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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영은의 비밀

#14 시끌벅적 명절

by 에스더쌤


내가 명절을 어렴풋이 느낀 시점은


1980년대 초반 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일단 학교를 며칠 안 간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명절이 시작되기도 전에 같은 반 아이들은


명절을 앞두고 새 옷을 입고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명절이 끝나면 용돈을 얼마 받았는지 자랑을 늘어놓기 일쑤였.


학교에 다니기 전엔 다른 아이들은 어떤지 잘 알지 못했다. 나는 유치원을 안 다녀봤다.



명절이 다가오면 엄마의 마음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생선을 미리 사서 햇볕에 말려 놓아야 했다.


냉장고도 작고, 생선은 금세 상하니까


말려서 보관하고 명절 당일 굽거나 쪄서


제사상에 올려야 했다.


각종 나물도 사서 말려 놨다가 당일 새벽 데쳐서 무쳤다.




엄마는 겨울엔 연탄배달 일이 많아서 더 마음이 바빴다.


추석엔 그래도 나았는데,


겨울엔 일도 많고 금방 어두워지니


장을 보기도 만만찮았다.


가까운 못골시장이 있어서 필요한 것을


조금씩 사두고, 부전시장에 가면 훨씬 싸니까 버스를 타고 다녀오기도 했다.



시장풍경 사진출처:네이버






평소 사지 않는 큰 사과 세 알, 큰 배 세 알, 감 한 바가지, 밤 한 바가지 등


조금만 사도 시장바구니가 찼다.


평소 혼자 장을 보던 엄마도


그때는 언니를 데려가서 함께 장을 봐오기도 했다.


나는 아직 어려서 힘이 달리니 큰 도움이 되진 않았다.




나는 뭔가 들뜬 듯한 명절의 분위기가 좋았다.


특히 먹을 것도 많고, 친척분들이 천 원, 이 천 원씩 용돈도 주니까


용돈 받는 재미가 솔솔 했다.


명절 하루 전이나 당일은 뉴스에서 연일 민족 대이동 상황을 보도했다.


나는 끝도 없이 늘어진 차량 행렬이 신기하기만 했다.


집엔 아직 자가용이 없는데,


많은 사람들은 자가용이 있는 것도 신기했다.


얼마나 돈이 많으면 자동차를 다닐까 싶기도 했다.




우리 집에서는 딱히 설날이나 추석을 맞아 성묘를 하러 가지 않았다.


부모님이 먹고사는 것이 너무 바쁘고 힘드니까 그럴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리고 나는 조부모님을 본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아빠가 어렸을 때 돌아가시고


할머니는 아빠가 스무 살 때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외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셔서 본 적이 없었고,


외할머니는 바로 옆집 이모집에서 함께 살았다.


큰 이모네 가족이 명절에 시끌벅적하게 오면


나는 일 년 중 가장 많은 용돈을 받았다. 다 필요 없고 용돈 많이 주는 어른이 가장 좋았다.




바로 옆집이지만 큰 이모네와 우리 집은 각자 제사를 지냈다.


엄마는 당일 새벽부터 일어나서 나물을 무치고, 생선을 굽고,


두부도 부쳤다. 그 바쁜 와중에 떡도 직접 했다.


단술도 담그고, 전을 미리 부쳤는데 언니들이 도왔다.


막 튀겨낸 오징어튀김과 고구마튀김은 너무 맛있었다.


바삭바삭하고 따끈한 튀김맛은 잊을 수가 없다.


"영은아, 자 한 개 묵어라이."

"앗, 뜨거. 맛있다. 언니야. 한 개만 더 주라."

"안 된다. 내일 제사 끝나믄 무라."

"지금이 딱 맛이 좋은데, 아깝대이."



다음날이 되어 식어버린 노란 튀김은 맛이 없었다.


역시 음식은 막 하고 나서 먹어야 제맛이다.


탕국은 쇠고기와 무로 끓여내고 국간장으로 간을 했다.


끓일수록 깊은 맛이 났고 가끔은 홍합이나 조개류도 함께 끓이곤 했다.


명절 당일 아빠는 엄마가 내준 음식을 상에 올리고


숟가락을 밥과 탕국에 담그고 방향에 맞게 음식을 올렸다가


절을 두 번 하고 물러섰다가


마지막엔 모든 음식들을 조금씩 덜어서 신문지를 몇 겹 포개어


올려서 대문 밖에 내놓았다.


우리 집뿐 아니라


온 동네가 그렇게 하니 길거리엔 음식 냄새가 진동을 하였다.


며칠이 지나도록 길고양이와 개들이 먹다 남은 음식이 즐비하였다.


명절은 거지들과 길냥이와 개들에게 잔치였을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화투판을 벌이고 담배를 피웠다.


나는 옆에서 구경하다 술도 받아오고


담배 심부름도 해서 또 거스름돈을 챙겼다.


술에 취해 발그레한 얼굴로


친척들이 지폐를 주기도 했다.


그림 맞추기에 혈안이 되어


아무리 재미 삼아 돈을 걸었어도


누가 맞네 틀리네 고성도 오갔다.


여인네들은 그런 지아비가 뭐가 이쁘다고


술상을 나르고 밥을 차리고 치우기를 반복했다.




어느 추석이었다.


명절엔 많은 사람들이 들고나고 그러니


엄마가 신발을 신발장 안에 다 넣어 두었다.


우리 집과 큰 이모네가 연결되어 있어,


명절 아니라도


오다가다 현관을 함께 이용할 수 있었다.




저녁이 볼일이 급해진 나는 신발을 찾는데,


마음은 급하고 어쩔 줄을 몰랐다.


"내 신발이 어데 갔노?"


마침 외할머니 고무신 밖에 없었다.


참다 참다 더 이상 참을 수는 없고,


신발은 없고


나는 옷에다 실수를 해버렸다.


이건 참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문제는 명절이라 사과와 배, 떡과 튀김 등을


많이 먹어서인지 싸면서도 느껴질 정도로


아주 굵고 길었다.


오줌 실수도 한 적이 없는 모범생인 나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비록 온 동네에 소문난 울보였어도,


똥을 옷에 싸버리다니.




큰언니가 나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 가시나가 다 커 가지고 어데다 똥을 싸노?"


1학년이나 돼 가지고 나는 너무 놀랐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그래서 할 말을 잃었다.


그런데 큰언니가 너무 소리를 치고 그러니까 더 당황스러웠다.


큰언니는 바쁜 엄마를 대신하여


나의 아랫도리 옷들을 벗겨서


처리를 하고 씻는 것을 도와주었다.


재래식 화장실이라 옷에 싼 변은 변기에 버리고


옷은 여러 번 헹궈내고 비누로 빨았다.



큰언니는 어린 시절에 볼 일을 보다


변기에 빠져 죽을 뻔한 일이 있었다.


마침 아빠가 있어서 얼른 빼내서 망정이지,


쌓인 변보다 가스로 질식해서도 죽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명절이 끝나고도 계속 먹는 건 영 별로였다.


며칠 내내 그 나물에 그 밥으로 비벼도 먹고,


남은 생선과 전을 넣어 전골처럼 끓여 먹었다.


나는 비위가 상해서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막 만든 음식을 좋아한다.


모두가 다 그렇겠지만.




아빠는 명절만큼은 딸들 모두에게 용돈을 주고


본인도 생전 안 쉬던 일을 쉬어서인지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일 년 중 가장 많은 용돈을 받을 수 있어서 명절이 좋았다.


내 생각에는 왜 상에다 여러 음식을 차렸다가 절을 하고 밖에 내놓는지,


그러면 귀신이 먹기나 하는지 의아했다.


명절이건 아니건 고생하는 엄마가,


명절에는 배로

고생하는 모습이 못내 아쉽기도 했다.




그리고 명절이 끝나면 엄마는


고모들이 미리 와서 도와주지 않았네,


오면서 제대로 된 선물이 없었네 하면서


그렇게도 하소연을 늘어놓으니


명절은 실수와 더불어 썩 유쾌하지 않은 기억도 혼재하는 날이었다.


특히나 제사를 준비하느라 음식을 준비하느라 여성들의 고생이 많으니까


나는 그런 점에서는 명절이 누구를 위한 날인가 싶기도 하다.


시대가 변해서 긴 연휴 기간 여행도 많이 다니고


이제는 많이 편해졌다.


명절을 맞아 고향을 방문하고

평소 만나기 힘든 가족들과 친지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점은 좋은 일이긴 하다.


명절만 되면 어린 시절 내 실수가 떠오르고

그립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하다.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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