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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자녀 때문에 아픈 부모에게

오늘도 아이 때문에 울었습니다.

by 한자루
그러고서 아들은 아버지에게로 갔다. 아들이 아직 멀리 있는데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 가엾게 여겨 달려가 아들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누가복음 15:20




10년 전 아들이 태어나던 때가 생각납니다.
그 탄생의 순간을 떠올리면, 그 작은 손가락이 움직이던 찰나의 떨림, 내 품에 안겼던 체온이 아직도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그때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 이제 내 인생에서 또 하나의 소중한 사람이 생겼구나.”
그리고 곧 이어지는 또 하나의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두려운 존재도 생겼구나.”

부모가 된다는 건 사랑과 두려움이 동시에 태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아이가 아파 열이 39도까지 올랐던 날, 그 작은 몸 하나가 온 세상의 무게가 되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이 아이의 삶이 이제 내 삶과 얽혀 있다는 사실을.

얽혀 있다는 건, 아이의 삶이 움직일 때마다 내 삶도 함께 흔들린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은 흔들립니다. 그러나 얽혀 있기 때문에, 결코 놓을 수도 없습니다.

그 사이에서 끝내 다시 품게 되는 것, 그것이 부모 됨이었습니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좋은 날도 있지만 솔직히 힘든 날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날은 얘가 지금 나랑 장난하나? 싶은 날도 있고, 분노가 치밀어 스스로가 무서워지는 날도, 아이가 던진 말 한마디에 내가 쪼그라드는 날도 있습니다.

‘내가 부모 될 자격이 있나?’

사실 이 질문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아니라, 부모라면 누구나 살아가며 여러 번 맞닥뜨리는 묵직한 마음의 회전문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무서운 순간은, 아이 때문이 아니라 “아이 앞의 나” 때문에 절망하는 순간입니다.

내가 이렇게 화를 못 참아내는 사람인지, 이렇게 가시 같은 말을 내뱉는 인간인지, 아이 하나 제대로 못 품는 사람인지...

우리는 우리의 그 민낯을 보고 무너지는 날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그 민낯을 대부분의 부모가 혼자 감당합니다.

교회에서는 괜히 민망해서 말 못 하고, 친구들에게 털어놓으면 비교당할까 겁나고, 부모님께 말하면 “너희가 애를 잘못 키워서 그래.”라는 잔소리를 들을까 두렵습니다.


생각해 보면 말 안 듣는 아이보다 더 무서운 건, 그 아이 앞에서 무너지는 우리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왜냐하면 아이 문제는 대부분 부모의 상처를 건들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소리 지르면 내가 어릴 때 들었던 소리가 떠오르고, 아이가 내 말을 무시하면 내가 상처받았던 관계가 떠오르고, 아이가 실패하면 내가 실패한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아이 문제는 단순히 아이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인생의 오래된 문제들이 다시 올라오는 시간입니다.

부모의 고통은 그래서 더 아픕니다.

그건 단순히 ‘육아 스트레스’가 아니라 내 영혼의 울퉁불퉁한 부분들이 다시 긁혀 나오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신앙의 언어를 찾아갑니다. 그럴 때 교회에서는 이런 말들을 건네곤 합니다.

“부모라면 참고 품어야죠.”
“기도하세요.”
“믿음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물론 옳은 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정작 마음이 바닥날 때는 이 옳은 말들이 마음에 와닿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적 해법은 훨씬 더 정직합니다.

탕자의 아버지를 떠올려 보면, 그는 자녀를 모범적으로 길러낸 아버지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아들은 집을 박차고 나갔고, 재산을 손에 쥐어주자마자 허랑방탕하게 탕진했고, 돌아올 때조차 아버지와의 관계보다는 하인으로라도 살아남겠다는 계산만 품고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부모로서의 실패’가 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이 실패의 자리를 끝이 아니라 시작의 자리로 다시 펼쳐 보입니다.
흠투성이었던 아버지가, 가장 깊고 넓은 사랑을 그 자리에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부족함이 사랑을 가리는 장벽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배경이 됩니다.

그는 아들을 붙잡아 두지도 못했고, 당장 변화시키지도 못했지만, 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부모의 기다림은 ‘교육의 성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부서진 자리에서도 끝내 자녀를 향한 마음을 거두지 않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호세아서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보이시는 마음도 그렇습니다.
“내가 어떻게 너를 버리겠느냐?” 돌아오지 않는 자식 같은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단 한 번도 포기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으십니다.
이미 상처받았고, 이미 배신당했고, 이미 수없이 실망했음에도, 하나님의 마음은 여전히 돌아올 자리를 비워 둔 채 타오르는 사랑으로 남아 있습니다.

성경이 부모에게 요구하는 자격은 완벽함이나 실수하지 않는 능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탕자의 아버지처럼 기다릴 줄 아는 마음, 호세아서의 하나님처럼 상처가 나도 사랑을 닫지 않는 마음, 그 마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면 된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완벽한 부모”가 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문을 닫지 않는 부모, 언젠가 아이가 돌아올 수 있는 자리 하나를 남겨두는 부모, 그런 부모가 되라고 조용히 초대합니다.

아이가 문을 쾅 닫고 들어간 날도,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날도, 그럼에도 다음 날 아침 다시 얼굴을 마주할 마음을 내는 것 그게 성경이 말하는 부모의 모습일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압니다. 자녀 문제에는 정답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요.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부서진 마음으로도 버티는 법, 흔들리면서도 기다리는 법, 그리고 다시 사랑으로 돌아오는 법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낼 수 있게 해주는 세 가지 마음의 토대가 우리 가슴속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부모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단순한 고백 하나가 부모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모를 살립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고 느끼는 그 무거운 돌덩이는 사실 하나님만이 들 수 있는 무게였습니다.
그 진실을 인정하는 순간, 부모의 어깨에 오래 눌려 있던 짐이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내려가기 시작합니다.

아이의 영혼은 부모가 깎아 만드는 조각품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으로 숨을 불어넣으신 하나의 우주입니다.
우리는 그저 잠시 곁을 지키는 이들이고, 그 영혼의 궁극적인 방향과 생명은 하나님이 붙들고 계십니다.

부모가 흔들려도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으십니다. 부모가 실패해도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이 진리는 부모를 작아지게 만드는 진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부모를 죄책감에서 자유롭게 하고, 사랑을 더 깊게 흘려보낼 수 있게 만드는 은혜의 진리입니다.


다음은 집은 문제를 해결하는 상담소가 아니라 부서진 마음을 다시 붙여보는 회복의 공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집 안에서는 실패해도 괜찮은 곳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가정에서조차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을 느낍니다.
화내지 말아야 하고, 아이는 바르게 자라야 하고, 우리 가족은 ‘괜찮은 가족’ 같아 보여야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붙입니다.

하지만 성경 속 가정의 장면들을 떠올려 보면 그곳은 언제나 부족함이 드러나는 자리, 그리고 그 부족함으로 인해 하나님이 가까워지는 자리였습니다.

집 안에서는 감정이 터져도 괜찮고, 한 번씩 무너져도 괜찮고, 때로는 서로 실망해도 괜찮습니다.

집은 점수가 매겨지는 곳이 아니라 엎질러진 마음을 함께 닦아내고, 부서진 감정을 다시 붙여 보는 곳입니다.

아이도, 부모도, 서툰 방식으로 서로를 사랑해 보는 가장 인간적인 공간이 바로 집입니다.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반복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조금씩 회복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마지막으로 부모의 사랑은 ‘결과’가 아니라 ‘지속성’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 됨은 위대한 기술이 아니라, 부족한 마음으로 버티며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긴 시간의 여정입니다.

우리가 흔들리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으셨고, 그 하나님이 바로 부모를 붙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부모의 실패는 사랑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깊이 기대게 되는 시작입니다.

부모의 찢어진 마음은 실패의 흔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깊게 사랑하신다는 은혜의 흔적입니다.

아이를 바꾸는 것은 멋진 조언도, 근사한 훈계도 아닙니다.

현실 속에서 천천히 견뎌 주는 마음, 무너져도 다시 아이 곁으로 돌아가는 그 한 걸음이 아이를 바꿉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꾸실 때도 그러셨습니다.
단번에 변화시키지 않으시고, 십 년, 백 년, 때로는 세대를 건너뛰어 천천히 돌아오는 그 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부모의 사랑도 그러해야 합니다.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삶이 멀리 빗나갈 수는 있어도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 한편에 “누군가 나를 끝까지 붙들어준 사랑”이 조용히, 그리고 깊게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아들도 그랬습니다.
세상을 향해 뛰쳐나갈 이유는 많았지만,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그는 자신을 끝내 포기하지 않을 사람이 집에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 어딘가에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부모가 오늘 견딘 사랑들, 화를 누르며 돌아섰던 순간, 말이 엇나가 상처가 남았던 날에도 완전히 마음을 닫지 않으려 애쓴 그 작은 의지들, 그 모든 것이 아이에게는 “나는 여전히 소중한 존재다.”라는 지워지지 않는 감각이 됩니다.

사랑은 아이를 빠르게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절망의 끝에서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게 만드는 힘을 남깁니다.


그런데 아이가 돌아올 수 있는 그 자리를 지켜온 시간들 속에서, 아이들만 변할까요?

사실은 부모도 조용히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아이 때문에 울고, 아이 때문에 두려워하고, 아이 때문에 마음이 찢어졌던 그 자리야말로 내가 가장 깊어지는 자리였다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은 우리 삶을 편하게 만들려고 온 감정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깊게 만들기 위해 찾아오는 감정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이를 키운 것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찢어지고 흔들렸던 그 마음들이 우리를 지금의 나로 키웠습니다.
내가 빚은 아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 때문에 빚어진 내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던 날, 포기하고 싶던 밤, 기도조차 나오지 않던 새벽들, 그 전체를 하나님은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내 옆에서 함께 걸어오셨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찢어진 마음은 실패의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당신을 깊게 사랑하신다는 가장 깊은 흔적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이, 부모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를 오늘도 버틸 수 있게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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