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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영은의 비밀

#21 모범생과 날라리 사이

by 에스더쌤

국민학교와 중학교에서 기가 죽었던 나, 호영은.

말 한마디도 안 하고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었던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아주 조금 달라졌다.

먼저 고입연학고사 성적이 제법 괜찮아서

선생님 지명으로 부반장이 되었다.

반장이 1명, 부반장이 2명이고

반인원은 50명 정도였다.

부반장 중 한 명은 출석부를 관리하여

미술이나 체육수업을 갈 때는 출석부를 챙겨가서

과목 선생님의 싸인을 맡아야 했다.

다른 한 명은 생활기록부를 써야 했다.

매 시간마다 과목과 수업내용을 써야 했다.

일단 출석부나 생활기록부를 들고 다니면

그 학생은 부반장인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선생님들은 나를 눈여겨보았다.

한 눈에도 모범생이라고 딱 쓰여있었다.

예의 바르고 말을 잘 들으니까 선생님들은 나를 이뻐하였다.

특히 눈웃음은 나의 필살기였다.

중학교에서보다 훨씬 어려워진 수학이 발목을 잡았다.

다른 과목은 수업 시간에만 열심히 들어도 따라갈 수 있었고

시험 성적도 그럭저럭 나왔는데,

수학은 수업 시간 가지고는 안 되었다.

들을 때는 이해가 되는데 막상 시험 시간에 풀려면 헷갈렸다.

해도 될까 말까인데 손에서 놓은 수학은 80점에서 70점 그러다 고3이 되어 반 타작이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정석으로 나름 열심히 공부했지만, 끝까지 마무리하진 못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범천학원에 가서 수학강좌를 등록했는데,

강사가 농담 따먹기 위주로 하고 레벨이 너무 낮았다.

몇 번 가다가 말았다.

나는 점점 공부에서 멀어져 가며 딴짓거리를 머릿속으로 꾸며댔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봉고를 타고 0교시 보충수업에다 밤 9시까지 야간자율학습으로

너덜너덜해진 나는 귀걸이가 하고 싶어졌다.

나는 한 번 꽂히면 꼭 하고 마는 성격이었다.

토요일에는 일찍 마치니까 서면으로 버스를 타고 갔다.

나는 서면 지하상가를 기웃거리다 귀를 뚫으러 들어갔다.

귀걸이를 먼저 고르면 직원이 기다란 침을 칼로 뾰족하게 연필을 깍듯 다듬었다.

나는 둥글둥글 계란 과자처럼 생긴

조그만 14K 금귀걸이를 골랐다.

총 모양으로 생긴 귀를 뚫는 기계도 있었는데,

직접 손으로 하는 것이 내 눈에는 좋아 보였다.

빛나는 조명 아래 갖가지 형상으로 반짝이는 금속의 액세서리들은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들었다. 귀걸이만 하면 번쩍번쩍 내 존재가 빛날 것 같았다.


"이거 얼만데예?"

"만 원이고, 귀는 서비스로 뚫어 줄기다. "


내가 귀걸이를 하고 학교에 간 첫날,

민선이가 말했다.

"영은아, 니는 그런 아가 아인데 와 그랬노?"

"귀 좀 뚫었다고 내가 변한 기 아이다."

"니는 모범생인데 그러면 안 된다 아이가?"

"가시나야, 말을 와 그래 하노?"


나는 눈물까지 보이며 나의 타락을 슬퍼하는 민선이가 못마땅했다.

아무리 조그만 귀걸이였지만

체육수업을 하거나 하면 ,

귀 밑으로 댕강 잘라놓은 머리카락이 날리면서 반짝였다.



그러다 사달이 나고 말았다.

전교생 귀 검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내 심장은 두근거리다 못해 쫄아드는 것 같았다.

걸리면 죽음이었다.

무서운 학생부 선생님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 조그만 구멍을 선크림과 파우더로 막아도 막아도 표시가 나는데 정말 막막하였다.

민선이는 내가 걱정이 되어 안절부절못하였다.

그런데 신은 내편이었던가.

반장과 부반장은

교실 앞에 서서 선생님들을 맞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교실 앞에서 선생님들이 검사를 하러 들어올 때마다

꾸벅 절을 하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귀검사조차 받지 않았다.

귀 뚫은 것으로 걸린 11명의 날라리들은 교무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드는 벌을 섰다.

두꺼운 각목으로 다리도 얻어맞았다.

그리고 반성문도 썼다.

나는 자신도 그런 벌을 받았어야 하는데

혼자 부반장이라고 열외 된 것 같아서 양심이 좀 찔렸다.

한편 벌을 서고 매를 맞는 것이 너무 무서워서 아찔하기도 했다.



나는 귀를 뚫은 김에 그다음 주에는 서면 지하상가 옷가게에서

평소 입지도 못할 배꼽티를 샀다.

그리고 꽃들이 만발하고

조금씩 더위가 인사하는 6월 말에

옆동네 남자고등학교의 축제에 들렀다.

귀걸이를 하고 배꼽티를 입고서.

그 위에는 조끼를 입어서 가리긴 했지만,

나는 묘한 쾌감을 느꼈다.

역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좀 재미가 있었다.

친구들과 단체 미팅도 하고 남학생들과 술도 마셨다.

나는 한 남학생과 한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나는 들키면 어쩌나 하면서도, 모범생의 일상을 저버리고

날라리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남학생에게 편지를 쓸 때,

나는 착한 척, 공부 잘하는 척,

예쁜 척을 하면서 미사여구를 늘어놓았다.

남학생도 열심히 답장을 하였다.

그런데 편지를 주고받았던 남학생에게,

'전쟁과 평화' 세 권짜리 책을 빌려주었는데,

그 학생이 차일피일 미루면서 돌려주질 않는 것이었다.

그 책은 큰언니의 애장품인데

내가 그 아이의 마음을 얻으려

선심 쓰듯 빌려준 것이었다.

나는 찾아갈 수도 없고,

전화를 계속하기도 쉽지 않고

여간 답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썸도 제대로 타지 못한 채

고딩의 만남은 끝이 났다.



나는 현실은 기대와 다른 것이 참 허무했다.

귀만 뚫으면 온 세상이 반짝일 것 같았는데,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기만 하고,

남자친구만 생기면 자신을 아껴주고

잘해줄 것만 같았는데 책만 가지고 튀고 말이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지루한 여고시절을

채워 3년을 버틸 자신이 없었다.


나는 스스로가 감옥에 갇힌 죄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빽빽한 교실 안에서 매일이 다를 것 없었다.

움직이지도 않고 의자에 앉아 있으니 엉덩이에 살만 붙고

무다리가 되어 알통이 삐져나오기만 했다. 잘하고 싶은데 공부가 내 뜻대로 안 되고,

그렇다고 밤새워 열심히 할 자신도 없었다. 진짜 중요한 것은 국영수보다

스스로에 대해 알아가고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것을 찾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고, 알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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