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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영은의 비밀

#12 롤러스케이트

by 에스더쌤


오후부터 잠깐씩 보게 되는 텔레비전은

나에게 늘 새로운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신비스러운 상자였다.

뉴스를 통해 듣고 보게 되는 새로운 세상,

드라마를 통해 접하게 되는 새로운 문화,

광고를 통해 접하는 새로운 신문물 등

텔레비전은 책과는 다른 미디어인 것이 분명했다.


나는 텔레비전에서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사람을 보았다.

국민학교 전체조례 때 롤러스케이트로 1등 상을 받았던 껄렁껄렁해 보이는 6학년 오빠들이 신기했었다.

보통은 공부를 잘하거나, 수학이나 영어, 웅변 등으로 상을 받았다.

롤러스케이트로 상을 타다니.

그것도 깡패 같은 비주얼의 소위 좀 논다는 오빠들 몇이 개인상과 단체상을 받았다.




올림픽 경기 아이스링크에서 우아하게 듀엣으로 혹은 홀로 스케이트를 타던 아름다운 사람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부산에 아이스링크는 없었지만, 서면과 사직운동장에서는 롤러스케이트를 빌려준다고 들었다.

먼저 서면에 있는 비둘기스케이트장에 가보았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깡패 소굴이었다.

껌을 쫙쫙 씹는 퍼머머리 언니들, 욕설이 난무하는 오빠들이 좀 무서웠다.


나는 사직운동장에 혼자 가보기로 했다. 친구들에게 이야기해 보니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먼저 버스를 타고 서면으로 가서 사직운동장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버스노선에 대해 잘 알진 못했지만,

1학년 때부터 엄마 심부름으로

이모집까지 버스를 갈아타고 다녀본 나는 이제 5학년이다.

차비와 롤러스케이트를 빌릴 돈을 준비했다.

버스비는 국민학생이라 70원인데 롤러스케이트를 빌리는데 700원이었다.


사직운동장에서 내리니 가을의 햇살은 눈부셨고 바람은 시원해서

스케이트 타기에 딱이었다. 평일이라 사람도 많이 없었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설레기도 하고 겁이 나기도 했다.

탈 줄도 모르는데 말이다.

버스정류장 주변과 길 건너 여러 군데의 스케이트 대여장이 보였다.

일단 제일 가까운 가게로 가서 신발 사이즈를 말했다.

220mm의 스케이트는 끈으로 되어 있어서 대충 신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서 있을 수도 없을 만큼 미끄러운 데 도무지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일단 길을 건너야 하는데,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너무 미끄러울 땐 앞부분으로 꾹 눌러서 중심을 잡았다.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했다.

간신히 횡단보도를 건너서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와 스케이트를 타고 있는 중앙광장으로 갔다.

아뿔싸. 바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순간 고통으로 나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미친다. 진짜. 아파 죽겠네."

'이럴 줄 알았으면 안 탔을 긴데.'


후회가 밀려들었다.

얼마나 심하게 다쳤는지

30분 이상 엉덩이를 바닥에 깔고서 일어서지도 못한 채 앉아있었다.

그래도 어떻게 온 사직운동장인데 싶어서 나는 기어코 일어나서 한 시간여를 탔다.

이런 건 용기라고 해야 하나, 무모함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배워본 적도 없는 스케이트를 스스로 터득하였다.



그렇게 나의 스케이트 사랑이 시작되었다.

몇 개월이 지나도록 엉덩이의 통증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스케이트만 생각하면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워낙 먼 길이라 자주 갈 수는 없었지만,

나는 시간이 나면 버스를 타고 사직운동장에 가서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어떨 땐 자전거도 빌려 탔다.

두 발 자전거를 타 본 적도 없는 나는

일단 두 발 자전거를 빌린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타는 것을 자세히 봤다가 따라 했다.

몇 번 넘어지기를 반복한 후 금세 자전거도 타게 되었다.


어느 날 언니와 시장을 지나가다가

신발가게에 진열된 형광색 롤러스케이트를 보게 되었다.

'그래 이거다.'싶을 만큼 좋았다.

한 번 갈 때마다 차비와 대여비 그리고 간식비까지 하면 1000원쯤 들텐데,

34000원의 롤러스케이트를 사서 서른네 번만 타면 본전을 뽑겠구나 싶었다.

나는 그날부터 아빠에게 용돈을 매달 3000원씩 달라고 해서 모으기 시작했다.

명절 때 모은 것과 합치니 얼마 지나지 않아 3만 원을 모으게 되었다.


"아빠, 내 4000원만 보태주세요."

"와 그라노?"

"스케이트 살라고예."

"그거 사가지고 어데서 탈라고 그라노?"

"옥상에서 타도 되고, 교회 마당에서 타도 되고, 사직 운동장에 들고 가면 된다고예."


영은이의 언니들과 동생과는 다른 집요한 나,

나는 원하는 것을 어떻게든 손에 넣고야 말았다.

드디어 꿈에 그리던 롤러스케이트를 사게 되었다.

얼마나 신나고 좋은지 말로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막 드르륵 거리며 타고 있는데,

주인집 언니가 올라왔다. 언니는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너무 시끄러워서 공부를 못하겠으니 그만 타라."


나는 속상해서 고개만 끄덕이고 대답도 안 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라지만,

처음 사서 타봤는데 서러웠다.

주인집 언니들은 둘 다 큰언니만큼 공부를 잘했다.

새벽 5시면 어김없이 불을 켜고 공부했다.

공부가 안된다니 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고 싶던 롤러스케이트는

사자마자 제대로 타보지도 못하고 신발장 구석에 처박히게 되었다.

막상 사고 보니,

별로 타고 싶지도 않고,

탈 데가 마땅찮았기 때문이다.

사직운동장에 매번 한 시간이 걸리는데 나서기가 쉽진 않았다.

골목골목 계단에 언덕인 데다, 교회마당은 흙이라 스케이트 타기에 좋지 않았다.


어쨌든 신발장에 있는 롤러스케이트를 볼 때마다 예전만큼 간절하지도 않고,

시큰둥한 것이 나 스스로도 놀랐다.

그렇게 가지고 싶었던 물건인데 막상 가지고 보니 대수롭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나이를 먹고 인생을 알아가고 있었다.

간절히 원하고 기다려서 얻게 되어도 그 기쁨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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