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 약사로
언젠가 누가 제주도로 이사를 한다고 하면 나는 왜 제주에 가냐고 물어보지 않을 테다. 내가 올해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 뻔한 물음을 질리도록 받은 건 더 말할 것도 없는 데다 이게 참 대답하기 애매한 질문이기도 하다. 솔직하게 대답하면 지나치게 감성적인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고 그렇다고 모든 역사를 뭉뚱그린 보잘것없는 이유를 대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눈동자를 뒤룩 굴리며 어영부영 애매한 대답을 하고 나면 열에 아홉은 "아 그냥 제주가 좋아서 간 거네." 하고 결론을 내린다. 그럼 나는 씩 웃고 만다.
우리은하 태양계 세 번째 행성 지구 위 점 하나에 살고 있을 뿐인데 서울에 사는 건 이유가 필요하지 않지만 제주에 사는 건 이유가 꼭 필요하다면 난 유익한 것보다 무해한 것을 찾아서 섬에 왔다. 여기서 조금만 더 물러서면 내가 숨을 참고 건널 수 없을 만큼 긴 바다가 나온다. 그래서 나는 땅 끄트머리에 잔뜩 구부린 발가락 마디들을 박고 아슬하게 버텼다.
제주에서 네 개의 계절을 모두 맛본 요즘은 서울에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적다. 각각이 왕복 6차선이나 되는 사거리에는 어깨만 스쳐도 눈총질을 하는 사람들이 와글와글 거리고 어딜 가든 하루 종일 피어나는 매연과 담배 연기에 숨이 막힌다. 아침 지하철은 어떤가. 어두컴컴한 땅 속을 비집는 전동 차량에서는 조금이라도 자기 자리를 확보해 편하게 가고 싶은 사람들과, 문 끝을 부여잡고 팔을 지렛대 삼아 몸을 욱여넣어서라도 출근 시간에 늦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매일매일 전쟁을 벌인다.
반면 제주는 주인집 강아지와 노을을 구경하면서 한 시간 남짓 집 뒤를 산책해도 사람은 보이지 않고 귤나무만 가득하다. 가끔 보이는 사람이라고는 연약한 할머니 할아버지들 뿐이다. 거기다 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젊은 사람이 혼자 살면 굶어 죽는 줄 아시는데 그래서 집에 농작물이 자꾸 쌓여간다. 김장하던 할머니가 주신 배추 한 알이나, 유명한 떡 집에서 가져온 쑥떡, 농사지은 애호박, 상추, 귤, 귤, 귤, 귤… . 가끔 … 아니 종종, 알아듣기 어려운 제주어가 곤란함을 유발하긴 하지만 나는 도시보다 시골이 더 좋았다.
포비돈 요오드는 가지고 있는 이름이 많다. 우리가 잘 아는 '빨간약'부터 시작해 '옥도정기', '아까징끼'가 그 이름들이다. 엄밀히 이야기하면 옥도정기나 아까징끼는 다른 약이지만 오늘날에는 다 이 포비돈 요오드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다.
약대에서는 포비돈 요오드가 외용 소독제라는 것을 가르치지 환자들이 옥도정기, 아까징끼를 달라고 하면 포비드 요오드를 가져와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진 않는다. 그렇지만 할아버지 환자가 이런 사실을 알리 있나, 그저 계속 "옥또징끼! 옥또징끼!" 라고 하시다 "그걸 왜 몰라! 빨간 거!" 라고 하면 그제야 포비돈 요오드를 집어 올 따름이다.
목포에서 병원 약사로 일하고 있는 친구는 약사가 천의 직업이라고 했다. 이렇게 이동이 자유로운 데다가 어딜 가든 일정 소득 수준을 보장받을 수 있는 직업은 약사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약사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시골마을에 내려와 파트타임 약사로 일하며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공부도 할 기회는 없었을 거다. 그래서 제주에서 일하고 있는 요즘은 부쩍 과거에 약사가 되기로 선택한 자신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중이다.
세상의 별난 약국들이나, 새로운 개념의 치료제처럼 약사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더 많지만 일단은 이쯤에서 글을 마무리지어야 할 것 같다. 공부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제주에 왔는데 약사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다 보니 시야가 좁아지는 기분이 든다...라고 게으른 변명을 하며. 언젠가 더 이야기를 늘어놓을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