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심심한 호영은
나는 너무 심심했다.
학교에 다녀오면 다들 어디에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다.
세 언니들도 나름 바빴다.
도시락 2개씩 싸다니면서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집에 오면 밤이었고,
다들 자야 했으니 얘기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
학교에 다녀온 나는,
주로 세계명작동화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방청소를 했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살살 바닥을 쓸었다.
그리고 걸레를 세숫대야에 넣어서
힘없는 손목이지만 꽈배기 모양으로 물기를 빼고
네모 반듯하게 접어서 방의 반을 닦고 나서
또 뒤집어서 무릎을 꿇고 닦았다.
다 닦고 나서 걸레를 빨아서 빨랫줄에 널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나는 엄마가 평소에 하던 대로 따라 했다.
가끔 어느 날 하염없이 같이 놀 누군가가 그리웠다.
나보다 열 살 많은 큰언니부터 사춘기를 지나는 언니들은 예민해서 말 붙이기도 무서웠다.
여느 날처럼 학교에 다녀와서 나는 몰래 사이문을 지나 이모네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쪽파를 넣어 부친 달걀말이가 있었다.
달걀 조각마다 케첩으로 점을 찍어 놓았다.
랩으로 접시를 덮어 놓았다.
나는 랩을 벗겨 너무 티 나면 안 되니까 두 조각을 먹었다.
꿀맛이 이런 걸까 싶었다.
엄마는 댤걀프라이를 하거나 달걀말이를 해도
쪽파는 안 넣었고, 우리 집에서는 케첩을 안 먹었다.
달콤하고 짭짤하면서도 새콤한 케첩의 맛은 달걀의 맛을 더 좋게 했다.
그러고도 모자라 나는 이모네 거실장을 열어보았다.
담뱃갑과 성냥이 보였다.
어른들은 틈만 나면 담배를 피웠다.
매캐한 연기가 싫었지만, 나는 담배맛이 궁금했다.
아빠가 하듯이 성냥갑을 열어 성냥을 하나 그어보니 불이 붙었다.
불꽃을 아래로 향하게 드니 금세 성냥이 타올라서
검지손가락에 불이 붙었다.
본능적으로 '후' 하고 불어서 불을 껐다.
처음 느껴보는 통증에 정신이 얼얼했다.
거기서 멈춰야 했다.
그런데 나는 담배맛이 너무 궁금했다.
어른들이 왜 그렇게 피워대는지 알고 싶었다.
다시 성냥불을 붙여 이번엔 불꽃이 위롤 향하게 하고 담배에 불을 붙여 보았다.
성냥불을 얼른 껐다.
담배를 한 모금 빨다 목이 막혀 기침이 나왔다.
"맛도 없는데, 와 피는가 모르겠네."
나는 그 뒤로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나는 가끔 성냥을 숨겨놨다가 종이에 불을 붙여 보았다.
적당히 태우다 불만 끄면 된다 싶었다.
누가 뭐라고 말해주는 사람도 없으니 잘못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러다 진짜 집에 불을 낼 뻔했다.
책상 위 종이들에 옮겨 붙어서
불이 점점 커지는데 한순간이었다.
급한 마음에 겉옷으로 확 덮어서
불을 끌 수 있었다.
장난 중에 불장난이 제일 재미있었는데 겁이 나서 그건 그만두기로 했다.
한 번은 내가 집에 왔는데 또 아무도 없었다.
어떤 감정인지 스스로 알아차리긴 힘들었지만
유쾌한 감정은 아니었다.
외롭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울컥했다.
형광색으로 반짝이던 자를 창문을 향해 세게 던져버렸다.
와장창 하고 유리가 깨어졌다.
자를 던지면 유리창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순간 겁이 나서 밖에 나가버렸다.
꼬불꼬불 골목 위를 지나 동네에서 가장 큰 놀이터가 있는 광안감리교회로 갔다.
교회 안 마당 중앙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그 옆으로 그네도 있고 회전의자도 철봉도 있었다.
평소엔 온 동네 아이들도 북적이는 놀이터에 그날따라 사람이 없었다.
나는 발을 하나씩 걸어 거꾸로 놀이터에 올라갔다.
철봉보다 재미있었다.
재미를 막 느끼는 찰나, 손에 힘이 풀려
뒤로 나자빠졌다.
그네 높이가 있다 보니 생각보다 충격이 컸다.
나는 잠시 꼼짝을 못 하고 누워있었다.
손가락이 화상으로 욱신거렸던 것과는 또 차원이 달랐다.
온몸에 전해지는 고통의 메아리.
살아있다는 것은 몸이든 마음이든 아픔을 느끼는 것이었을까.
너무 아파서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겨우겨우 기어서 몸을 일으켜
어둑어둑해진 저녁 하늘을 바라보며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꼬리뼈가 끊어질 듯 아팠다.
그런데 나는 집에 가서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느낌이었는지,
그네에 올라가다 어떻게 넘어졌는지,
떨어져서 어땠는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평소 그런 말을 하고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당시엔 몸인지 마음인지에 대한 인식도 없었지만 말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했다간,
"가시나가 조심성이 없이 어데를 올라갔드노?
죽을라고 환장을 했나?"
이런 반응을 듣기라도 할까 봐 입을 다물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갔더니
일이 끝나고 돌아온 부모님은 누가 유리창 깨 놓고 말도 안 했느냐고 호통을 쳤다.
나는 차마 내가 깼다고 말도 못 하고
시치미를 뚝 뗐다.
엄마아빠도 그날은 지쳤는지 취조할 힘도 없고,
유리장수 사장님을 찾아가 조치를 취했다.
나는 겉으론 조용하고 얌전했는데
알고 보면 사고뭉치였고,
몸에만 멍이 든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멍이 들었다.
거짓말을 한 것과 다를 바 없는 본인의 행동으로
죄책감도 느꼈다.
솔직하게 말했다고
보상이 주어지지도,
숨겼다 해도
알기도 어려울 것이니까.
나는 부모님이
어떨 땐 넘어가고, 또 어떨 땐 사소한 것에
감당할 수 뿜어내는 분노에 혼란스럽기만 했다.
내가 사고를 치는 이유는
심심해서,
또 외로워서였다.
그렇게라도 해야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성냥불에 덴 손가락과 한 번 피워본 담배맛이 아련하게 느껴진다.
아직도 심심한 것을 못 참고
스릴 있는 활동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 실컷 못 해봐서일까, 기질이 그런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