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분업 이후 20년, 의사와 약사와 타노스
의약분업이 실시된 건 2000년 7월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이다. 그래서 난 의약분업 이전의 세계가 어땠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는 건 어렸을 때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 뒤에 약장이 있었고, 진료가 끝나면 선생님이 뒤의 약장에서 직접 약을 꺼내 주시기도 했었다는 것이다. 의약분업이 실시되고 벌써 20년이 지난 오늘 내 또래 약사들은 대부분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다.
의약분업 이전에 약사들이 한 고민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병원과 약국에서 살 수 있는 약이 구분돼 있지 않았고 감기약부터 꽤 위험한 약까지 약을 구하는 것이 너무 쉬워 문제가 됐다. '모든 약은 독'이라는 중세시대 과학자 파라켈수스가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약을 정해진 방법에 따라서 잘 먹으면 약은 병을 낫게 해 주지만 너무 많이 먹거나, 아니면 같이 먹으면 안 되는 약과 같이 먹으면 약은 독이 된다. 얼마 전 이대 목동병원에서 신생아가 사망한 사건에서도 신생아가 사망하기 전 약을 잘못 사용한 것이 확인됐었다.
반 고흐가 마지막으로 그린 초상화인 ‘가셰 박사의 초상’에는 초상화의 주인공인 박사와 함께 당시 반 고흐가 먹던 디기탈리스(그림의 왼손 앞에 놓인 식물)가 그려져 있다.
디기탈리스는 오늘날 심장병을 치료하는 약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반 고흐가 살던 시절에는 디기탈리스가 정신질환과 간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사용됐었다.
반 고흐는 본인에게 있는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디기탈리스를 먹었지만 이 디기탈리스를 많이 먹으면 황시증(Xanthopsia)이라는 세상이 노랗게 보이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때문에 현대에 와서는 많은 사람들이 반 고흐의 그림에 두드러지는 노란 색감을 그가 디기탈리스를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의약분업 이후 약사와 의사의 역할이 명확하게 구분되고 환자에게 약이 전달되는 과정에 체계가 잡히면서 약을 마구 잘못 사용하는 현상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제도라는 건 존재할 수 없듯 의약분업에도 제도가 가지는 몇 가지 문제점들이 존재했다.
의약분업 시스템에서 의사는 환자의 상태를 보고 진단을 내린 다음 그것에 맞게 처방을 한다. 그러면 약사는 의사의 처방을 한 번 더 검토하고 오류가 없게 약을 지은 다음 환자에게 약을 전달한다. 의사는 질병에 대한 전문가이며 약사는 약에 관한 전문가이므로 이 둘의 특성을 살려 합리적으로 분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분업화된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의사와 약사가 각각 확인한 약을 더 안전하게 먹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의약분업이 실시됐을 때 아직 의사와 약사가 원만하게 협력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있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심지어 의약분업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런 환경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분업’은 하나의 일을 나누어서 처리하는 것이고 우리는 이렇게 일을 나누어 맡아 처리하는 사람들을 ‘팀’이라고 부른다. 일을 나눈 사람이 같이 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데 지금 의사와 약사는 아무리 좋게 봐도 같이 일할 준비가 안 돼 있다. 약대에 다니는 학생들이 의사와 간호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들이 하는 일에 대해 배우거나, 다른 전문가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교육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약국에 있는 약사들이 처방에 대한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 병원에 전화했을 때 겪는 어려움을 보면 의대나 간호대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다행히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는 중인 곳도 있다. 대형 병원에서 약사로 근무 중인 내 친구는 얼마 전부터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며 그곳에 있는 환자들의 약을 검토하고 있다. 같은 병원에서 오랫동안 일한 의사 선생님의 제안으로 이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의사와 약사가 함께 일하기 시작한 이후 용량이 많이 쓰인 항생제나 신장질환이 있는 환자에게 조심히 써야 할 약처럼 잘못 사용될 수 있었던 약이 줄어들면서 결과적으로 모두가 만족해하고 있다. 이게 진짜 ‘팀’이다. 사실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와 약사는 어쨌건 같은 직장 안에서 일하며 월급을 받으므로 각자의 사업을 하는 동네 의원과 약국보다는 같이 일하기 더 쉬운 환경에 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있는 약국과 의원이 같이 일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마블 영화 시리즈 중 하나인 ‘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는 어벤져스가 둘로 갈라져 티격태격하는 사이 돌멩이 다섯 개를 모아 인류의 절반을 날려버린다.
영화와 현실이 다른 점은 우리가 팀이 아닐 때 잃은 생명을 손가락을 튕겨 다시 되돌려 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의약분업이 가지는 문제가 약사와 의사 사이의 관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유통이나 서비스에 얽힌 돈 문제 등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다. 그러나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은 약사뿐만 아니라 약사가 되고 싶어 하는 학생들과 그냥 약사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어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의약분업의 본질적인 문제점부터 살펴봤다. 사실 한 시간이면 냅다 쓸 내용을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쓴다고 아침부터 해가 져가는 지금까지 키보드를 두들기는 중이라 왠지 두피에서 머리카락이 하나둘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뒤늦은 샤워를 하며 잃을 머리카락만큼 약사와 의사 모두가 각자의 전문성을 발휘하고 환자의 건강할 권리를 보호하는 의약분업이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다음 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