사들도 얼굴을 들고 다니기 어려웠을 것이다.
(참고: 2014년 최종 무죄 판결이 났지만, 과정에서 드러난 파티의 실체는 큰 충격을 주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정치 인생 동안 30건 이상의 형사 사건에 연루되었는데 대표적인 사건들만 꼽아본다면
2013년 탈세 사건 ( Mediaset 세금 회피 혐의)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사회봉사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사회봉사 명령을 받았을 때조차, 그는 그것을 이미지 개선의 기회로 바꾸었다.
요양원에서 노인들의 손을 잡으며 기자들 앞에서 말했다.
“나는 항상 약자를 돕는 사람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이쯤 되면 정치인이라기보다 이미지 메이킹의 괴물이라고 해야 했다.
또 부패 사건 (정치인 매수 혐의)은 공소시효 만료로 무죄판결을 받았고,
미성년자 매춘 알선 혐의로 기소되었던 붕가붕가 파티 관련 사건은 2심까지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결국, 대법에서 무죄로 확정되었다.
법정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난 마초일 뿐, 범죄자가 아니다.”
이 말에 아마 판사는 잠시 고민했을 것이다.
“마초는 형법 어디쯤에 있었더라...?”
이는 그의 재판 중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그가 단순히 스캔들의 중심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스캔들을 연출하고, 변명하고, 심지어는 유머로 포장했다는 점에서.
언론 독점법 위반에 대한 재판에서는 유죄를 판결받고 벌금을 내야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대법원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말을 들었다.
“그는 사법부에 패배한 적이 없다. 늘 공소시효와 피곤한 판사들보다 오래 버텼을 뿐이다.”
베를루스코니를 지지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우리 편이다.”, “경제는 그나마 그때가 나았다.”, “정치가 너무 복잡하고 우울했는데, 그는 웃음을 줬다.”
또 반대편에 있는 반대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정치인을 가장한 쇼맨이다.”, “국가의 민주주의를 희화화했다.”, “언론 독점으로 국민의 판단을 왜곡했다.”
그럼에도 지지율은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그것이 베를루스코니 현상이라고 부른다.
그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인이었지만, 실제로는 그 시대를 연출한 감독에 가까웠다.
그는 언론을 소유했고, 축구를 통해 국민의 마음을 얻었고, 정치에서는 '본인이 곧 브랜드'라는 방식을 최초로 증명했다.
그의 삶은 완벽한 정치적 비극도, 코미디도 아니었다.
그 둘의 경계를 허물어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을 뿐이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총리가 아니었다.
그는 정치라는 무대를 통째로 바꿔버린, 이탈리아 정치사에 다시는 등장하지 않을 하나의 ‘장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