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르 메시아스 보우소나루
출생 : 1955.03.21. 브라질
경력 : 2019.01.~2023.01. 제38대 브라질 대통령
1991~2019.01. 브라질 연방하원의회 의원
1989~1991 리우데자네이루시의회 의원
브라질 정치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 있다.
아니, 남을지 말지는 모르지만 조회 수는 확실히 남긴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은 자이르 메시아스 보우소나루.
메시아스라는 이름을 달고 태어났지만, 정작 그가 구원한 것은 브라질도, 민주주의도 아니었다.
그가 구원한 것은 딱 하나였다.
자신의 이미지.
보우소나루는 늘 “나는 군인 출신이다”라는 이미지를 강조했다.
하지만그의 기본 성품은 군대에서 만들어 진것이 아니었다.
그의 진정한 토대는 타고난 고집, 즉흥성, 그리고 말버릇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교실에서 늘 이런 식이었다.
선생님이 “발언하기 전에 손들고 생각부터 하자.”라고 말하면 보우소나루는 늘 이렇게 말했다.
“생각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우선 말부터 하고요!”
그의 부모는 종종 주변에 “얘는 말로 이길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말싸움을 좋아했고, 평범한 대화도 이기고 나서야 끝냈다.
어쩌면 그는 태어날 때부터 말싸움형 포식자였는지도 모른다.
군대에서도 그는 그 특성을 잃지 않았다.
상관이 명령하면 명령 자체보다 명령을 내린 톤을 먼저 평가했고, 전우들과의 갈등도 대부분 ‘말로 휘두르는 난폭함’ 때문에 발생했다.
즉, 그는 폭력적 행동 때문이 아니라 폭력적인 말때문에 위험한 사람이었다.
그런 성격은 훗날 정치에서 기묘한 매력으로 작용했다.
보우소나루의 정치 스타일은 거의 ‘막말 대잔치’였기 때문에 상식적인 사람에겐 위협이었지만, 말싸움 콘텐츠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오히려 엔터테인먼트였다.
그의 정치 입문에는 거창한 철학도, 오랜 준비도 필요 없었다.
사람들은 누군가 크게 외치기만 해도 내용도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박수까지 친다는 사실을 그는 일찍 깨달았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재능 즉 말하고, 또 말하고, 때로는 말이 생각을 앞지르는 능력이 정치판에서 의외로 잘 통할 수 있다는 것도 곧 알아챘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다.
“이거 나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무대 세팅해라!”
그렇게 그는 정치 세계의 문을 두드린 것이 아니라... 문손잡이를 비틀어 들어와 자리를 잡아버렸다.
초기에는 아무도 그를 진지하게 보지 않았다.
군사 독재 시대를 향한 노골적 향수, 젠더·소수자 혐오 발언, 환경 무시, 음모론 등.
이런 요소는 대부분의 정치인에게 ‘치명타’지만 그에게는 ‘세계관 설정’이었다.
그는 소음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존재감을 키웠다.
언론이 비난하면 그는 더 목소리를 높였고, 반박하는 대신 비웃고 욕설을 섞었다.
브라질 국민들은 그를 보며 “뭐지? 왜 저러는건데?”와 “그래도 솔직하니까 좋긴하네.” 사이에서 혼란을 겪었다.
보우소나루의 승리는 우연이 아니다.
준비된 정책, 명확한 비전, 국가 이해도, 전문가 네트워크 중 그가 가진 것은 하나도 없었지만 분노한 국민 정서와 SNS 알고리즘 그리고 말싸움 재능이라는 조합이 브라질 정치사의 가장 어두운 기적을 만들어냈다.
특히 그의 ‘솔직함’은 “정치인은 다 거짓말쟁이”라는 정서를 파고들었다.
그 솔직함은 사실 생각 없이 말하는 즉흥성이었지만 지지자들은 그것을 “정치판의 새로운 청량제”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를 지지한 사람들은 몰랐던 것이다.
청량제는 시원하지만 오래 마시면 건강을 해친다는 것을.
보우소나루는 대통령이 되었지만 행정을 실행한 적은 드물었다.
그는 주로 장면을 연출했다.
환경 규제 완화는 경제 성장을 위한 결단처럼 보였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결국 ‘강한 개발자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한 쇼였다.
총기 규제 완화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총은 공공안전의 도구가 아니라, 지지층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강함의 소품’에 가까웠다.
그의 백미는 코로나19였다.
“이 팬데믹은 그저 감기일 뿐!”
의료진은 그 말을 듣고 주저앉았고, 보우소나루는 그 말을 하고 재채기를 했다.
그것도 노마스크로 말이다.
그는 백신을 의심했고 자신은 맞지 않았다고 자랑했다.
국민들이 병상에서 신음하던 시기, 그는 수영장에 뛰어들어 치킨을 굽고 있었다.
그리고 한 마디 남겼다.
“죽을 사람은 죽는다.”
이 단순한 그의 어록은 철학적이긴 했다. 문제는 인류가 원하던 철학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백신 반대 발언을 하며 자신은 백신을 안 맞았다고 자랑했는데, 그 결과 브라질은 세계 최다 사망국 상위권이 되었다.
그는 코로나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코로나를 무시한 그의 행동은 그를 잠시 두려움에 떨게 했다.
탄핵이라는 이름의 그림자가 등 뒤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림자는 오래가진 않았지만, 아마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말보다 무서운 것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해야 했을 것이다. (브라질 정치의 면역력이 생각보다 강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말했다.
“그래도 그는 정직하다.”, “말 그대로 행동하는 정치인이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가 행동한 그대로의 말이 늘 문제였다는 점이다.
그에게 열광한 지지층은 이념보다 감정으로 움직였다.
보우소나루가 누군가를 공격하면 그들은 논쟁의 내용보다 그 ‘한 방’ 자체에 열광했다.
언론을 향한 비꼼에는 “시원하다!”가 먼저였고, 환경을 무시할 때도 “이 사람은 굴복하지 않는다”는 감정적 결속이 작동했다.
코로나를 가볍게 여기는 발언에도 “겁먹지 않는 리더”라는 이미지만 남았지, 방역의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전형적인 정치 기준으로는 실패했지만, 정서 조작자로서는 성공했다.
언론은 그를 향해 “기후 범죄자”, “선출된 음모론자”, “공공보건의 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자 그는 언론을 조롱했고, 언론은 그 조롱을 기사화했고, 그 기사는 다시 그의 지지층을 자극했고, 그 자극은 다시 뉴스를 만들었다.
이 악순환 속에서 그는 국정이 아니라 불신이라는 연료로 달리는 정치 기계가 되었다.
그레타 툰베리에게는 “조그만 생떼쟁이”라고 하며 국제적 시비를 걸었다.
우리 시대는 이토록 당당한 어른을 오랜만에 보았다. (좋은 의미는 아니다.)
2022년 대선에서 그는 패배했다.
문제는 그가 진 사실만큼 분명하게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의 불복은 지지자들을 거리로 밀어냈고, 브라질 국회는 하루아침에 트럼프 시즌 2의 세트장이 됐다.
그리고 그는 뒤에서 “내가 시킨 건 아니야.”라는 전형적 모범 답안을 내밀었다.
트럼프와 닮았다는 지적이 많았지만 사실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트럼프는 TV 스타 출신이고 보우소나루는 말을 기관총처럼 쏠 줄 아는 군인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 모두 정치가 어떻게 쇼 비즈니스와 결합되는 순간, 민주주의가 어떤 모습이 되는가를 현실로 보여준 사례다.
보우소나루는 퇴장했지만, 그가 남긴 정치적 상처, 분열, 불신은 아직 브라질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나라를 이끈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대의 소음과 대중의 피로가 그를 앞으로 내몰았는지도 모른다.
보우소나루는 대통령이었지만 정치인이기보다는 시대가 만들어낸 불안의 엔터테이너였다.
브라질 사람들은 그의 시대가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지도자를 선택한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보우소나루 채널의 구독 버튼을 눌렀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