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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영은의 비밀

#18 하나뿐인 내 동생

by 에스더쌤

따뜻한 부산이라지만

겨울의 바닷바람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몇 년의 한 번이라도 이번 겨울엔 폭설이 내렸다.

그런데 봄이 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자리를 잡았다.

봄의 햇살은 마술 같았다.


나는 한겨울 메말랐던 가지에 순이 돋고,

새들이 지저귀고 개나리가 피는 봄이 좋았다.

아직은 차갑지만 봄햇살이 주는 따뜻함에 매료되었다.

나는 봄에,

그것도 딱 여지없는 봄에 태어났다.

4월 초.



하나뿐인 여동생은 11월에 태어났다.

두 살 터울이지만

2년 6개월 정도의 차이는 큰 것이었던가.



나는 동생 영남이가 태어나는 광경이

또렷이 기억이 났다.

엄마가 비닐을 깔아놓은 안방에 누워있고,

동생이 세상에 나왔던 광경이 강렬하게 기억에 남았다.



가끔 동생 태어났을 때가 기억난다며

이야기를 시작할라치면

시작도 하기 전에

엄마와 아빠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런 얘기는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일단 입을 다물어야 했다.

어른이 말하면 그냥 듣는 거라 했다.




어쨌든 동생이 태어남과 동시에

나는 찬밥신세가 되었다.

물고 있던 젖도 떼야했다.

엄마의 옆자리는 동생 몫이 되었다.

나는 그래서 더 크게 울었던 것이다.

나 좀 봐달라고, 나도 안아달라고 말이다.



나는 자주 여동생이 나오는 꿈을 꾸었다.

포대기에 싸인 아기가 낭떠러지에 올려져 있어서

불안함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꿈속에서 나는 아기를 구하려고 기를 쓰기도 했다.



내 눈에 부모님은

여동생이 막내라고 그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서 나는 자주 심술이 났다.

나중에도 부모님은

내가 언니들과 싸우면

동생이 되어 대든다고 나를 혼냈다.

내가 동생과 싸우면

언니가 되어 동생 안 봐준다고 또 야단을 맞았다.



맨날 나만 혼나니까, 나는 설움에 북받쳤다.

나는 얼굴이 뽀얗고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여동생에게 샘이 났다.

몰래 다가가서 꼬집고 누워있던 아기에게로 가서

소변을 보기도 했다.




그런 동생 영남이는 태어나자마자 많이 아팠다.

큰 대학병원에서 가망이 없으니 데려가라고 해서

집에 데려다 놨다.

부모님은 어린 아기가 죽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그런데 부모님의 간절한 소원이 하늘에 닿았던지

영남이는 살아남게 되었다.



나는 동생이 아픈 게 자신이 미워해서

그런 건 아닌지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꿈속에서나마 동생을 구하려고 했던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는 늘 집에 있었는데

대여섯 살 무렵부터는

아빠와 연탄배달을 같이 하며

나와 영남이를 집에 두고 갔다.

그건 비극의 시초였다.



나는 스스로도 돌볼 수 없는 어린아이였다.

그런 나에게 동생과 잘 있으란 건

부모님의 어쩔 수 없다는 핑계였다.

상황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나와 영남이는 시시콜콜 다투었다.

다투었다기보다는 본능적인

영역싸움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옥스포드 블록을 가지고 놀면

영남이도 다가와 자기가 가지고 놀겠다고 했다.

그러다 싸우고

내가 한 대 치면 영남이는

동네가 떠나가라고 울었다.

영남이도 본능적으로 알았다.

부모님 없을 때 울어봤자 소용이 없다는 걸.




참 신기하게도 영남이는 부모님이 점심때 오실 무렵

딱 그때 크게 울기 시작하는 거다.

부모님은 점심 먹으러 와서

막내는 울고불고 영은이는

태연하게 모른 척하고 있는 꼴을 보자면 가슴이 아려왔다.

어린것들을 두고 나가야 하는

부모는 어쩔 수 없는 형편에 코울음을

삼키면서도 별 수가 없었다.



어린 나를 다그치면

상황이 더 안 좋아진다는 걸 알기엔

부모님도 미숙하긴 매한가지였다.

본인들은 나에게 동생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얘기하면서,

부모님이야말로 매사에 티격태격이었다.




나중에야 나는

하나뿐인 동생

영남이를 때린 것을 두고

얼마나 미안했는지,

자주 죄책감에 시달렸다.



신앙을 가지게 되었을 을 때,

맨 먼저 동생을 괴롭힌 것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을 정도였다.

영남이도 나중엔 언니인 나에게 용서를 빌었다.

자신은 언니를 언니로 인정한 적이 없고,

재수 없게 대했다고 말이다.



나는 국민학교 들어가서도 한글을 못 떼는 동생 영남이를 바보라고 놀렸다.

나는 여섯 살에 스스로 한글을 깨쳤기 때문이다.

그런 영남이가 어느 날은 나보다 힘이 세져서

내가 휘두른 팔을 잡더니

대들고 하지 말라고 당당히 말했을 때 너무 놀랐다.



심지어 나중에 영남이는 수능에서 상위 2% 안에 들어서

의대를 수시로 입학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으니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동생이 잘해서 잘됐는데 알 수 없는 질투심에

화가 치밀었다.



영남이는 어느 모로 나를 능가했다.

희고 입체적인 얼굴, 빨간 입술, 길고 날씬한 다리,

큰 키, 다이아몬드형의 얼굴형 조차

너무 이뻤다.



나에게 하나뿐인 여동생 영남이는

너무 사랑하는데

너무 다르고, 말이 잘 안 통하고

조금만 함께 있으면 싸움이 되고 마는

골칫거리였다.


나는 나름대로

둘이 있으면 라면을 끓여도 꼭 나눠먹고,

알게 모르게 챙겼는데 집안일을 할라치면

여동생은 거부했다.


"내가 설거지할 테니까 니 방 좀 닦아라.'

"싫다. 하고 싶으면 니나 해라."


이러면 나는 정신이 돌아버릴 것 같았다.

나중에 영남이는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서로 대할 일이 없었다.

같은 대학교에 다니면서도

몇 번 마주친 적도 없었다.




나와 여동생 영남이는 자매지만

친구보다 못한 원수 아닌 원수이기도 했다.

먼 훗날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어도

좋게 말하고 서로 노력했지만

작고 작은 티끌들이 쌓여

별 것 아닌 대수롭지 않은 일에

묵은 감정이 피어올랐다.


나는 나대로, 영남이는 영남이대로

각자의 존재는 그저 달랐다.

틀린 것은 아니었다.

가족이라고 엄마아빠라고 저절로 사랑하고

다 용서하고 수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자매라고 저절로 사랑이 되는 것도 아니었고,

사랑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먼 훗날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고서도

서로의 다름을

한참 지나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희망이 있는 것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거기서 출발하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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