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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영은의 비밀

#20 가깝고도 먼 친구

by 에스더쌤


"니는 어느 중학교 댕겼노?"

"어, 광안여중."

"매점 갈래?"

"그래, 가자!"

나는 P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단발머리 빼빼 마른 주리와 짝꿍이 되었다.

쉬는 시간에 매점에 가서 몽쉘통통도 사 먹었다.

매점은 유리큐브처럼 생겨서 물건을 고를 수 없고, 작은 구멍으로

사고 싶은 제품을 말하면 직원이 건네주고 돈을 받았다.

쉬는 시간마다 북새통을 이루었다.

나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는 때로는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주리가 말도 없이 나를 투명인간 취급을 하였다.

4월 초순에 체육시간에 체육관으로 이동할 때, 주리는 내가 아닌 동주와 가버렸다.

나는 좀 소심해져 있었다. 자고로 여고생들은 둘셋씩 무리 지어 다니는데 거기에 끼지 못하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내가 귀를 뚫었다고 나쁜 길로 들어섰다며 울었던 민선이는 혜진이와 늘 점심을 먹는데, 거기에 끼였더니 너무 불편했다. 나를 위해 쓸데없이 울어진 유일한 친구인 민선이는 나를 좋아했지만, 혜진이와 더 친했다. 나는 혜진이와는 친하지 않았다. 헤진이는 싫은 내색을 하진 않았다. 그냥 나 스스로 편하지가 않았다. 혼자 다니기도 하고, 또 아쉬우면 민선이 패거리로 갔다가 요리조리 옮겨 다녔다.




눈부시게 청순하고 아름다울 여고 1학년은 외로웠다. 호랑이 같은 담임선생님이 수시로 나를 불러서 심부름을 시켰다.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학생들 명부에 붙일 증명사진을 빈칸 크기에 맞게 오려서 풀로 붙이는 일을 자습시간에 시켰다. 입학성적이 좋아서 나는 성적대로 부반장이 되었다. 부반장이랍시고 체육관이나 미술실에 갈 때는 출석기록부를 챙겨가고, 과목 선생님들의 사인을 받아야 했다.


여고는 대학을 지으려다 여고로 바꾸는 바람에 산 꼭대기에 있었지만, 넓고 아름다운 캠퍼스였다. 철 따라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과목마다 특별 교실이 많아서 이동하는 일이 잦았다.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가느라고 오르막길을 오르면 졸업 즈음엔 모두들 통통한 무다리가 되는 학교였다.




그러다 고2에 들어가자마자 눈에 띈 아이가 있었다.

배진희, 진희는 큰 눈에 쌍꺼풀 수술을 하여 안 그래도 부담스러웠는데,

늘 눈이 부어 있고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은 고1 겨울 방학 때,

진희가 쌍꺼풀 수술을 받았는데,

부은 눈이 너무 속상했던 진희가 매일밤 통곡하며 울었던 것이었다.

쌍꺼풀 한 눈은 밤마다 우니까 가라앉을 틈이 없었고, 진희의 눈은 늘 빨갛고 퉁퉁부어있었다.



진희는 작은 키에 하얀 피부를 가진 귀엽고 동글동글한 얼굴을 했다.

진희는 내가 귀를 뚫은 것을 보고 자기도 뚫어달라고 했다.

나는 진희가 가져온 귀걸이를 칼로 뾰족하게 자른 후,

진희 귀를 찔렀다.


'우두뚜뚝'


생각보다 심한 소리가 났고 나는 깜짝 놀랐다.

잘하지도 못하면서 해준다고 한 자신이 미울 지경이었다.

얇은 귀바퀴 피부에 층층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잘 못 뚫어서 진희는 몇 날 며칠을 아파했고, 막힌 후에

다시 귀걸이 가게에 가서 뚫었다.





영어 시간에 진희는 혀가 꼬인 것 같이 원어민 수준으로 책을 읽었다.

발표도 잘하고 봄소풍에서는 부끄러움도 없이

앞에 나가서 장기자랑으로 춤을 췄는데,

나는 그 모습에 반해버렸다.

나는 진희가 그냥 좋았다.

나도 앞에 나가서 춤을 추고 싶었는데,

어떻게 춰야 하는지도 모르고 마음속으로만 추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 나도 진희처럼 춤추고 싶다!'


춤을 추러 나갈까 말까 하는 짧은 찰나에 이미 내 가슴이 쿵쾅거려서 어쩔 줄 몰랐다.



언제부터인지 영은이는 진희와 단짝이 되었다.

쉬는 시간이면 꼭 들러붙어서 안기도 하고

뽀뽀도 하고 못 말리는 사이가 되어갔다.

나는 진희가 친구라서 너무 든든했다.

중간고사를 치고 나서, 나는 진희집에 놀러 갔다.

집에서 팝송이나 듣고 책이나 읽던 나는 난생처음으로 세미 포르노를 보았다.

제목은 '나인 하프 위크'였다.


나는 까무러칠 것 같았다.

어떻게 저런 장면이 있을 수가 있을까 싶었다.

한 동안 영화 속 장면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진희는 사교성이 좋고 붙임성이 있어서 길거리에서 만난 외국인들과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였고, 그들에게 배운 언어로 노래도 잘했다.


나는 진희가 있어서 학교 다닐 맛이 났다.

는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진희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군거렸다.


한편 진희는 영어도 잘하고 성적이 우수해서 나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항상 노는 것 같은데, 성적은 진희가 나보다 좋으니까 질투심이 생겼다.




그러던 어느 날, 고3을 올라가기 직전

춘계 방학이 끝나고 옆 같은 재단 남고에서 졸업식을 먼저 하게 되었다.

진희가 가자고 하였다.

"영은아, 우리 남고 졸업식에 가보자. 오빠야 보러 가자."

"어? 쉬는 시간 10분에 못 댕겨온다."

"아이다, 금방 갔다 오자, 영은아 같이 가자."

"모르겠다. 시간 안에 꼭 와야 된대이."



진희가 오래도록 짝사랑했던 오빠가 졸업을 하게 되었는데,

진희는 졸업식에서 그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수학을 1교시에 마치고 쉬는 시간 10분 동안을 예상하고

옆 학교로 달려갔다. 진희가 짝사랑했던 오빠는 한양대 기계공학과에

합격하였고, 멀리서도 귀여운 외모와 번듯한 자세가 매력적일 만큼 멋진 오빠였다.


멋진 오빠를 찾은 순간, 여고에서 종이 울렸다.

"진희야, 쉬는 시간 끝났다. 빨리 가야 된다 안카나."

"쪼매만 더 있자, 쪼매만."



내가 진희를 붙잡고 쉬는 시간 끝났다고 가자고 가자고 애원했는데도 진희가 꿈쩍을 안 하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오빠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을까.

그렇게 10여분 늦게 교실에 들어갔고, 무용선생님은 단단히 화가 났다.


나는 심지어 반장이었다.

내가 차렷 경례를 하고 수업을 시작해야 했다.

사연을 듣고 화가 안 풀린 무용선생님은 담임선생님에게 일렀다.

수업이 다 끝나고 종례 시간에 영은이와 진희는 각목으로 매를

열 대씩 맞았고, 손을 들고 벌을 섰다.




그런데 내가 열을 받은 포인트는 따로 있었다.

진희가 담임선생님이 왜 그랬냐고 묻는데 묵묵부답이었고,

매를 맞고 나서도 나에게 미안하다는 한 마디가 없었다.


국민학교 시절 한복 준비물 안 가져간 것으로 맞은 것 외에는 중고등학교 때 맞아 본 일이 없었던 나는 충격이 너무 커서 가시질 않았다.

매를 맞는 아픔보다 반장으로서 평소 모범생인 내가 급우들 앞에서 매를 맞는 모멸감이 더 컸다.

그렇다고 진희에게 따져 묻지도 못했다.


나는 그렇게도 좋아하던 친구, 진희를 마음에서 보내버렸다.


'가시나, 지 때매 맞았는데 사과도 할 줄 모른대이.'




나는 연인과 실연한 사람처럼 한 동안 학교 다니는 재미를 잃었다.

나는 진희를 너무 좋아해서 너무 아팠다.

좋아해서 더 미웠다. 그런데 당시에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내 감정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분노에 휩싸였고, 억울했다. 답답하고 막막했다.

착하고 다정하게 살려고 노력했지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 지를 배워본 적이 없었다.


나는 두 번 다시 진희 같이 재미있고 끼 많고 똑똑한 친구를 만나보지 못했다.

같은 대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꿈이 컸던 진희는 유학을 준비하여 미국으로 떠났다.

그렇게 나는 진희와 영영 이별을 하게 되었다.

진희는 미국에서 부잣집 한국계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하였고, 열심히 공부하여 약사가 되었다.

약대도 최우수로 졸업하였다. 서울로도 유학을 꿈꾸기 쉽지 않은 시절, 머나먼 미국 유학을 택한 내 친구 진희.

지금은 시댁이 운영하는 주유소 한편 약국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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