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둘째 언니 호영애
봄이 되어 갖가지 꽃들이 만발했다.
개나리가 먼저 고개를 내밀더니 매화가 하얗고 말간 얼굴을 자랑했다.
머지않아 노오란 산수유꽃이 동네어귀를 물들이고,
곧 벚꽃이 필 무렵이었다.
나는 봄만 되면 아팠다.
봄에 태어났는데, 봄에 제일 힘들었다.
며칠씩 감기에 걸려서 오한과 고열에 몸을 떨었다.
콧물과 기침은 친구였다.
바짝 마른 얼굴엔 허옇게 버짐이 올라왔다.
안티푸라민을 거친 입술에 자주 바르다 보니
입술색이 사라졌다. 보랏빛이다 못해 희끄무레해졌다.
나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외모에 관심이 많았다.
옆집에 긴 머리 아가씨 언니가
재래식 화장실에 드나들 때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그 향기가 나에게도 있었으면 했다.
나는 나름 노력을 하였다.
온 가족이 쓰는 싸구려 로션을 바르고 또 발랐다.
향기는 좋은데 효과는 별로 없었다.
공부 잘하기로 유명한 첫째 언니에 비해
둘째 영애 언니는 살짝 실력이 못 미쳤다.
누가 봐도 모범생이고
조용하고 공부 잘하는 영애 언니는
집에서도 말이 없고 주로 잠을 잤다.
조용히 학교에 왔다 갔다 하던 둘째 언니가 중학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피에 비듬이 많이 생겼다.
감색 옷을 입고 학교에 다녀온 어느 날,
엄마는 기겁을 하였다.
"이게 뭐꼬? 가시나가. 머리 잘 감고 댕기라."
"진짜 와 이렇노? 너무 심하다."
"안 되겠다. 이리 와봐라."
어깨에 하얗게 눈처럼 내린 비듬을 보고
참빗으로 빗기도 하고 샴푸로 박박 씻게 했다.
그런데 좀처럼 차도가 없고,
점점 피부에 발진이 생겼다.
엄마는 바쁜 와중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서
영애 언니를 데리고 메리놀 병원 피부과에 진료를 보러 갔다.
병명은 '건선'이었다.
문제는 2주마다 병원에 가야 했고,
다녀올 때마다 병원비가 적지 않아 아빠는 부담을 느꼈다.
병원비를 줄 때마다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병원비가 왜 그래 비싸노?"
"돈도 없는데 병원에 꼭 가야 되나?"
내가 본 것도 몇 번인데,
영애 언니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스트레스가 너무 컸다.
엄마를 대신해서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묵묵히 하고,
필요하면 연탄을 나르거나 리어카를 미는 일도 해야 했던
영애 언니는 스트레스로 자가면역질환에 걸린 것이었다.
아빠의 폭언은 스트레스를 더 유발하였다.
엄마는 누가 하는 말을 주워듣고선
약국에서 알약을 받아 왔다.
그 약은 영애 언니의 호르몬체계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증상이 호전되기는커녕 더 심해졌다.
급기야 영애 언니는 삭발을 하였다.
그리고 가발을 써야 했다.
텔레비전 스님이나 삭발을 하는 줄 알았다.
내 언니가 삭발을 한 모습을 보는 것은
어린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부끄럽거나 숨겨야 될 것이 아닌데,
아무도 대처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나마 쓴 싸구려 가발은 누가 봐도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가뜩이나 건조한 봄에
건선은 온몸에 꽃이 만발하듯 피어올라
특히 밤에 잘 때 가려움이 극심하였다.
엄마는 또 누구의 말을 듣고선 석유를 얻어와선
영애 언니에게 바르게 했다.
영애언니는 주로 나더러
연고나 약을 바르게 했다.
그나마 내가 셋째 영주 언니에 비해
꼼꼼하게 잘 발랐기 때문이었다.
면봉도 아니고 손으로 바르면서
나는 너무 마음이 아팠다.
오돌토돌 빨갛게 올라온 피부 위에 조심스레 바르면서
마음속으로는 찝찝한 마음도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또 죄책감이 되었다.
한 번은 석유를 바르고선
따갑고 아파서 고통에 신음하는
영애 언니의 신음소리를 듣고,
나는 속으로 울며 기도했다.
"하나님, 살아계시다면 언니를 낫게 해 주세요.
차라리 제가 아프게 해 주세요."
얼굴이 하얗고 동그란 얼굴에 누구보다 예뻤던
영애 언니가 싸구려 가발을 쓰고서 어색한 단발머리로
다니는 모습에 나는 마치 자신이 그러는 것처럼
수치스럽기도 하고 기분이 안 좋았다.
영애 언니의 건선은 건조하고 추운 겨울에 더 심해졌다가
습한 여름에는 좀 나았다가 했다.
영애 언니는 심해지면 병원에 갔다가,
아빠의 잔소리가
싫어서 속으로 다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입으로 돈 달라고 안 하련다.'
'드럽고 치사해서 내 힘으로 돈 벌어서 치료할 거다.'
주로 조용한 영애 언니는 가끔 동생들에게 소리치기도 했다.
속으로 삭인 분과 화는 어떤 지점에서
폭발하듯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그럴 때면
나는 둘째 언니가 몸서리치게 무섭기도 했다.
영애 언니는 빨리 돈을 벌고 싶어서
성적보다 조금 올려 쓴 국립대학에 낙방하자마자,
공무원 시험 준비를 혼자서 시작했다.
문제집을 사서 집에서 풀었다.
그런데 공무원 시험에서도 낙방했다.
영애 언니는 안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이듬해에 하향 지원하여 사립대학 영문과에 진학했다.
대학에 다니면서도
방학이면 집에서 버스를 타고 서면 신발공장에 다녔다.
또 영어과외도 하고 일찍부터 열심히 돈을 모았다.
부모라고 기대할 것도 없었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교직도 이수하였다. 기간제 교사로 일하며 일 년 동안 모은 돈으로
캐나다에 어학연수도 다녀왔다.
영애 언니는 건선 때문에 그 누구와도 사랑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하지만 늘 인생이란 것이 다짐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납치하다시피 먼 길을 운전해서 데려간 후 사랑 고백한
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도 하였다.
그 누구보다 예쁘고 잘생긴
딸과 아들도 낳았다.
먼 훗날 자신이 어려서 소아우울증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고,
일찍이 존재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여러 책을 섭렵하며
자기만의 가치관을 단단히 세워갔다.
세상 누구보다 쿨하게 살았다.
자유롭고 편안하게.
가끔은 내가 보기에 스스로 쿨하다는데
아니기도 했지만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둘째 언니와 닮은 점이 좀 있다.
좀 깔끔하고 도도하고 아파봤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도 오랫동안 아토피 증세와 비염으로 고생을 했다.
몸이 아픈 것은 사실 마음이 아픈 것이라고 여긴다.
몸이 아파서 마음이 아픈 것인지,
마음이 아파서 몸이 아픈 것인지 알쏭달쏭하긴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