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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세상의 모든 어둠을 뚫고

수상한 장로의 미소

by 한자루




장로가 그은 경계선은 뚜렷했다.

그러나 글록은 다행히 부족에서 완전히 쫓겨나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는 마을 가장자리, 습지와 맞닿은 축축한 땅 위에 자리를 잡았다.

밤은 깊었고, 공기는 냉기와 습기로 눅눅했다.
탐사복은 체온을 유지해 주었지만, 이곳의 공기는 다른 차원에서 온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습기, 뼛속까지 스며드는 바람, 끊임없이 울리는 곤충의 날갯소리.

글록은 처음으로 “차단된 보호막”이 아닌 “노출된 육체”의 불편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때, 알파-3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글록, 기록상 인간들은 이 습기와 곤충, 그리고 밤의 냉기를 견디며 수천 년을 살았습니다. 통계적으로 말하면, 지금 느끼는 불편함은 인간의 평범한 일상이라고 할 수 있겠죠.”

글록이 헛웃음을 지었다.
“평범한 일상이라... 이게 생존이라는 건가. 나는 지금 살아남기보단 서서히 녹아내리는 기분인걸.”

알파-3는 장난스레 덧붙였다.
“감정 데이터베이스에 ‘습기 때문에 우울하다’라는 항목이 없다면 오늘 추가해야겠군요. 보고서에 ‘조사관, 습기에 패배’라고 기록해 두면 어떨까요?”

글록은 피식 웃었지만 곧 표정을 굳혔다.
“알파. 이런 사소한 것들이 인간에게는 늘 생존의 문제였겠지. 그 싸움이 끝없이 이어져 역사가 만들어진 거야.”

알파-3는 잠시 침묵하다가 낮게 답했다.
“맞아요. 인간은 살아남았고, 지구를 지배했죠. 하지만 지배하는 법만 배우고, 지켜내는 법은 배우지 못했잖아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 고생인것이고요.”


불빛은 움막 사이에서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한 소녀의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 으으… 아파.”

리아였다.
늑대 발톱에 할퀸 팔은 붉게 부어올랐고, 소녀는 몸을 웅크린 채 짧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
곁의 어머니는 절박하게 팔을 붙잡고 상처 위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흙과 피를 빨아내고는 자신의 가슴팍에 문질러 흡수하듯 눌렀다.

“괜찮아, 괜찮아. 아픔은 엄마가 삼켰어. 울지 마라, 내 딸아.”

그러나 리아의 흐느낌은 멈추지 않았다.

고통의 파도가 밀려올 때마다 몸이 떨렸고, 부족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밤공기 속에 얽혔다.

멀리서 지켜보던 글록은 가슴 안쪽이 묘하게 죄어오는 걸 느꼈다.
알파-3가 속삭였다.
“글록. 상처 감염 위험 91%. 이 위생 조건이라면 단순한 상처도 치명적입니다. 체온 39.8도 상승. 저 아이, 오래 버티기 힘듭니다.”

글록의 눈은 불빛조차 새지 않는 장로의 움막을 향했다.

기묘한 침묵만이 장로의 움막 안을 감쌌다.

리아의 신음은 점차 약해지고 맥박마저 희미해졌다.

글록은 경계선 위에서 버티지 못하고 발을 내딛으려 했다.

“글록, 안 됩니다.” 알파-3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러나 글록의 가슴속에서는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 순간, 습기를 머금은 땅 위로 지팡이 소리가 툭, 툭 울렸다.
어둠을 가르며 장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곧장 리아의 움막으로 향했고, 사람들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그 발걸음을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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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란 캔버스 위에 사색을 담고, 감성으로 선을 그어 이야기를 만듭니다. 제 글이 누군가에게 작은 쉼표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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