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착한 아이 증후군
나는 위인전을 열심히 읽었다.
집에 세계명작동화 전집이랑
위인전 전집이 있었다.
언제나 둘 중 하나를 꺼내어 읽었다.
글밥이 적지 않았지만
책 한 권을 들면 끝까지 읽었다.
너무 재미있어서 중간에 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생각할 때 위인들은 참 멋졌다.
동의보감을 쓴 허준은 과거시험을 보러 가는 길에
병으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외면하지 못하여
돌봐주고 시험을 놓쳤다.
학교에서도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부모님도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했다.
어른들 만나면 인사도 잘해야 하고
심부름도 잘해야 하고 등등.
식사 때는 말없이.
어른들 이야기할 때는 끼어들어서는 안 되고
밖에서 음식을 들고 다니며 먹어도 안 되었다.
특히나 맛없다, 싫어, 안 할래 등
부정적인 표현은 하면 안 되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거울을 깨끗이 닦는 법을 알려주었다.
나는 귀담아들었다.
집에 와서 연둣빛 때수건에 비누 칠을 해서
거울을 닦은 다음에
물걸레도 한 번 더 닦고
마른 수건으로 한 번 더 닦아냈다.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났다.
먼지가 끼고, 로션 등이 묻었던 거울이 깨끗해지자
거울에 비친 내 얼굴도 더 예뻐 보였다.
중간중간 위기도 있었다.
비눗물이 거울에 줄줄 흘러 바닥에 물이 흘렀다.
거울 윗부분에는 손이 닿질 않아서
의자를 가지고서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 미끄러져서 넘어지기도 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거울을 보니 속이 시원했다.
나는 엄마가 저녁에 집에 들어오자마자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엄마, 오늘 내가 거울 닦았대이."
"그래. 다음에는 물 묻히지 말아라. 수건도 많이 썼노?"
"깨끗하게 잘 닦은 거 안 보이나?"
"그래, 알긋다. 저리 가라"
엄마는 지쳐서 만사가 귀찮았다.
엄마는 원래 반응도 적고
조금 우울해 보이는 경향이 있고 조용했다.
늘 그렇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한 것이
그날따라 나에는 아픔이었다.
기대를 한 자신이 바보였다.
나는 나름 최선을 다했는데 그 결과는
너무 싱거웠던 것이다.
칭찬은 못해줄지언정
지적질이라니.
나는 사는 게 썩 재미있지 않았다.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상상을 하도 많이 하니까
꿈속에서 수없이 날긴 했지만,
현실에서는 날 수가 없었다.
시시한 하루하루인데,
그날은 너무 실망스러웠다.
나는 평소에도 부지런히 움직였다.
학교 다녀오면 늘 방 한 번 쓸고,
걸레 빨아서 닦고 나서
숙제해 놓고
놀이터에 놀러 갔다.
한동안은 하지 않았다.
해봤자 표도 안 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으니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하던 일이었다.
바쁜 엄마를 돕고 싶었던 것이다.
착하게 지내면
더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가을이 깊어가던 무렵,
저녁 식사를 끝내고
그날따라 몹시도 피곤해 보였던 엄마를
나는 그냥 볼 수가 없었다.
곧 국민학교 3학년이 될 나는
"엄마, 오늘 내가 설거지할란다."
"힘들 낀데, 괜찮겠나?"
"안 힘들다. 나도 할 수 있다 안 하나."
"그래, 해봐라."
나는 설거지를 시작했다.
수돗물이 시간을 정해서 나오니까
부엌 한편에 커다란 독에 물을 받아놓았다.
설거지통에 가득 담긴 그릇들을 보자
나는 설거지를 자진해서 하겠다고 한 스스로가 후회스러웠다.
바가지로 찬물을 네다섯 번 통에 퍼담고,
초록 수세미에 퐁퐁을 덜어 그릇들에 묻혀가며 닦았다.
먹을 땐 몰랐는데
김치찌개 빨간 국물이 비위가 상했다.
수세미 칠한 그릇들을
다른 통에 옮겼다가 바가지로 물을 퍼서 담았다.
두세 번 더 헹궈내기만 하면 되었다.
손도 시리고 발도 시렸다.
고사리 같은 손끝이 빨개졌다.
설거지를 하는 내내 나는 힘들어서 구시렁거렸다.
"설거지가 왜 이리 많노?"
"진짜 힘들대이."
"휴, 너무 많다 아이가."
방 안에서 텔레비전 보며 쉬고 있는 엄마 아빠 들으라고 더 크게 말했다.
나는 내심 힘들면 그만하라는 얘기를 듣고 싶었다.
쭈그리고 앉아서 설거지를 하다 나는 울고 말았다.
목과 어깨가 쑤시고 너무 아팠던 것이다.
방에서는 9시 뉴스 소리가 새어 나왔다.
나는 혼자 고생하는데
다들 편안하게 쉬고 있다고 생각하니
샘통이 났다.
설거지를 다하고 방에 들어가니
엄마가 말했다.
"그래 힘들드나?"
토라진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다음에는 입 다물고 해라."
나는 속으로 다짐했다.
'앞으로는 내가 한다고 안 할 기다."
'착하게 안 살란다. 힘들어서 안되긋다.'
물론 착한 내가 갑자기 나쁜 아이가 되진 않았다.
어린 나이에 잘해보겠다고 애쓴 나도,
다섯 딸을 낳아 기르느라 고생한 엄마도
좀 안됐다.
연탄배달일을 하며 힘겨워했던 지금 내 나이보다
젊었던 엄마도 조금 짠하다고 할까.
착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이 마냥 착할 수 있나.
지금은 그때 내 감정과 상태를 알 것 같다.
자신의 감정과 상태를 잘 알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또 힘들면 힘들다고
하기 싫으면 거절도 할 줄 아는 사람이 건강하다는 것도 잘 안다.
상황이 되면
기쁨으로 기꺼이 해줄 수 있는
선한 사람이 되고 싶다.
엄마한테 이야기를 했더니
"몰랐다. 기억이 안 난다."
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