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호영은의 비밀

#19 Super Sensitive

by 에스더쌤

“나는 왜 이럴까?”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이었다.


나는 넷째 딸이라서,

그렇게 태어나서, 여러 이유 등이 있겠지만

스스로도 유별나다고 생각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너는 너무 예민한 게 아니라 특별한 거야.

네가 예민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너무 한 거야.”

이런 말을 들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태어난 직후부터 울음소리가

유별나긴 했다.

아주 큰데 듣는 사람을 후벼 파는 듯한

날카로움이 있었다.

그러니 그 울음소리를

자주 듣는 나의 부모님은 미칠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넷째까지 딸이라

여간 실망스러운 게 아닌데,

나는 울어도 너무 울었다.

나는 옆집, 뒷집, 온 동네가 아는

울보였다.


울어도 울어도 풀리지 않고 성에 차지 않았으니

나중에야 울음을 멈춘 것은

내가 좋아졌다는 징후가

아니라 실은 더 나빠졌다는 반증이었다.

울어도 소용이 없으니 멈추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부모님은

동생 영남이까지 낳고 나니

울보인 나를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영남이는 태어나자마자 여리고 아파서,

울어대는 나는 뒷전이었다.

위로도 딸들이 셋이니

부모님은 아이들 먹이는 것만도 힘에 부쳤다.


나의 얼굴은 파리했고,

몸은 야위었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자주 감기를 앓았고,

피부는 예민해서 얼굴엔 버짐이 피고,

조금 긴장하면 설사를 했고,

자주 구토를 했다.


나는 밥을 먹을 때도 가리는 것이 많았다.

김을 먹다 까슬한 것이 걸려서

이후로는 먹지 않았다.

고등어를 먹다가 생선 가시에

고생을 하고서는 멀리했다.

그러니 먹을 것이 없었다.

쇠고깃국에 있는 쇠고기엔 기름이 많아서

계속 떼어내니까,

아빠는 그걸 또 참지 못하고

뭐라고 하였다.

그러면 나는 밥맛이 떨어졌다.

아빠가 가끔 만두나 치킨, 빵 등을 사주었지만

입 짧은 나는 몇 개 먹지도 못했다.

사온 즉시 먹지 않으면,

남아날 일 없는 간식거리였다.

먹성 좋은 언니들이 다 먹어버렸다.

워낙 입이 많았으니까 많이 사도 금세 사라졌다.


학교에 다니게 되면서부터는

입 밖으로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면서

속으로 계속 생각했다.

그리고 집으로 와서 그때 그렇게 말할 걸 하고 후회하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친구들이 뭘 하는 것을 보면 갑자기 막 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멜로디언이든 피아노든 한동안은 꽂혀서 하루 종일 매달리기도 했다.

그런데 아주 오래가지는 않았다.


다행인 것은

수업 중에 선생님이 말하면 잘 알아들었고,

따로 공부를 안 해도 시험을 치면 거의 다 맞았다.


딱히 할 일이 없어 읽은 책은

나에게 한 줄기 빛과 같았다.

훌륭한 위인들의 모습에서 나 자신도

훌륭한 사람이 되리라 다짐했고,

문학 작품 속 캐릭터들을 보며

세상에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위로도 받고 재미도 느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생리를 시작했는데,

학교에서 성교육을 간략히 받은 것 외에는

아는 바가 없어서 스스로 터득하였다.

슈퍼마켓에 가서 생리대를 사서

쓰다가, 양에 따라 달리 써보기도 하고,

여러 종류를 써보고 장단점을 파악하기도 했다.

생리가 다 끝난 줄 알았는데,

하루 이틀 더 조금씩 이어지면서

인체의 신비함과 더불어 대처 방법도 익혔다.


나의 예민함은 생리주기에서도 드러났다.

보통은 28~31일의 주기인데 나는 20일 정도였고,

규칙적이었지만, 조금만 긴장하거나 무리하면 20일 사이에 또 한 번을 하게 되니

어떨 때는 한 달 내내 생리를 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면 또 빈혈이 오는 것이었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가 다가와도 설사를 하고

생리도 하고 설상가상이었다.


그 외에도 여자중학교에 가서는 가뜩이나

예민한 나를 더 예민하게 만드는 자극들이 많았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비슷비슷한 환경에 있던 동급생들이었는데,

부잣집 아이들이 많이 있는 여중이어서,

는 부티 나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들과 나를 비교를 하게 되었고,

상대적인 열등감과

박탈감도 가졌다.

너무 멋진 옷을 입은 아이,

외국인처럼 영어발음이 좋은 아이,

아이큐가 150인 아이,

텔레비전에나 나올 법한 반찬과 과일을 챙겨 싸 오는 아이 등.


온갖 시지각적인 자극, 청각적인 자극,

머릿속에서 맴도는 여러 생각들로

나는 쉽게 지쳤고,

사춘기 소녀들 틈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집에 오면 녹초가 되었다.

아주 사소한 일도 나에겐 쉽지 않았다


예를 들어 키가 큰 지민이가

스타킹에 구멍이 나서

400원을 빌렸는데

며칠이 지나도 주지 않기라도 하면,

나는 속으로

‘왜 안 주지?’, ‘달라고 해야 되나?’, ‘잊었나?’

하며 별별 생각을 다하고서도 말하기가 너무 어려운 것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지민아, 며칠 전에 빌린 거 기억하제?”

얘기를 하니 지민이는

“아, 깜박했버렸네, 미안, 여기 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예쁜 옷만 보면 나는

사고 싶어 안달이 났다.

내가 지난주 봐 둔 위아래

버건디 색 셋업 트레이닝복을

사기 위해 얼마가 필요하고,

어떻게 살 것이며, 이것을

아빠에게 어찌 말해야 하나부터 전전긍긍이었다.


친구기 지나가는 말로

”니는 뜯어보면 예쁜 데는 없는데 조화가 잘 된 얼굴이데이."

한 말에 속으로 예쁘다는 건지,

못생겼다는 건지

머릿속이 하얘지도록

여러 생각이 돌고 도는 것이었다.


교회오빠를 짝사랑해서 초콜릿을 준비하고는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나오는 사랑에 관한

문구를 종이를 얇게 잘라 적어서 둘둘 말아

비밀스럽게 초콜릿 사이사이에 넣어 포장했다.

수능 전 주가 되도록 줄까 말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나에게 삶이란 너무 버겁고 부담스러웠다.

가끔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은 어떨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는 것에 비해 성적이 잘 나와서 다들 모범생인 줄 알았지만

나는 그저 수업 시간에 안 자고 꼬박꼬박 집중하려 애썼을 뿐,

그렇게 인생에 대한 기대가 있거나,

잘되고 싶거나 그런 마음이 없었다.

‘되는대로, 사는 대로 사는 거지 뭐.‘ 싶었다.

복잡한 수학문제는 풀어서 뭐 하나 싶고,

훈민정음은 알아서 뭐 하나 싶고,

수업을 하는 교사도 썩 행복해 보이지 않았고,

이 세상은 그야말로 블루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고,

아프고 힘든 사람들도 많고,

부모님도 힘겨워보이고

언니들도 안쓰럽고

스스로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맨날 어딘가에 장래희망을 쓰라면

'교사'라고 쓰긴 했지만

교사는 단지 내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그나마 괜찮은 직업군이었을 뿐이다.

큰언니가 영어교사라고 사람들이 추켜세우고

학교에서 맨날 만나는 사람이 교사이니

내가 달리

다른 직업을 생각해 볼 여지가 없었다.


나는 자신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이 세상을 어둡게 보았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고,

다른 사람에게서도 안 좋은 면을 찾았다.

단점이 너무 잘 보였다.


그러나 내가 교회를 다니면서

성경말씀을 들어보니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다 했다.

거기서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부모님도 자신을 사랑하는지 확신이 서질 않는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니 새로웠다.


또 계속 닥치는 대로 읽은 독서의 힘으로

나는 스스로를 조금씩 돌아보게 되었다.

마치 작은 씨앗이 바위를 쪼개듯이

그 힘은 처음엔 작고 미약했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조금씩

나의 허전한 마음을 채우고,

치유시켰다.


어느 날 나는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 스스로가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지 말이다.

나는 아주 예민했지만,

실은 아주 섬세하고 창의적이고

독특한 사람이었다.

너무 사랑스럽고 매력적이고 통통 튀는 사람,

저절로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강력하게 때로는 과도할 정도로

감정이입이 되어 공감하며,

돕고자 하는 마음이 넘치고,

배려가 몸에 배이고 친절하고,

몸의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스스로 잘 관리하고 돌보는 사람이었다.


나는 지난 세월 동안

스스로의 잠재력을 알지 못하고

쓸데없는 데 소진하며 아파하고 힘들어한

자신이 너무 안타깝고 미안해졌다.


한편 지금이라도 자신의 소중함을 깨달았으니

그 자체가 너무 감사했다.

나는 너무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다 보니 집약되지 못하고 좀 어수선한 점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다양한 경험들로 채워지는 자신의 삶이 너무나 만족스럽고 행복하기도 했다.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와 같이 예민해서, 자존감이 낮아서

갈 길을 알지 못해서, 부모님에 대한 아픔이 있어서 고통당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것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겪었던 아픔을 지나 다시 해석하고

스스로 얼마나 귀하고 사랑스러운지 알게 된다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내가 낳은 두 아들,

내가 선택하고 사랑했던 남편을 사랑하는 것도 쉽지 않아서

또 깨달았다.

산다는 것은 때로는 아는 대로,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하루를 살더라도 또 좋은 것을 채우고 채우는 수밖에.

내가 스스로 소중함을 알고 쉬어가고,

자신을 잘 돌볼수록

크게 힘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주변 사람들을 쉽게 사랑할 수 있게 된 것도 축복이었다.

작은 미소, 따뜻한 말, 사랑이 깃든 문자나 카톡, 사소한 선물이나 몸짓만으로도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아주 많았으니까.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18화호영은의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