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관악산 시지프 May 24. 2023

사랑의 흉내

약사인 나는 이번달부터 정신과 약을 먹기 시작했다. 내가 먹기 시작한 약은 플루옥세틴(fluoxetine)이라는 일반적인 항우울제로 우리의 몸 안에서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사라지는 것을 방해해 결과적으로 이 호르몬 수치가 몸 안에서 높아질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약을 조금 더 전문적으로는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차단제(Selective Serotonin Re-uptake Inhibitor, SSRI)라고 한다. 세로토닌은 우리 동네에 이 호르몬을 이름으로 붙인 카페가 있을 정도로 탄소도 열개짜리 유기화합물 주제에 꽤 유명하다. 흔히 기분이 좋을 때, 사랑을 할 때 나오는 호르몬이라고 알려져 있다. 역할에 걸맞게 Serotonin이라는 이름도 고급지고, 있어 보인다.



사랑이 결여된 사람을 위해 과학자들이 사랑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그것을 흉내 낸 약을 만들었다. 어느 정신과 질환이 그렇듯 약 한 알로 드라마틱한 치료 효과를 단기간 내에 볼 수는 없지만 꾸준히 먹는다면 약만큼의 효과를 낼 수 있는 것도 거의 없다. 해서 이달 초 우여곡절을 겪으며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친구들의 정성 어린 방해로 살아남은 나도, 약 덕분인지 시간 덕분인지 사람 덕분인지 모를 것들의 효과를 보며 변함없이 연구를 하고, 과제를 하고 있다.



슬픈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듣는 우려 섞인 질문은 '왜 슬프냐'는 질문이겠지만 우울증은 원인을 특정하기 어렵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물론 나도 짐작 가는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랜 역사 중 어느 하나를 정신적 방황의 계기로 지적하기는 참 어렵다. 그래서 혹시라도 이 글을 우연히 읽고 내게 시련을 주었다고 자책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쨌든 나는 이달 초 연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몇 시간 동안 울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어느 날 아침에는 도저히 떨림과 가쁜 숨이 멈추지 않아서 이대로는 고통스러워 살지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미리 쟁여 놓은 준비물들을 꺼냈고, 집을 청소하고, 그러다 아이폰 잠금 해제가 어렵다는 말이 생각나 아이폰을 비롯한 전자기기의 비밀번호 같은 것들을 메모장에 적었다. 그런 해프닝이 몇 주 전에 있었다.



슬픔이나 우울이나 불안이라고 부르는 감정들이 차오르기 시작한 것이 최근만의 일은 아니다. 그래서 이래저래 부정적이라고 느껴지는 기분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우리나라 남쪽 끝 섬에 일 년 간 웅크리고 있어보기도 했고, 일에 좀 더 몰두해 보고, 운동을 해보기도 했다. 제삼자가 보기에 이런 나는 죽고 싶은 사람처럼 보이고, 그래서 너무 미안하게도 주변 사람들에게 걱정을 끼치는 바람에 이러진 말아야지 하는 순환이 반복되기도 했지만, 사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다. 매 초를 살아 있는 것이 힘에 겹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몸을 순환하는 공기가 도리어 장기들을 짓누르는 기분이지만, 살아있기 위해 애쓰고 있다. 나는 죽고 싶은 게 아닌 고통스럽지 않고 싶을 뿐이다.



스스로의 상태가 좋지 않음을 자각하고 있었고 그래서 병원을 찾은 것이었지만, 의원을 방문해 질문지를 작성하고 나서야 (부끄럽지만 엉엉 울면서 작성했다.) 생각보다 내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보건의료인이라 하더라도 자기 상태를 다 잘 아는 것은 아니구나, 역시 내가 나를 보는 것과 내가 남을 보는 것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새삼스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약을 먹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정보다 일찍 다시 의원을 방문해야 했다. 병원에서 불안 증세가 심할 때만 먹으라고 조금 챙겨주었던 안정제를 삼일 만에 다 먹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나름 아껴 먹은 것이었는데, 약사씩이나 되어서 약물을 과용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잠시 마음을 스쳤다.



지금은 약국 일을 하고 있진 않지만, 약국에서 일했을 때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조제하던 약을 집 탁자에 쌓아두고 먹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원래 약국에서라면 잠금장치가 달린 서랍에 꽁꽁 감추어져 있어야 할 녀석들이 침대 옆에 널브러져 있었다. 약국에서 정신과 약물의 관리가 엄격하다보니 내가 무의식적으로 약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정신 질환이 다른 질환에 비해 엄청 심각하거나 혹은 특이한 질환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알레르기 억제 호르몬을 흉내 낸 약을 먹고, 누군가는 잠 오는 호르몬을 흉내 낸 약을 먹는다. 나는 사랑을 흉내 낸 약을 먹고 있을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MZ를 향한 혐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